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노래로 버틴 시간···한승원 병상일기 특별 기고

입력 2026.03.22. 15:22 최소원 기자
[계간 '문학들' 봄호(통권 83호) 발간]
원로 한승원 '해남 가는 길' 기고
파킨슨 투병 중 가족 위해 집필
한강 작가 작곡한 곡으로 희망
특집 'AI 시대의 글쓰기' 등 담아 '눈길'
한승원 작가. 무등일보 DB

광주·전남 문예지 계간 ‘문학들’이 최근 2026년 봄호(통권 83호)를 발간했다. 이번 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원로 소설가 한승원이 파킨슨병 투병 중 집필한 병상일기 ‘해남 가는 길’을 특별 기고로 실었다는 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부친이기도 한 그는 이번 호에서 파킨슨병이라는 시련 앞에 선 노작가의 고백을 38편의 시적 산문으로 풀어냈다.

한 작가는 지난해 9월부터 해남종합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으며 기록한 투병의 과정을 공개했다. 그는 2023년 6월 딸의 시상식장에서 처음으로 신체 이상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당시 왼쪽 어깨와 옆구리에 힘이 빠지며 몸이 기울어지는 증상이 있었지만 이를 단순한 노화로 여겼고, 이후 균형 감각 상실과 손떨림이 심해진 뒤에야 파킨슨병 3기 진단을 받았다.

병마는 육체를 넘어 정신까지 잠식했다. “글을 쓰는 한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글을 쓴다”는 신념을 지닌 그에게 신체적 제약은 삶의 의미를 흔드는 일이었다. 그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려 가족에게 스위스에서의 안락사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환점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찾아왔다. 오줌 자루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는 오히려 삶의 존엄을 새롭게 인식했다. 처음에는 수치심이 앞섰지만 숙면을 되찾으며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보상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는 이 시련을 ‘오만한 나에게 주어진 선물’로 규정하며, 87년 삶의 껍질을 벗고 새롭게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한승원 작가. 무등일보 DB

특히 그는 딸 한강이 작사·작곡하고 부른 노래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를 통해 큰 위안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제는 살아야 할 시간’, ‘이제 일어나 걸을 시간’이라는 가사는 절망 속에 있던 그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됐다. 그는 자신의 영결식에서 이 노래를 틀어달라고 당부할 만큼 곡에 담긴 생의 의지를 깊이 받아들였다.

현재 그는 재활 치료사의 “바늘귀만큼씩 회복된다”는 말을 붙잡고 집필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본문에서 “딸은 한순간 자포자기하고 싶었던 삶의 처절한 이야기를 노랫말로 쓴 것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의 연속된 절망의 삶을 예견하고 그 노랫말을 쓴 듯 싶다”며 “사랑하는 내 딸이 미망에 빠진 나를 일깨워줬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이번 호는 ‘AI 시대의 글쓰기’를 특집으로 구성해 변화하는 문학 환경을 조망했다. 류인태 평론가는 인공지능이 생성한 텍스트 ‘AI-criture’의 존재론적 의미를 분석했고, 노대원 평론가는 AI 문학과 예술을 둘러싼 저작권 문제와 신춘문예 AI 금지 논란 등 최근 쟁점을 정리했다.

‘광주In문학’ 섹션에서는 지역 독립문화 활동가들의 에세이를 실었다. 광주극장 프로그램 기획자 이서영은 극장을 ‘역사와 픽션 사이에서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장소’로 정의하며 로컬리티의 갱신을 짚었다. 독립서점 ‘소년의 서’ 상주 작가였던 정재율과 ‘기역책방’ 송기역은 책방이 단순한 판매 공간을 넘어 삶의 흔적이 교환되는 공동체의 거점임을 강조했다.

또한 ‘질문들’ 코너에서는 성혜령, 이미상, 조시현 작가가 황정은과 오에 겐자부로 등의 작품을 매개로 세대 간 연대와 성찰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강혜원 시인의 신작 시와 비평을 담은 ‘동향들’ 역시 지역 문학의 흐름을 보여준다.

계간 ‘문학들’ 2026년 봄호(통권 83호)

송광룡 발행인은 “한승원 선생께서 자녀들에게 유언처럼 남기려고 쓰셨던 글들을 뜻이 닿아 ‘문학들’에 싣게 됐다”며 “죽음의 문턱에서 길어 올린 문장이 오히려 삶을 더 또렷하게 비추고 있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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