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와 분열의 미국을 들여다보다

입력 2024.01.25. 15:52 최민석 기자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설치된 2024년 숫자 전광판 앞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뉴시스

사람은 떠나도 글은 남는다.

2023년 12월 18일, 디아스포라 에세이스트 서경식이 세상을 떠나자,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서경식의 죽음에 슬퍼한 것은, 그가 생전 날카로운 사유를 벼려낸 특유의 아름다운 글로 제자리 없이 헤매는 수많은 이들에게 벗이자 스승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많은 이들의 벗이자 스승이었던 우리 시대의 경계인, 서경식의 유작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이 출간됐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은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영국 인문 기행'에 이은 '나의 인문 기행' 시리즈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책이다. 언제나 그의 글에는 현실에 대한 첨예하고도 치열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나의 인문 기행' 시리즈의 이전 책들 또한 인문주의의 의미,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통찰들로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에서는 그가 전작에서 다뤄온 주제들에 더해, 자유와 환대의 기치를 내건 미국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세계가 마주한 암울한 현재에 대한 사유가 특히 빛난다. 서경식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재난과 전쟁 범죄, 국가 폭력의 끔찍한 현실 속에서 "도덕의 거처"를 묻는다.

이 책에서 서경식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직전인 2016년과 학생운동을 하던 중 수감된 두 형(서승과 서준식)의 구명 활동을 위해 미국을 오갔던 1980년대,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고통받는 2020년을 오간다. 그는 세 시간대를 오가며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가 극심해지며, "전쟁 도발이 먹구름처럼" 드리운 세계에 대한 깊은 염려를 표한다. 동시에 자신이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과 예술 작품을 떠올리며 '선한 아메리카', 더 나아가 '선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사유의 단상을 전한다.

옥고를 치르던 형들의 구명운동을 위해 방문한 뒤,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미국은 자기중심주의와 불관용이 극심해지는 곳이다. 소수자를 향한 차별적인 언행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자로 부상하고, 여러 문화가 뒤섞여 "서로 갈등하고 항쟁"하는 다양성이라는 가치보다 '단일'을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나날이 커지는 곳이다. 그런 미국에서 서경식은 자신에게 선의를 가지고 다가와준 이들과,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진실'을 용감하게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만난다.



서경식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미술관 복도를 거닐며, 부정의에 저항하며 해방의 씨앗을 심으려고 했던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암담한 현재를 똑바로 응시하며 "쓰고 그리는 일"의 의미를 묻는다.

"예술가는 항상 오만함에 맞서는 기개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한 모멸의 태도를 갖춘 자"라는 벤 샨의 말처럼, 서경식이 불러낸 예술 작품들은 우리가 부정의에 맞서고 선의를 나눌 줄 아는 '인간'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배제의 목소리가 높아져가는 미국에서 그가 발견한 관용과 연대, 공감의 조각들은, 우리를 "자기중심주의와 불관용"의 세계가 아닌 "복수의 문화가 부딪히는", "환대와 자유"의 세계로 이끌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긴 악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라는 그의 말대로 세계는 '긴 악몽의 시대'에 들어섰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은 매일 수많은 사상자를 낳고 있다.

폭력이 진부해지는 세계, 죽음이 식상해지는 세계를 염려하는 서경식이 이번 책에서 집어 든 이름은 '에드워드 사이드'다.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이자 기독교인, 미합중국 국민"이었던 사이드는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시당하는 팔레스타인 민중 편에 서서 항상 싸웠다." 서경식은 책의 마지막 두 장을 할애해,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실을 이야기"해온 사이드의 삶과 저술을 반추한다. 이를 통해 '타자'에 대한 적개심을 감추지조차 않고 파괴와 살육을 쌓아나가는 세계에서, 체념하지 않고 정의와 진실을 위해 싸운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긴다.

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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