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속 광주 역할 배워
"민주주의 가치 계승되길"

신안 지역 학생들이 광주4·19혁명기념관을 찾아 광주 4·19혁명의 의미와 민주주의 정신을 배웠다.
신안교육지원청과 무등일보가 공동 주최한 일일 기자체험에 나선 신안 압해중학교 학생기자단이 지난 14일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동구 계림동 광주4·19혁명기념관을 찾아 4·19혁명의 발자취와 광주 민주주의의 역사를 직접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광주4·19혁명기념관은 광주 지역 4·19혁명의 자유·민주·정의 이념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2006년 건립된 공간이다.
기념관에는 1960년 3·15 부정선거와 이에 항거한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저항, 그리고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다양한 전시물과 기록으로 정리돼 있다.
이날 학생기자단은 김영용 호남4.19혁명단체총연합회장의 해설을 들으며 1층 전시 공간을 둘러봤다. 학생들은 전국 최초로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곡(哭) 민주주의 장송 데모’와 광주 시민·학생들의 항거, 마산과 서울로 이어진 민주화 운동의 흐름을 사진과 기록물을 통해 확인했다.
특히 학생기자단은 영정 봉안실에 모셔진 광주·전남 지역 4·19 희생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 영정 봉안실에는 호남 지역 4·19 영령들이 모셔져 있으며, 이 가운데 8명은 4·19혁명 당시 광주 지역에서 희생된 이들이다. 학생 기자단은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나섰던 선배 세대의 희생과 용기를 되새기며 전시물을 유심히 살펴봤다.
관람을 마친 학생기자단은 이날 기념관을 소개한 김 회장과 광주 4·19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김 회장은 광주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게 된 배경과 당시 시위 현장의 분위기, 광주 4·19가 갖는 역사적 의미 등을 학생들에게 들려줬다. 특히 광주가 전국 최초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음에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김 회장은 “학생들이 4·19혁명의 구체적인 사실과 역사를 잊지 않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이어가는 시민으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진솔 학생기자는 “이번 기자체험을 통해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용기와 노력을 알게 됐다”며 “특히 광주가 전국 최초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고 광주 학생들과 시민들의 외침이 4·19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강은혁·이진솔·임혜찬·정문정 기자
정리=박소영기자 psy1@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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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 철도, 기숙사까지 허허벌판에 들어선 도시
1934년 경성일보가 8월 10일자로 보도한 종연방적 광주공장 설계 개요와 관련한 기사 내용은 조선 제일의 대공장으로서 기대감을 드러냈다.당시 임동공장 설계 보도에 따르면 철근 철골콘트리트 벽돌 구조물(일부 지하층) 총 연건평 칠천팔백삼십팔평, 굴뚝은 철근콘크리트, 건물 이십구평, 창고는 철근콘크리트 벽돌 건물 구백구십일평, 창고 블라트폼 철골조 일백십팔평, 부속건물 목조 팔백팔평이다. 시멘트, 목재, 벽돌 등 재료는 회사 지급을 활용, 총공사비는 100만엔이다. 임동공장 공사비 100만엔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300억원에서 900억원 사이로 추산된다. 당시 은행원이나 관원의 일반적 월급에 대입할 경우 1엔은 약 4만원에서 6만원에 해당된다.임동공장 보존건물 선정 TF를 이끈 천득염 전남대 명예교수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건물이 미적으로 뛰어난 것보다 한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상징하는 양면적 평가가 엇갈리는 곳이다”며 “공장안에는 발전소, 변전소, 자재창고, 철도 등 복합시설이 갖춰진 또 하나의 도시였다”고 평가했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연간 1천800만근(1만1천t)의 목화량이 필요한 것으로 설계됐다.1934년에서 1935년 당시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 따르면 임동공장은 조선 제일의 면화산지인 전남지역 연간 목화 수확량을 모두 투입해도 240일 가동량에 그쳤다. 공장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웅장한 건물에는 수 천명의 인력을 운영할 방직시설이 갖춰져 있었다.부산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 다음으로 전국 섬유업체 중 규모나 인력구성에 있어 큰 회사였다. 전통적 농업중심의 판을 깨는 산업시설이었다.러시아 건축사가 설계한 톱니모양 지붕을 얹은 형태의 직물 생산 공장 면적은 축구장 5개가 들어설 만큼 넓었다. 지붕은 한쪽 직각을 이루고, 반대쪽은 40% 기울기를 보였다. 북향 채광창을 둔 톱니형 지붕은 직사광선을 피하면서 작업장에 일정한 자연광을 들이기 위한 방직공장 특유의 설계였다. 온도 변화를 줄여 방적 과정에서 실이 끊어지는 것을 막는데도 유리했다.생산구역에서 작업실은 원활한 방적 방직공정에 맞춰 배치됐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건물은 1층이었다. 원자재, 반제품, 완제품을 반입하고, 이동하는데 인력이 적게 들게 하기 위한 설계였다. 목화묶음이 공장안으로 들어오면 여러 단계의 방적공정을 거쳐 실이 되고 다시 직조공정을 거쳐 무명베로 만들어졌다.그러면 수천명이 24시간 기계를 돌리는 공장은 어떻게 움직였을까.임동공장에서는 기계를 돌리는 전기는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200평의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발전소는 무연탄을 원료로 2천500㎾급 전력을 생산했다. 화력과 불을 사용해 증기를 발생시키는 기력발전소는 방적공장의 전기공급을 위한 산업용 민간 자가 발전시설이었다. 연료인 무연탄은 화순탄광에서 철도를 통해 공장 내부까지 들여왔다. 공업용수는 영산강 물을 사용했다. 화재에 대비해 고가수조까지 뒀다.보일러실의 고가 수조는 당초 2개였다. 화재발생시 진압하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였다. 물은 광주천이 아닌 영산강에 취수시설을 설치, 끌여왔다. 조선총독부는 거대한 임동공장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물을 영산강 수계에서 대규모 취수토록 했다.조선총독부와 전남도가 당시 지역 농민들의 농업용수나 자연생태계보다 일본 독점자본의 공장 가동을 최우선으로 막대한 인프라 특혜를 제공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국가기록원에는 전남도가 종연방적 임동공장으로 영산강의 물을 끌어들이는 공작물 설치 및 허가를 한 문서가 남아있다. 고가수조는 방직물의 특성상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않으면 공장 전체가 타버릴 우려가 있어 이에 대비한 중요한 시설이었다.1935년 공장 준공때부터 운행된 철도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의 주요한 운송 인프라였다. 화순탄광 석탄과 원료와 면제품 수송을 위해 개설됐다. 화순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은 트럭에 실려 화순역까지만 수송됐고, 이후 열차에 실려 광주역을 거쳐 공장 내부 발전소까지 운반됐다.광주역은 현재 전남광주특별시 동구 대인동에 자리잡은 동부소방서 자리이다. 철도는 또한 면화와 제품을 외부로 실어날랐다. 1960년대 광천동 공단까지 연장돼 산업물자 수송에 활용되다가 1990년 폐쇄됐다.그러나 발전소도 철도도 스스로 공장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거대한 생산도시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수천명의 노동자였다. 그 대부분은 젊은 여성들이었다.이들의 주거시설은 기숙사였다. 임동공장은 적게는 2천명, 많게는 4천명의 노동자가 근무했다. 대다수 여성이었다. 노동자들의 숙소용으로 쓰인 기숙사는 여성용 목조단층건물 8동, 남자용 1동 사택 50호가 있었다. 1개동마다 16개의 방이 있었고, 각 방에는 14~15명이 수용됐다. 단순 계산하면 여성 노동자 약 1천800~1천900명을 동시에 수용할수 있는 규모다.여성 기숙사는 건물의 중심부에 위치, 수많은 건물과 담에 포위된 양상을 띠었다. 이 기숙사들은 종연방적이 1961년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두 개 회사로 분리 당시에 남측 기숙사는 전남방직, 북측 시설과 공간은 일신방직으로 넘어갔다. 1980년 발행된 광주시사에는 ‘1961년 전방과 일신방직으로 분리된 두 회사는 남측에 전방, 북측에 일신방직이 자리잡았다’고 기록돼 있다,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 기숙사는 1970년 철거됐다. 이후 기숙사는 철근콘트리트로 지어졌고,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규모는 아니었다.공장은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공장 내부와 주변에는 기숙사뿐만 아니라 수영장, 종교시설, 학교까지 들어섰다. 생산시설로 출발한 종연방적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확장된 것이다. 1938년 공장내에 수영장이 건설됐다.광주에서 받은 혜택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명목이었다. 1945년 11월에는 전방교회가 김형남에 의해 설립됐다. 전방교회는 기숙사 2층에서 예배를 시작으로 유치원으로 장소를 옮겼고, 1948년 예배당을 신축했다.2002년까지 방직공장 서쪽에는 전남중·고가 있었다. 전남중·고는 1951년 문을 연 광주공과기술학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공과기술학교는 방직공장이 세운 사립학교였다. 공과기술학교는 1958년 전남중학교로 변경했다.1935년 일본 자본이 세운 공장에 해방 이듬해 노동자 1천700명이 15m 태극기게양대를 세웠다. 노동자들이 뜻과 돈을 모아 일본 자본이 세운 회사에 국권회복의 상징을 세운 것이다. 건물 대부분은 이제 사라졌고 태극기 게양대도 개발을 위해 철거돼 보관중이다.1930년대 이후 280여채에 달했던 건물은 이제 5개 시설만 남았다. 발전소도 철도도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목조 기숙사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건물만으로 종연방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거대한 공장을 하루 24시간 움직인 중심에는 기계앞에 섰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있었다.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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