존재·의식·기억 사이 틈새로 펼쳐내는 알레고리

입력 2024.05.15. 17:21 최민석 기자
광주 출신 김솔 소설 '행간을 걷다' 출간
익숙한 장소 인물 상상으로 안내
언어 아닌 여백으로 이야기 완성
삶의 생동과 진실 속 욕망의 본질

소설은 낯설게 하기 기법을 통한 개연성 획득으로 서사를 펼쳐내는 문학적 장르로 꼽힌다.

광주 출신 김솔 작가의 신작소설 '행간을 걷다'(현대문학刊)가 핀 시리즈 쉰한 번째 소설선으로 출간됐다. 김솔 작가는 지난 2012년 등단 이후 익숙한 장소와 인물을 등장시키는 듯하지만 특유의 낯설게하기 기법으로 독자를 전혀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언어가 아닌 여백으로 이야기를 완성해나가는,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가"(이기호) "정교함과 분방함 사이에서 10년 이상 안정적으로 주행해온 그의 문장이, 어째서 여태 소수의 독자에게만 발견되어 일종의 비의(秘儀)처럼 읽혔는지 미스터리다"(구병모)라는 평가를 받는 김솔의 이번 소설은 한 남자의 두 개로 나뉜 자아에 관한 이야기이다.

금고 제작자의 삶을 살다 환갑을 앞두고 뇌졸중을 앓게 되며 편마비가 온 남자는 마비된 한쪽 몸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권태와 회환에 빠질 것이라 예감한다. 죽음의 그림자를 품고 살게 된 남자는 마비된 몸과 온전한 몸으로 자아를 나누고, 마비된 쪽을 '너'(혹은 '쉥거')라 지칭한 후, 그 안에 회환과 무력을 파묻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온전한 쪽만을 '나'라 여기고, 그 안에서 자기에게만 유효한 시간을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밝혀지지 않은 병의 원인이 몸속에 숨어 있다면 밝혀지지 않은 치료 방법 또한 몸속에 담겨 있을 것이라 여긴 남자는 매일 같은 시간에 하천을 따라 걷기로 결심한다. 매일 만나는 하천은 뇌졸중 환자의 시간처럼 느리게 흐르는 듯 보이지만, 고요한 그곳은 사실 군부 독재 시절 개발로 사라지고 인공 하천으로 거듭난, 뒤틀려진 욕망이 자리한 곳이다. 남자는 산책을 하며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과 미수에 그친 이야기 등을 떠올리며 자신을 둘러싼 욕망의 본질과 속성을 파헤치려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죽은 '너'와 살아 있는 '나'는 '우리'가 되고, 하천은 행간이 되고, 이야기는 물을 사이에 둔 길 위의 모든 것이 되며 영겁과도 같은 천변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시종일관 새로운 시공간을 열어젖히며 생의 기쁨을 조잘거리는 이 소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일설하는 바는 명징하다. 삶의 생동과 진실이 약동하는 림보, 모순이 요동치는 여백, 모든 순간의 코리스모스가 살아 숨 쉬는 행간이 존재해야만 우리는 살 수 있다는 것. 그런 이중성의 시공간을 사유하며 '행간을 걷다'라는 현재진행형의 문장을 시인처럼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동어반복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 특수한 양자적 진술의 세계야말로 모두에게 모순적이어서 공평한 이 시대의 보편적 정신이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하천을 따라 산책하는 주인공과 함께 소설이 던지는 화두를 함께 풀어가며 존재와 존재, 의식과 의식, 기억과 기억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틈새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소설이다.

김솔 작가는 73년 광주에서 태어나 2012년 한국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번째' '망상,어語''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유럽식 독서법' '당장 사랑을 멈춰주세요, 제발''말하지 않는 책', 장편소설 '너도밤나무 바이러스' '보편적 정신' '마카로니 프로젝트 ' '모든 곳에 존재하는 로마니의 황제 퀴에크' '부다페스트 이야기' '사랑의 위대한 승리일 뿐' 등이 있으며, 문지문학상과 김준성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한편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오세열 작가가 표지 작업을 맡았다.

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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