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 영화서 모티프 얻어…환경과 접목
소리와 권력·현실과 가상 등 관계 주목
미디어 물질성·유한성 조명한 작품도
디지털 전환 시대 정보 기술 되짚어봐

스마트폰 속 사진과 영상, 클라우드에 저장된 기록, 실시간으로 생성되고 사라지는 데이터들. 오늘날 우리의 기억은 더 이상 인간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고 손끝의 기계와 거대한 서버, 알고리즘과 디지털 신호 속에 축적되고 전송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오는 7월 19일까지 복합전시 5관에서 선보이는 전시 ‘기억 전달자: 미디어라는 이름의 기계들’은 미디어가 인간의 기억과 유산을 어떻게 저장하고 전달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거대한 기계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자리다.

전시는 동명의 SF 소설이자 영화 ‘기억 전달자’에서 출발한다. 소설 속 ‘기억 전달자’는 완벽한 사회 유지를 위해 제거된 감정과 기억을 후대에 전승하는 존재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매개체는 감정이라는 ‘노이즈’ 때문에 기억 전달에 실패를 겪는다. 이번 전시는 여기에 현대 미디어 환경의 문제의식을 끌어온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동굴벽화와 책, 사진과 영화 등을 통해 기억을 외부 장치에 저장해왔고 이제는 미디어 기계가 초거대 기억 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시는 크게 두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첫 번째 섹션 ‘함께 감각하며 한발 내딛기’는 미디어를 새로운 행위자로 바라보며, 그것이 인간의 감각과 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색한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작품은 ACC 사운드 랩이 제작한 설치 작업이다. 천장에 매달린 24개의 풍선 아래에는 각각 작은 스피커가 연결돼 있다. 관람객은 풍선을 직접 움직이거나 끌어당기며 소리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 단순한 체험형 작품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소리와 권력’이라는 개념이 숨어 있다.

ACC 사운드 랩 연구진은 “공연장에서 스피커 위치에 따라 티켓 가격이 달라지는 것처럼, 소리는 장소의 권력을 형성한다”며 “고정된 스피커 구조를 관람객이 직접 움직이게 함으로써 권력 관계를 해체하고 다시 재구성하는 경험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관람객은 특정 스피커를 가까이 당겨 자신만의 소리 환경을 만들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소리들이 겹쳐지는 공간 속을 걸으며 새로운 멜로디와 파동을 경험할 수도 있다. LED 조명과 함께 반응하는 스피커들은 보이지 않던 소리의 물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권아람 작가의 작품 ‘시네도키’ 역시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흔든다. 작가는 라이다 스캐닝 기술을 활용해 실제 전시장 공간과 과거 촬영 장소, 디지털 이미지를 중첩시켰다. 투명한 메쉬 스크린 위로 현실 공간과 디지털 영상이 동시에 겹쳐지며 관람객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가상인지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권 작가는 “오늘날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은 물리적 세계를 기반으로 가상 공간과 복잡한 알고리즘을 생성해낸다”며 “현실과 가상, 과거와 현재, 물리적 공간과 비물리적 공간이 서로를 모방하고 대체하는 상황을 작품 안에서 드러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작품 제목인 ‘시네도키’는 문학에서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 표현하는 ‘제유법’을 의미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디지털 공간이 현실 세계를 모방하고, 다시 현실이 디지털 이미지에 의해 재구성되는 오늘날의 감각 구조를 은유한다.
전시의 두 번째 섹션 ‘주시하여 반갑게 맞이하기’는 미디어의 물질성과 유한성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디지털 데이터를 영원할 것처럼 여기지만, 실제로는 저장 장치와 포맷, 소프트웨어의 노화에 따라 데이터 역시 쉽게 사라지고 손상된다. 참여 작가들은 구식이 된 방송 신호 체계, 손실되는 디지털 데이터, 복원된 노트북 파일 등을 통해 미디어의 취약성과 보존 문제를 드러낸다.

특히 로사 멩크만은 아날로그 방송에서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되는 과정 속 사라져가는 신호 체계인 ‘PAL’을 소재로 데이터 포맷의 구식화 문제를 다룬다. 한 시대를 지탱했던 기술이 어느 순간 급속히 폐기되고 더 이상 읽히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는 현실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김현석 작가는 생성과 전송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소실되는 디지털 데이터를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알레프’에 빗대어 표현하며, 디지털 기억 역시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
김상욱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장은 “언젠가는 노화하고 손실되는 미디어의 유한한 속성을 둘러보며 미래 세대에 온전히 물려줘야 할 우리의 소중한 유산을 효과적으로 공유하고 전승하기 위한 방안을 함께 고민해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사진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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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피해 ACC로···평일에도 이어진 ‘문화피서’
14일 오후 시민들이 ACC 문화창조원 복합전시6관에서 진행 중인 ‘자밀 프라이즈:무빙 이미지’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14일 오후 시민들이 ACC 문화정보원을 이용하고 있다.
“방학이라 아이들이랑 어디라도 가야 하는데 날씨가 너무 덥잖아요. ACC는 시원하고 볼거리도 많아서 오늘은 여기로 피서 왔어요.”폭염이 이어진 14일 오후 찾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평일 오후 시간대였지만 전당 곳곳은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야외 활동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무더위를 피해 실내에서 문화생활을 즐기려는 이른바 ‘문화피서’ 행렬이었다. 전당 A·B 주차장은 만차 안내가 표시될 정도로 차량이 몰렸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가족 단위 관람객부터 책을 읽거나 전시를 둘러보는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14일 오후 시민들이 ACC 문화정보원을 이용하고 있다.아이 손을 잡은 부모들은 어린이문화원으로 향했고, 전시장 안내도를 들여다보던 관람객들은 복합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비 한쪽에서는 잠시 쉬어가는 시민들도 보였다. 바깥의 뜨거운 햇볕과는 달리 시원한 실내에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문화정보원은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시민들로 활기를 띠었다. 도서관에서는 책을 펼쳐 공부하는 학생들과 자료를 찾는 이용객들이 자리를 잡았고, 라운지에서는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책을 읽고, 다른 곳에서는 잠시 대화를 나누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더위를 피하는 모습이었다.14일 오후 시민들이 ACC 문화상품점 ‘들락’에서 굿즈를 살펴보고 있다.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분위기는 더욱 분주했다. 문화창조원 복합전시 6관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교류특별전 ‘자밀 프라이즈: 무빙 이미지’에는 영상과 설치, 사운드, VR 등 다양한 작품을 관람하는 시민들이 이어졌다. 이슬람 문화와 역사, 사회에서 영감을 받은 동시대 예술을 선보이는 전시인 만큼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 멈춰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전시장 곳곳을 천천히 이동하며 작품을 살폈다.복합전시 3·4관에서 열리는 ‘코스모 아시아 피플’에도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코스모·아시아·피플’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위기의 지구와 인간, 아시아의 상상력을 바라보는 전시다. 작품 앞에서 한참을 머무는 관람객들의 모습에서는 더위를 피하는 것과 함께 전시를 통해 새로운 생각거리를 찾는 분위기도 눈에 띄었다.복합전시 2관의 ‘아시아의 장치들’에서는 영상과 비디오아트를 통해 아시아의 역사와 기억, 공동체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에 시선을 고정한 관람객부터 전시장 구조물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관람객까지 다양한 모습이 잇따랐다.어린이문화원은 가족 단위 관람객들로 특히 붐볐다.14일 오후 어린이 관객들이 ACC 어린이문화원 다목적홀에서 진행 중인 특별전 ‘스포츠 히어로즈:나도 국가대표’에 참여해 펜싱 체험을 하고 있다.17일까지 진행되는 특별전 ‘스포츠 히어로즈: 나도 국가대표!’가 열리는 다목적홀에서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특히 분주했다. 리듬체조와 펜싱, 스내그골프, 플로어컬링 등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운 스포츠를 직접 체험하며 아이들은 연신 몸을 움직였다.펜싱 체험에 나선 한 어린이는 “엄마, 나 펜싱에 재능 있는 것 같아”라며 보호자를 향해 손짓하며 웃는 모습도 보였다. 보호자들은 아이가 스포츠 체험에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사진을 촬영했다. 폭염 때문에 밖에서 뛰어놀기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실내 체험공간이 또 하나의 놀이터가 된 모습이었다.14일 오후 어린이 관객들이 ACC 어린이문화원 어린이체험관에서 진행 중인 상설전시 ‘우리 모두의 집, 아시아’를 관람하고 있다.어린이체험관의 상설전시 ‘우리 모두의 집, 아시아’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바다와 갯벌, 습지와 호수, 숲과 사막 등 아시아의 자연환경을 주제로 한 공간을 따라 아이들이 직접 움직이고 체험하며 자연과 생태의 의미를 배웠다.이날 딸과 함께 ACC를 찾은 시민 정하영(38·여)씨는 “요즘은 너무 더워서 아이와 야외에서 오래 놀기가 쉽지 않은데, ACC는 시원한 공간에서 전시도 보고 체험도 할 수 있어 좋다”며 “방학 동안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글·사진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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