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12. 고막포에 선 배상옥

1894년 가을, 전남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우금치만이 아니었다. 영산강 하구의 작은 포구 고막포에서도 나라의 운명을 건 또 하나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무안의 대접주 배상옥(裵相玉)이 있었다. 지금도 무안에는 배상옥을 기르는 민요가 전해 온다.
“상옥아 상옥아 배상옥아 / 백만군대 어디 두고 / 쑥국대(사형대) 밑에서 잠드느뇨”라는 노래말이 무안에 구전되고 있다. 전봉준 장군을 상징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라는 노랫말이 실은 무안 동학을 이끈 배상옥을 두고 부르는 노래 말로 이어지고 있다. 130년이 지난 오늘도 무안 사람들은 배상옥을 잊지 않고 있다.
배상옥은 단순히 무안의 동학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무안·함평·영광·진도 등 전남 서남부 지역 동학농민군을 통솔한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 관군이 작성한 기록에는 배상옥과 그의 동생 배규찬을 전남 연해지역의 ‘괴수(魁首)’라고 기록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을 높게 평가했다. 이는 무안 지역 동학 조직이 강력한 기반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무안은 전라도에서도 동학 세력이 가장 왕성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동학사』에 따르면 1894년 제1차 봉기 당시 전남 지역 지도급 인물 89명 가운데 무안 출신이 15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 수치는 무안이 단순히 동학 신도가 많은 지역이 아니라, 지도자를 끊임없이 배출한 핵심 거점이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배상옥의 동생 배규찬은 1893년 광화문 복합상소와 보은집회에도 참여해 동학의 교조신원운동과 민중운동을 함께 이끌었다. 무안의 동학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조직이 아니라 오랜 교세와 조직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공동체였다.
배상옥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대접주로 활동하며 무안 농민군을 조직했다. 배상옥의 본명은 배규인, 족보명은 규옥이다. ‘상옥’은 농민전쟁 당시 사용된 이름이라 한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당시에는 무안현 삼향면 대월리, 현재는 목포시 대양동이었다. 목포사람들이 배상옥을 목포인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그의 선대에 같은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에 살다가 이사했다고 한다.
무안은, 당시 관군조차 “비류들의 소굴”이라 부를 정도로 동학의 기세가 엄청나게 강했다.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이규태는 “무안의 배상옥이 무장의 손화중과 함께 가장 큰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했으며, 당시 기록도 배상옥 휘하 농민군의 규모가 전봉준이나 김개남의 부대보다 훨씬 컸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에 영산강 하구와 서남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지리적 영향과 동학 교세의 확산이 연결되고 있었다. 배상옥은 지역의 접주들과 긴밀히 연계하며 무안뿐 아니라 함평과 영광, 진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조직망을 구축했다. 이러한 조직력은 훗날 제2차 동학농민전쟁에서 전남 서남부 농민군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1894년 6월 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동학농민군의 투쟁은 탐관오리의 횡포를 바로잡는 반봉건 투쟁에서 일본의 침략에 맞선 항일전쟁으로 성격이 전환됐다. 배상옥이 이끈 무안 동학군의 나주성 공략과 고막포 전투는 이러한 역사적 전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무안의 배상옥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인식했다. 재봉기가 시작하자 전국의 농민군은 논산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농민군 부대를 결성한 배상옥은 성급히 북상하기보다 서남부 지역의 조직을 정비하며 일본군과 관군에 맞설 준비를 시작했다. 특히 아직 나주성이 관군의 수중에 있는 상황에서 자칫 양쪽의 적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바로 북상하기보다 서남부 지역의 접주들과 연계하여 전열을 정비했다. 무안·함평·영광·진도 등지의 동학군을 하나로 묶어 조직력을 강화한 뒤 일본군과 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나주를 압박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이는 단순한 지역 방어가 아니라 전남 서남부 전체를 하나의 전선으로 묶으려는 시도였다.
당시 나주는 전라도 남부의 군사·행정 중심지였다. 신무기로 무장한 관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일본군 역시 나주를 거점으로 호남 남부를 통제하려 했다. 배상옥은 나주를 장악하지 못하면 무안을 비롯한 서남부 지역도 안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의 목표는 나주성을 공략해 일본군과 관군의 거점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제2차 동학농민전쟁은 흔히 우금치 전투를 중심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전남 곳곳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충돌한 대전투가 몇차례 있었다. 이 가운데 일본군과 무려 4차에 걸쳐 물러서지 않은 대전투가 침산 전투, 용진산 전투, 고막포 전투, 나주 남산 전투로 이어지는 나주성 공방전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고막포 전투는 광주, 나주, 무안, 함평 일대의 농민군이 총집결해 북쪽과 서남쪽에서 나주성을 공략해 간 대규모 공방전이었는데, 이 전투를 주도한 것은 배상옥이 이끄는 무안, 함평지역 농민군이었다. 배상옥이 이끄는 무안 동학군은 서남부 지역 농민군과 함께 나주성을 향해 진격했고, 일본군과 관군은 이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병력을 집중시켰다.
배상옥은 손화중 부대와 연합작전을 추진했다. 나주성을 장악해 일본군과 관군의 거점을 무너뜨리고 전남 남부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나주성 공략은 단순한 지역 전투가 아니라 전남 전선 전체를 좌우할 전략이었다. 당시 나주는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영산강 수운을 통해 일본군의 보급이 이루어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나주를 잃으면 일본군은 전남 남부에서의 군사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정부도 전남 지역의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꺾고자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10월 28일 호남초토영을 설치하고 나주목사 민종렬을 호남초토사에 임명했다. 나주성을 차지하려는 농민군과 이를 막으려는 수성군 사이에 혈전이 예고된 것이다.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이 이끄는 농민군은 11월 13일 나주 북쪽에서, 무안의 배상옥은 서남쪽 함평 고막포에서 동시에 나주성을 공격했다. 농민군들은 유리한 지점을 확보하고자 광주 방면에서는 용진산에 진을 쳤다. 하지만 우세한 수성군의 화력 앞에 용진산에서 수성군을 공격하던 농민군들은 버티지 못하고 후퇴했다.

나주 공략의 서남쪽을 담당한 배상옥과 무안, 함평 일대의 농민군은 11월 17일 고막포(현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와 고마원(현 나주시 다시면 고막원역) 주변으로 포진했다. 고막포 전투에는 무안, 함평 농민군 외에 진도 등지의 농민군도 참전했다. ‘난파유고’에는 고막포 공격에 참전한 농민군의 숫자가 5만~6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 물론 약간의 과장이 있기는 하나 배상옥 휘하의 농민군 규모가 엄청났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 농민군의 규모에 놀란 초토사 민종렬은 좌선봉장 이규태와 전주에 주둔 중인 일본군에 지원부대 파견을 재촉했다. 11월 18일부터 나주성을 지키려는 수성군과 뺏으려는 농민군 사이에 일진일퇴의 전투가 이어졌다. 수성군은 대포와 천보총으로 무장하고 있어 농민군은 절대적인 열세였다. 수성군의 공격에 밀린 농민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군들이 10여 리를 후퇴하다 고막포 다리에 이르렀다. 수성군이 추격하는 상황에서 다리는 좁고 마침 조수(潮水)로 물이 불어나 있어서 물에 빠져 죽은 농민군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총탄 속에서도 농민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후퇴는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싸웠다.

그 기세에 놀란 수성군은 군사를 호장산 위로 물려 진을 쳤다. 고막포 전투는 단순한 전술적 패배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전투는 전남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운 대표적인 전투였다. 고막포 전투는 승패를 떠나 전남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치열하게 맞선 전장이었다.
고막포 전투 이후 전남 서남부 동학농민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라는 칭호를 받았던 배상옥은 패배 후 남은 병력을 수습해 무안 대월리 부근에 진을 쳤다가 해남 우수영과 진도 지역으로 이동해 항전을 이어갔다.
무안을 중심으로 함평·영광·진도의 농민군을 규합한 배상옥의 활동과, 나주를 향한 전략적 진격, 그리고 고막포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전남 민중이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처절한 항전이었다. 비록 고막포 전투는 패배로 끝났지만, 그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남의 의병은 동학군이 흘린 피 위에서 다시 일어섰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그 항전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배상옥은 바로 그 연결고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제 우리는 전봉준뿐 아니라 배상옥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전남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는 길이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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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독일 온라인 혐오 대응단체 헤이트에이드 "전라도 혐오, 방치 플랫폼도 공동 책임"
헤이트에이드(Hateaid) 대표 요제피네 발롱(왼쪽)과 아나레나 폰호덴베르크 /HateAid 제공
“오늘날의 ‘전라도 혐오’는 디지털 환경을 중심으로, ‘농담·아이러니’ 같은 우회적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죠. 이 같은 은밀한 혐오는 사회가 허용하는 혐오의 경계를 조금씩 넓히면서 장기적인 피해를 남긴다는 점에서 더 위험합니다.”독일의 온라인 혐오 피해자 지원단체인 ‘헤이트에이드(HateAid)’를 설립한 아나레나 폰호덴베르크·요제피네 발롱 대표의 지적이다. 최근 확산하고 있는 전라도를 향한 무차별적인 혐오에 대한 설명 과정에서다.헤이트에이드는 유럽연합(EU) 디지털서비스법(DSA)상 공인 전문기관으로 불법·유해 콘텐츠를 신고하고 디지털 혐오 피해자를 법률·심리적으로 지원하는 단체다. 두 대표는 2018년 단체를 설립한 뒤 8천 명 이상의 피해자를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독일 대통령으로부터 연방공로훈장을 받았다.대표들은 19일 무등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최근 스타벅스 탱크데이 논란이나 온라인에서 퍼지는 전라도 비하 밈(Meme)처럼 특정 집단만 의미를 공유하는 도그 휘슬(Dog whistle) 혐오가 노골적인 욕설 못지않게 위험하다고 진단했다. “겉보기에 무해한 표현일 수 있고 외부인은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에서 피해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취지에서다.인터뷰는 헤이트에이드의 공식 소셜미디어를 통해 언론대응 담당자와 소통한 뒤, 번역을 통해 독일어로 진행됐다. 국내 공식 인터뷰로는 첫 사례다. 두 대표는 “디지털 혐오는 빈도와 강도가 모두 커지고 있으며 기술 발전은 새로운 위험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며 “공격은 더욱 표적화되고 광범위해졌지만, 한국의 법과 제도는 변화의 속도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네이버 등 플랫폼과 온라인 커뮤니티 등의 책임도 강조했다. 구글과 메타(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소유 회사)를 상대로 진행 중인 소송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다.대표들은 “플랫폼이 단순 중개자가 아니라 혐오와 디지털 폭력 확산을 막아야 할 책임의 주체”라면서 “가령, 한 의뢰인은 2023년부터 구글에 자신의 혐오 게시물 수천 개가 유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1년 6개월간 구글에 2천여 건의 삭제를 요청했지만 삭제해도 다시 검색 결과에 노출됐다”고 짚었다. 검색 엔진이 혐오 콘텐츠를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시키는 만큼, 플랫폼이 피해 확산에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메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소개하면서는 ‘플랫폼의 능동적 대응 필요성’을 주문했다. 대표들은 “독일 연방의회 레나테 퀴나스트 하원의원은 자신의 발언을 왜곡한 허위 인용문과 혐오 표현에 대한 밈 때문에 메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고, 2024년 프랑크푸르트 고등법원은 게시물뿐만 아니라 밈까지 지속적으로 삭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면서 “사용자가 일일이 신고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이 책임지고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한 중요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전라도에 대한 온라인 혐오를 줄이기 위한 해법으로는 ‘세이프티 바이 디자인(Safety by Design)’ 원칙을 제안했다. 플랫폼 제작 단계에서부터 위험성을 사전에 평가해야 한다는 거다. 이들은 “플랫폼을 만든 뒤 문제가 생기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 단계부터 어린이와 여성, 취약계층, 선거와 민주주의에 미칠 위험을 평가하고 최소화해야 한다”면서 “자동차가 안전성을 검증받듯 소셜미디어 역시 사회적 위험을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한국 정치권의 역할도 주문했다. 대표들은 “독일에서도 특정 집단을 희생양 삼아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들은 오랫동안 허위정보와 음모론의 공격을 받아왔고, 우리는 법적 대응을 통해 허위 게시물 삭제와 재발 방지 조치를 이끌어냈다”고 소개했다.한국의 온라인 이용자들에게는 “디지털 폭력은 실제 폭력과 같으며 피해자의 감정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며 “혐오와 허위정보, 극단주의를 인터넷의 일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누구나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인 온라인 공간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최근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헤이트 에이드 관계자들을 미국 입국 금지 대상에 포함한 데 대해서는 “혐오 대응 단체는 검열 기관이 아니다”며 “게시물을 삭제하는 것은 플랫폼이고, 형사 절차는 경찰과 검찰이 담당한다. 우리의 역할은 법률이 온라인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최류빈기자 rub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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