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긴 하루, 결국 남는 것은···

입력 2026.07.14. 14:41 최소원 기자
[영화읽기-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모든 이에게 공평한 자원 ‘시간’
시간에 얽매인 인간의 삶 따라
인생의 기념품 찾는 여정 담아
결국 ‘삶’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
살아가며 만나는 이들이 자산
매일 충실히 사랑하고 웃어야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스틸컷.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단 하나의 자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억만장자도 단 1초의 시간을 사들일 수 없고, 어떤 권력자도 이미 흘러간 단 1초를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은 인간이 가진 모든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어 가장 평등하게 주어진 절대적 기준이다.

그렇기에 시간은 오래전부터 철학과 과학, 예술이 끊임없이 탐구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담론 가운데 하나는 시간의 흐름이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뇌가 새로운 경험을 우선적으로 기억하고 익숙한 경험은 상대적으로 덜 저장한다고 설명한다. 어린 시절에는 세상이 온통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은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 같은 1년이라도 어린아이에게는 길게 느껴지고, 성인에게는 순식간에 지나간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체감하는 시간은 저마다 다른 셈이다.

이처럼 비가역적이면서도 끝없이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시간의 신비로움 덕분에 창작의 세계 역시 오래전부터 시간을 매혹적인 소재로 활용해왔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대표작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를 비롯해 우주 공간 속 상대성 이론을 인간의 감정과 결합한 ‘인터스텔라’ 등 수많은 작품들이 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며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스틸컷.

◆시간은 거꾸로 흘러도 삶은 앞으로 간다

시간을 소재로 한 영화 중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으로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사슬에 얽매인 인간의 삶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사랑하고 상처받고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가장 입체적으로 담아낸다.

작품은 제목 그대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남자 벤자민 버튼의 일생을 그린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영화는 원작과 다른 결을 보여준다. 원작이 벤자민의 삶을 다소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풀어낸다면, 영화는 한 인간의 생애를 천천히 따라가며 결국 그의 삶 또한 우리 모두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특별한 설정 속에 놓인 인물이지만 그가 느끼는 사랑과 후회, 상실과 그리움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감정들이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스틸컷.

개인적으로 누군가 인생 영화를 묻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역시 이 영화다.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 봤을 때는 어려지는 벤자민과 늙어가는 데이지의 사랑이 안타깝고 슬프게 다가왔다. 두 번째로 봤을 때는 벤자민 주변 인물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보았을 때는 영화 곳곳에 스며든 전쟁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듯 시간이 흐를수록 변하는 관객 자신의 시선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맹인 시계공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언뜻 보면 벤자민 버튼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쟁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비극을 담아낸 짧고도 강렬한 단편소설에 가깝다. 아들의 귀환을 바라는 마음으로 거꾸로 가는 시계를 만든 노인의 이야기는 시간에 대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진주만 공습에 참여한 벤자민, 전쟁 중 목숨을 잃은 마이크 선장과 선원들의 모습 역시 20세기 전반의 혼란한 시대상을 비춘다. 이를 통해 전쟁이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가족의 시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주며 삶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말한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스틸컷.

◆‘삶’을 풀어보면 ‘사람’이 된다

핀처 감독 특유의 연출 감각도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잔잔한 드라마임에도 곳곳에 유머가 배치돼 있다. 벤자민이 어린 시절을 보낸 요양원에서 번개를 일곱 번이나 맞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노인은 영화 전반에 걸쳐 이스터에그처럼 잊을 만하면 등장한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가 이번에는 몇 번째 번개를 맞았는지 세어보게 된다. 영화에 소소한 웃음을 더하는 동시에 삶의 우연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전작 ‘파이트 클럽’에서 타일러 더든이 화면에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글리치 연출을 활용했던 것처럼, 관객이 발견하는 즐거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의 센스가 느껴지는 지점이다.

80여 년에 걸친 벤자민의 삶을 지탱한 것은 결국 그가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의 사랑 데이지뿐 아니라 그를 버렸지만 결국 후회를 안고 살아간 아버지, 그를 조건 없이 품어준 퀴니, 노년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첫사랑 엘리자베스, 그리움을 알려준 메이플 부인, 삶의 즐거움을 가르쳐준 피그미 오티까지. 그들은 모두 벤자민의 삶을 스쳐 지나간 인연들이지만 동시에 그의 인생을 완성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영화가 마지막을 벤자민 개인의 이야기보다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으로 채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스틸컷.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늙어가고, 누군가는 먼저 떠나며, 누군가는 남겨진다. 어떤 이는 꿈을 이루고 어떤 이는 끝내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가 아니라 그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냈고 무엇을 사랑했는지에 있다.

어쩌면 인간은 시간을 이길 수 없기에 더욱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누군가와 함께한 순간은 기억으로 남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언젠가 우리 역시 벤자민 버튼처럼 인생의 마지막 장면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충실하게 사랑하고, 아파하고, 웃으며 살아왔는가이지 않을까.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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