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자네 왔능가"···붉은 황토 밭에 피워낸 '길 위의 서사'

입력 2026.03.11. 16:50 최소원 기자
박문종의 그림이 있는 풍경⑭
남도 진흙탕에 핀 꽃 ‘품바’ - 오 자네 왔능가!
젊은 청춘들의 안식처 ‘인의예술회’
시를 쓰고 그림 그리면서 자아 발견
서구 부조리극 통해 예술 본질 고민
치열한 배움의 과정 걸작 만들어내
거장 김시라 겸손과 열정 ‘신화’로
그의 후예들 여전히 그 정신 이어가
작가 생가 현판

인의예술회 회원들은 이제 갓 고교를 졸업한 풋내기 들이었다. 더러는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직면한 청춘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선생의 말 한마디는 청량음료 같은 것이었다. 선생댁은 평소에도 마을 청년들이 들락거렸는데 겨울이 되고 예술제가 임박하면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이 손님을 대동하는 경우에도 그 누구 하나 소홀히 대접하는 법이 없었다. 종합예술제인만큼 분과 소위별로 준비하기 마련인데 크게는 전시회팀과 연극반 등 제작팀으로 나눠 작품 전반에 대한 토의를 하게 하고 자율에 맡긴다.

그러니 집은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루는데 모인 작품들은 액자로 제작되는데 집안은 표구장까지 들였으니 가히 공방을 방불케하는 것이었다.

모임체는 늘 열려있었다.

회원자격이 까다롭지 않았다. 대부분 모범생들로 외지에서 온 친구도 기차역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 바닥이 드센데 껄렁한 친구들까지 수용했던 것이다.

이채로운 것은 형제자매 가족단위 참여다. 시골에 아이들이 많은 시절이어서 두세 명 참여는 여러 집이고 무려 네 명이 회원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성탄절에 교회 가는 것처럼 줄줄이 엮여 형 따라 누이 따라 동생 따라 모임을 했던 것이다. 전시회를 준비할 때도 서로 분담해서 하게 되는데 소질이 있는 사람 아니면 시화가 주로 걸리는데 연애편지 쓰는 감성이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을까.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한참 성장기 아닌가. 형제들이 머리 맞대고 학교 과제물 하듯 했던 것이다. 시화 그리는데 필자도 그림 솜씨 자랑을 했음은 물론이다.

황토길, 97_65cm 종이에 먹 채색, 1988

◆신화의 탄생

1970~1980년대에는 대중문화가 영화 관람 외에 딱히 꼽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더구나 시골에서 연극을 접한다는 것은 어쩌다 장터 가설무대에서나 학예회 경험이 전부일 텐데 서구식 정극은 꿈도 못 꿀 터였다.

연극 전공자가 없다보니 전문성 있는 지도하는 선생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하필 그때 딱 맞닥뜨린 게 그 유명한 ‘에쿠우스(피터 쉐퍼)’와 ‘대머리 여가수(외젠 이오네스코)’라는 부조리극이었다.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연극이라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목포역 근처 소극장으로 기억한다. 촌놈에게는 가히 충격이었다. 에쿠우스 하면 거대한 말 대가리만 떠오르고 대머리 여가수는 무대라고 해봐야 실내에 탁자 하나 놓고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를 농담처럼 하는데 뭘 말하는 것인지 보는 내내 제목에서처럼 대머리 여가수는 언제 나오나 하다 극이 끝나고 말았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느와르 영화 대부나 서부 총잡이 영화처럼 속 시원한 것도 아니고 생소하고 난해한 것이었지만 예술 작품은 무언가 보는 이로 하여금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안 본 것만 못하다고 머리가 복잡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식 연극제로 치렀으니 열정과 열망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품바의 탄생에는 이런 우여곡절도 있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답게 극의 형식을 공부하는 자세로 꾸려내는 것인데 이때 전남대 연극반 동아리 대학생들 힘이 컸다. 대학생들은 농활이라도 온 것마냥 일정 기간 두세 명이 읍내에 머물면서 연기 지도를 했는데 연기 기본기와 무대장치 극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 노고에 대한 수고비가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동네 주조장 막걸리 말통을 역기차 화물칸에 올려주는 것이 다였다. 이때 인연은 이후 품바 광주 진출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오 자네 왔능가!’

김시라

오-

자네 왔능가!

이 무정한 사람아

그래

청풍(淸風)에 날려왔나

현학(玄鶴)을 타고 왔나

자넨

묵(墨)이나 갈게

자우차(慈雨茶) 끓임세

-방언 시집 중

오-자네 왔능가! 라는 말처럼 인간 김시라를 함축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몇 자 글에 그의 품성이 담겼다고나 할까. 색 바랜 고목 판지에 페인트칠한 글씨로 조악해 보이지만 의미만은 효과 만점이다. 평소 사람을 좋아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 부르는 작가 모습이 판때기 하나에 고스란히 담긴 듯하다. 몸에 밴 겸손까지 말이다.

평소 차림이 멜빵바지에 빵모자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만돌린 소리를 달고 사시는데 음율이 느껴지는 서체가 분망할 뿐 아니라 유쾌해서 상대로 하여금 무장해제 시킨다고나 할까. 그 현판은 선생댁 사립문 안에 걸린 것이다. 이후 품바의 성공과 더불어 선생이 가는 곳이면 어디에든 따라붙는 그의 엠블럼이다.

인의예술회 회원

마침 필자가 방문할 때가 봄날이었는데 사립문 열자마자 오 자네 왔는가! 하고 반기는 게 아닌가. 정원에는 꽃이 만발하고 큰 나무 아래 벤치 그리고 방앗간 마치 동화 속에 든 것 같았다. 근동 일대가 농가인 점을 감안하면 희한하고 신비로울 수밖에.

선생과는 한마을이나 다름없는 지근거리에 살았다. 언젠가 우리집에 용무가 있어 오셨는데 “야 너 그림 그리냐?” 그게 발단이 되어 인연이 이어지는데 창호문에 그려진 초년 습작을 보셨던지 집에 놀러와라 하시는 것이다. 이후 방문하게 되었는데 집안의 예술적 분위기에 매료됐던 것이다. 그러니 틈만 나면 놀러가 눌러 살다시피했다. 친구들 불러 놀러가기도 하고 마을 또래들과 어울리다 합하니 그 수가 상당했다. 그럴 때마다 젊은 놈들이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며 일장 연설을 하시고는 했는데 ‘내가 세상의 중심인 거다. 지구는 나를 위해 돈다’ 알 듯 모를 듯 말씀에 머리를 주억거리면서도 시골내기 청춘들 감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의 원고작업은 쓰고 지우고의 연속이었다. 방 가운데 교자상을 두고 뭔가 쓰고 지우고 아예 습관이 돼 보였다. 쓰다가 막히면 주변에 묻기도 곧잘 해서 품바 대본이 쓰일 때는

“아야 문종아! 품바 한 번이 좋냐? 품바 품바 두 번이 좋냐? 품바 품바 품바 세 번이 좋냐?”

“제 보기는 두 번이 좋소마는”

“한 번은 짧고 세 번은 길고….”

그러니 묻고 또 묻고. 눈은 형형해도 상대를 압도하지 않고 귀는 늘 열어두는 것 같았다. 먼 데 소리 가까운 데 소리 웅변가이면서 재담꾼이어서 한참 성장기 고민 많은 젊은이들 넋을 쏙 빼놓고는 했는데 그를 한 번 만나는 사람이면 주술에 빠진 듯 넘어가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그게 품바로 연결되는 원동력으로 본다.

저 남쪽 붉은 황토밭에 핀 꽃 품바 작가의 천재성과 열정 젊은이들의 패기가 일궈낸 걸작인 것이다.

작가의 산실 앞에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들 건너 물에 반쯤 담긴 코끼리 형상의 인의산(산이름에서 모임체 이름을 따왔다) 그리고 영산강, 그의 꿈은 거기에 있었을까. 맑은 날이면 강너머 월출산이 물 위에 연화처럼 빛났을 테니…. 선생은 가시고 없지만 그 후예들은 남아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글·그림=박문종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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