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과 상처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

입력 2024.04.15. 18:32 최민석 기자
이병초 시집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 출간
봄바람에 날아든 연서같은 시들
전북 토속 언어 서정 깃든 모성
뼈아픈 세상살이 빗대 쓴 기록

사랑은 우리 모두 태어날 때부터 늘 곁에 자리해 있다.

그 사랑은 우리를 키우고 살아내게 한다.

이병초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걷는사람刊)를 펴냈다.

그가 8년 만에 낸 이 시집을 펼치면 고단한 삶의 행군은 여전하고 긴 세상살이에 따듯한 아랫목 하나 못 찾았어도 성냥불 켜 주는 마음이면, "긴 겨울잠을 털어 버린 듯/는실날실 봄바람 타는 버들가지들"('버들가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노래하는 59편의 시를 만나게 된다.

시인이 평생토록 가슴에 품은 사랑(시에서 '옥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이 누구인지 몰라도 시집을 넘기는 독자들 누구나 옥이가 되어, 옥이를 목메어 부르는 마음이 되어, 봄바람에 날아든 한 장의 연서(戀書) 같은 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의 언어는 고향(전라북도)의 토속 언어와 서정에 크게 기대어 포근한 어머니의 품, 첫사랑의 따스함 같은 감정들을 시로 풀어내고 있는 한편, '농성일기'라는 부제를 단 3부에서는 대학 비리를 고발하는 주체로서 천막 농성을 하며 느낀 감회를 뼈아픈 세상살이에 빗대어 써 내려간 기록이 이어지기도 한다.

전라북도 방언은 부드러우며 된소리가 별로 없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말을 할 때 마치 노래하듯 '겁~나게', '포도~시(겨우)' 등과 같이 늘여 빼는 가락을 넣는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리듬감이 이병초의 시에서는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기저로 작용한다. 간조롱히(가지런히), 짚시랑물(낙숫물), 눈깜땡깜(얼렁뚱땅), 깜밥(누룽지), 당그래질(고무래질) 같은 말들이 되살아나 우리의 귀를 저편으로 트이게 하고, 입술을 쫑긋거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맑은 눈으로 발견한 "오디별", "시냇물벼루" 같은 표현들이 그림처럼 선연히 그려지며 우리 앞에 한 자락의 시냇물을 데려다 놓기도 한다.

"오늘 밤에도 눈이 내린다/ 잠들지 말자고 잠들면 죽는다고/ 꽁꽁 언 손발 맞비비며/ 열아홉 숨결이 빨아들이던/ 그 불씨에 목숨 기댔던 밤처럼/ 송이송이 어둠살 펴 주듯 눈이 내린다/ 소주가 차갑게 빛난다/ 무덤 속 같은 헛간을 빠져나와/ 어금니 거덜나도록 떠돌았어도/ 여태 아랫목을 못 찾았다/ 그만 자자고 불을 끈다/ 보고 싶은 얼굴이 소복소복 쌓인다/('눈 내리는 밤에' 중 일부)

각각의 시를 읽으면 숨 막히게 아름다웠던 첫사랑의 기억으로부터 페이지들을 차례차례 넘기며 섬세한 언어로 빚은 사람과 풍경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김근 시인은 "느닷없는 물음에 답을 찾으려 어지러운 가슴속 서랍들을 여기저기 뒤지다 보면 어느새 알게 된다. 내게도 죄다 들켜 버리고 싶은 시절이 있었음을, "심장이 찔리고 싶은 별"('내 시간을 외등처럼 켜 놓고') 하나 아직 반짝거리고 있음을. 그리고 깨닫게 된다"고 평했다.

정재훈 평론가는 "아무리 "내 몸과 마음이 처음부터 유배지('코스모스')였다고 해도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쌀알처럼 작은 빛 때문이었다"며 "연약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일용한 양식들은 하나같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고, 이것들은 계속해서 살아 있으라는 신호가 되어 내 머리 위로 똑똑 떨어진다. 이병초의 시가 품고 있는 온기를 '사지(死地)에서 온 편지'"라고 평했다.

이병초 시인은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1998년 '시안'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와 시 비평집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와 역사소설 '노량의 바다'를 냈다.

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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