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16. 최경선

1894년 2차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남 지역에서는 여러 농민군 세력이 각기 권역을 형성하며 항전을 이어갔다. 순천·광양·승주·낙안에서는 김인배, 무안·함평·영광에서는 배상옥, 광주·장성·나주에서는 손화중과 최경선, 장흥·강진·보성·해남에서는 이방언, 담양·곡성·구례에서는 김개남이 농민군을 이끌었다. 이 가운데 최경선은 손화중과 함께 광주·나주 일대의 농민군을 지휘하며 나주성 공략에 앞장선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최경선은 1859년 11월 8일 태인현 서촌면 월천마을, 현재의 정읍시 북면 마정리 월천마을에서 최성룡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병석이고 초명은 만석, 자는 낙필이었다. 판결문에는 최영창, 자는 경선으로 기록돼 있다. 사발통문에는 ‘경선(景宣)’, 전봉준 공초에는 ‘경선(慶善)’으로 적혀 있어 자료에 따라 한자 표기가 다르게 나타난다.
최경선의 부친은 통사랑의 품계를 지녔고 형은 진사였다. 태인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유학뿐 아니라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적 배경에 안주하지 않고, 백성들이 처한 현실에 눈을 돌렸다. 32세 때인 1890년 무렵 동학에 입도한 그는 주산마을을 중심으로 포덕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892년 접주가 되면서 태인 지역 동학 조직을 이끄는 인물로 성장했다.
1894년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해 고부로 진출할 때 그 수는 4천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태인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경선의 농민군 300명이 합세하면서 농민군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최경선은 동학 조직을 이끈 접주에 머물지 않고 농민군을 모집하고 지휘하는 장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전주화약 이후 최경선의 활동 무대는 태인을 넘어 전남 지역으로 확대됐다. 그는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나주와 광주 일대에서 농민군의 후방을 맡았다. 장성·담양·순창·옥과·남원·창평·운봉 등지를 돌며 군율을 바로잡고 농민군의 사기를 높였다. 장성·담양·동복 등지에서 새롭게 농민군을 모집한 그는 나주 접주 오권선 등과 연계해 나주 북면 일대를 장악했다. 이어 오권선의 근거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나주성 공략에 나섰다.
당시 나주는 전라도 서남부의 행정·군사적 요충지였다. 나주성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전남 지역에서 농민군의 세력을 안정적으로 확대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나주목사 민종렬은 수성군을 조직해 성을 굳게 지켰다. 이 때문에 나주성은 1894년 전남 지역 동학농민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핵심 전선이 됐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1만여 명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나주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이때 민종렬의 부하 이원우가 사람을 보내 “나주 백성들이 성을 지키느라 몹시 곤궁하여 날마다 도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며 “오늘 저녁 동문을 열어놓을 테니 시각을 어기지 말라”고 전했다.
최경선은 이 말을 믿고 새벽에 농민군을 이끌고 동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안으로 10여 보쯤 진입했을 때 “갱도에 빠뜨려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계략에 빠졌음을 알아차린 최경선은 급히 성 밖으로 물러났으나, 미리 배치된 복병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했다. 이후 최경선은 장성으로 물러나 전봉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황현의 『오하기문』에는 전봉준이 “무슨 까닭으로 먼저 싸움을 걸었는가. 최경선은 내 말을 듣지 않고 패전했으니 내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고 질책한 내용이 전해진다. 이는 최경선을 내친 것이 아니라 그가 독자적으로 전선을 책임질 수 있는 장수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전봉준의 질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가을 전봉준이 일본군의 조선 침략에 맞서 2차 봉기를 준비하자 최경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그는 광주 일대에서 군자금과 군량을 확보하고 농민군을 모집하여 전봉준에게 보내는 일을 맡았다.
삼례에서 북상 작전을 준비한 전봉준은 최경선에게 함께 올라오지 말고 광주로 내려가 그곳을 지키도록 했다. 일본군이 전라도 해안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손화중과 최경선에게 광주·나주 일대를 지키게 한 것은 이 지역이 후방이 아니라 일본군의 진입을 저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의미한다. 최경선은 북상 농민군을 지원하는 동시에 전남 서남부의 방어선을 유지하는 중책을 맡았다.
광주로 돌아온 최경선은 오권선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나주성 공격에 나섰다. 1894년 10월 21일 그가 이끄는 광주 농민군 700여 명은 나주 첨산에 진을 치고 나팔을 불며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면서 전진했다. 광주 농민군과 나주 수성군은 한 시간 넘게 격전을 벌였다. 어느 쪽도 쉽게 승기를 잡지 못할 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부산 주재 일본총영사가 작성한 「동학당 수령에 관한 보고」는 최경선을 동학당을 이끄는 네 명의 수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했다. 일본 측도 최경선을 지역의 일개 접주가 아니라 동학농민군 전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지도자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경선과 배상옥이 이끄는 농민군은 양쪽에서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끝내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11월 27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태인전투를 끝으로 해산하자 살아남은 농민군 일부가 광주로 내려와 손화중과 최경선의 부대에 합류했다. 이들은 다시 나주성 공략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곧이어 일본군과 관군이 담양을 거쳐 광주로 진격하면서 농민군은 더 이상 광주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최경선은 화순 동복으로 이동해 병력을 수습한 뒤 남평을 점령했다. 이에 다급해진 나주 초토영은 포군 300명과 민병을 출동시켰다. 최경선의 농민군은 능주 방면으로 빠져나가며 항전을 계속했다. 12월 1일 광주를 떠난 그는 남평에서 식량 등을 확보한 뒤 약 2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다시 동복으로 향했다.
최경선은 손화중과 광주에 함께 있다가 12월 1일 작별한 뒤, 12월 3일 남평을 점령하고 사평마을에 진을 쳤다. 그러나 12월 4일 새벽 민병 300명의 기습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농민군 157명이 전사하고 최경선을 비롯한 62명이 체포되었다. 전남 지역에서 끝까지 항전하던 최경선 부대도 이 전투를 계기로 사실상 무너졌다.
체포된 최경선은 담양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에 넘겨졌다가 나주 감옥에 갇혔다. 당시 나주에는 순창에서 붙잡힌 뒤 일본군에게 인계되어 압송된 전봉준도 수감되어 있었다. 부상을 입은 전봉준은 담양을 거쳐 나주로 압송되는 데 7~8일이나 걸렸다. 상처가 썩어 들어가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최경선 역시 허리를 크게 다쳐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태였다. 일본 측 자료인 「동학당 정토약기」에는 “압송되어 온 죄수 가운데 중상자가 적지 않아 임시로 병원을 설치하여 치료했다. 최경선과 같은 자는 허리를 몹시 다쳐 일어설 수 없으므로 함께 병원에 넣었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군에 인계될 당시 최경선이 얼마나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최경선은 전봉준과 함께 임시 병원에서 치료받은 뒤 서울로 압송됐다. 그리고 1895년 3월 30일 서울 좌포청의 교수대에서 37세의 나이로 처형됐다. 이날 전봉준·손화중·김덕명·성두한 등 동학농민군의 주요 지도자들도 함께 죽임을 당했다.
처형 후 친척들은 감시를 피해 최경선의 시신을 몰래 수습했다. 처음에는 고부 장순면 시동 앞산 기슭에 매장했다가 훗날 태인 칠보면 축현리로 이장했다. 그러나 남겨진 가족에게 고통은 계속되었다. 남편이 처형된 데 이어 하나뿐인 아들마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최경선의 아내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등 평생 깊은 상처 속에서 살다가 1934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최경선은 전봉준과 북상하지 않고, 광주·나주 일대에서 농민군을 모으고 군량과 군자금을 확보했으며,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에 대비해 남도의 전선을 지킨 지도자였다. 특히 여러 차례의 패배에도 나주성 공략을 포기하지 않고 동복·남평·능주 일대에서 마지막까지 항전을 이어갔다.
동학농민전쟁을 전봉준과 공주 우금치 중심으로만 이해한다면 최경선의 역할은 제대로 드러나기 어렵다. 광주와 나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또 하나의 치열한 전선, 그리고 그 전선을 지키다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 최경선의 삶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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