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대중에게 호응 얻은 ‘빌런’들
수양대군 대신 단종의 역사 조명해
입소문으로 역주행하며 관객몰이
남녀노소 사로잡아 다양한 밈 생산
‘약한영웅’서 각인됐던 박지훈 배우
특유의 처연미로 눈물샘 자극하며
잊혀졌던 어린 군주의 이야기 복원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에 대한 질문

사람들이 매력적인 빌런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선악 구도의 전복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니라 미디어가 축적해 온 서사 전략과 캐릭터 소비 방식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예컨대 ‘레옹’의 노먼 스탠스필드,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의 크루엘라,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모두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악행보다도 외형적 매력, 카리스마, 화면을 장악하는 존재감으로 기억된다. 관객은 이 캐릭터들을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닌 ‘바라보게 되는 대상’으로 소비해 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악당 혹은 비윤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피카레스크’ 장르는 창작자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돼 왔다.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는 모두 범죄자들의 세계를 중심 서사로 끌어올리며 한국 상업영화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사극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빌런을 꼽자면 한재림 감독의 2013년작 ‘관상’ 속 수양대군을 빼놓기 어렵다. 이정재가 검은 갑옷을 입고 등장하는 장면은 ‘한국 영화 3대 등장 신’으로 회자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명회와 함께 역모를 도모해 왕위를 찬탈하는 수양대군의 모습은 분명 악인이지만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의 아우라로 관객을 압도한다. 이 시기 한국 사극 영화는 ‘매력적인 빌런의 시대’로 진입한 듯 보였다.
그러나 지난 2월 4일 개봉한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는 이러한 흐름과는 다른 방향을 택한다. 영화는 수양대군, 즉 세조가 아닌 그의 조카이자 조선 제6대 국왕 단종의 삶을 조명한다. 단종은 10세에 즉위했으나 즉위 1년 만에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돼 만 16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비극적 인물이다. 영화는 단종의 유배지에서 그를 지켰던 호방 엄흥도와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권력 투쟁의 이면에서 지워졌던 인간 단종을 복원해낸다.

◆희생양이 아닌 군주, 단종
단종은 어린 나이에 겪은 비극적 운명으로 인해 수많은 전설과 야사를 남긴 인물이다. 그의 죽음 또한 여전히 여러 설로 나뉘어 전해진다. 기존 창작물에서 단종은 대개 세조의 권력 찬탈에 희생된 무력한 피해자로 묘사돼 왔다. 그러나 ‘왕과 사는 남자’는 10대의 나이에도 한 나라의 군주였던 그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영화 속 단종은 애민정신과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존재로 그려지며 이는 역사적 비극을 도식적인 피해 서사에서 끌어내는 시도다.
개봉 초반 다소 부진했던 이 작품은 설 연휴 이후 입소문을 타고 관객 수 1천만 명을 돌파하며 이례적인 흥행 곡선을 그렸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침체돼 있던 극장가에 예상치 못한 사극 돌풍이 일어난 셈이다. 이른바 ‘왕사남’ 신드롬은 영화 외적인 풍경까지 만들어냈다. 한 지도 애플리케이션에서는 세조왕릉에 악플이 이어지는가 하면, 단종의 묘인 영월 장릉에는 그를 응원하는 리뷰들이 쌓이며 ‘웃픈’ 상황이 연출됐다.
이 신드롬의 중심에는 단종 이홍위를 연기한 박지훈이 있다. 아역배우로 연예계에 입문한 그는 이후 아이돌 활동을 거쳐 꾸준히 연기 영역을 확장해 왔다. 그의 연기적 전환점을 만든 작품은 웨이브 공개작 ‘약한영웅’이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 구조 속으로 휘말리는 연시은 역을 통해 그는 섬세하면서도 밀도 높은 연기를 선보였다.
‘왕과 사는 남자’는 박지훈의 두 번째 영화 주연작이다. 장항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약한영웅’을 보고 단종 역의 얼굴을 확신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탁월한 캐스팅으로 증명된다. 그의 앳된 얼굴과 큰 눈망울은 긴 설명 없이도 인물의 비극과 감정을 전달해 관객의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자극한다.
여기에 엄흥도의 푸근함을 담아낸 유해진, 중상모략의 중심에 선 한명회를 연기한 유지태, 단종의 어머니이자 벗과 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궁녀 매화를 연기한 전미도의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영화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쉽지만 가벼운 영화는 아니다
작품의 흥행에는 한국 관객의 정서와 맞닿은 서사도 크게 작용했다. 동시에 누구와 함께 보아도 무리가 없는 영화라는 점 역시 중요한 요인이다.
1만 원대 중반까지 오른 영화 관람료는 ‘함께 영화 보러 가자’는 제안 자체를 부담으로 만들었다. 4인 가족 기준 관람료만 5만 원에 육박하는 현실 속에서 관객의 선택은 점점 신중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극장을 찾는 이유는 영화를 함께 보는 행위가 지닌 경험적 가치 때문이다. 함께 울고 웃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대중적인 영화들이 여전히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험적이거나 컬트적 성향의 작품들이 ‘혼영’에 적합하다면, ‘왕과 사는 남자’는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보기에 적절한 영화다. 서사는 친절하고 연출은 따뜻하며, 명확한 감동과 교훈을 전달한다. 잊고 있던 역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기능 또한 충실하다.

장항준 감독은 전작 ‘기억의 밤’에서 스릴러를, ‘리바운드’에서 스포츠 드라마를 선보였다. 이번 사극을 통해 그는 장르적 스펙트럼이 넓은 연출자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소비돼 온 유쾌한 이미지 이면에 장르를 읽고 관객과 소통하는 감각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쉽게 읽히는 영화’라는 점에서 평단의 극찬을 받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관객이 선택해 함께 웃고 울며 이야기를 나눈 작품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 ‘왕과 사는 남자’는 매력적인 빌런의 시대 이후 우리가 다시 어떤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항준 감독의 다음 선택이 더욱 궁금해진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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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육지 오가며 왜군 격파··· 한산·행주대첩의 승부사
삼도수군사령부가 있었던 통제영(경남)통영)의 세병관(국보305호).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1차 진주대첩 등을 ‘3대첩’이라 한다. 이 가운데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등 양 대첩에 참전해 공을 세운 보성 출신 선거이가 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선거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해전과 육전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1598년 10월 울산성 전투에서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선두에서 독전하다 적탄에 쓰러졌다. 최근 보성 선씨 문중에서 주관한 학술대회에서 선거이 공적이 새롭게 조명됐다. 특히 이순신 장군과의 관련성을 집중 살핀 순천대 이욱 교수의 글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본 호 집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선거이 등 5명의 보성 선씨 위패를 모셔놓은 오충사(전남보성).선거이는 명종 즉위년(1545년)에 태어났다. 호는 ‘친친(親親)’이었다. 그의 효성이 남달라 붙여진 이름이다. 본관은 보성이고 보성 조성에서 살았다.선거이는 최근 발굴된 ‘기묘문무과방목(己卯文武科榜目)’에 따르면, 1579년 기묘년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합격 당시 ‘겸사복(兼司僕)’에 있었다. 대통령 경호 부대 곧 최정예 금군(禁軍) 출신이었다. 그가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무과에 합격한 후 그는 북쪽 국경에서 근무했는데, 이곳에서 이순신을 만났다. 선거이는 무과 합격하고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무관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절충장군이 됐다. 이는 무예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승진이 빨랐음을 말해준다.선거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 3월10일 진도군수에 부임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휘 능력이 검증된 실전 경험이 뛰어난 인물들을 경상, 전라 등 남해안의 지휘관으로 보임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591년 2월 이순신이 진도군수에 임명됐다가 가리포 첨사로, 다시 전라좌수사로 보임됐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도군수에 이순신, 선거이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연이어 보임된 것은 진도가 왜구의 주된 공격 루트였던 것과 관계 깊다. 이순신과 선거이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유성룡이 무과 급제 후 인사차 들른 선거이에게 “전날 이순신을 보고, 또 오늘 그대를 보니 범장(范張)이 다시 나타난 것과 같다”고 했다.범장은 범식(范式)과 장소(張邵)을 가리키는 말로 깊은 우정을 빗댈 때 하는 고사이다. 서애가 이들의 관계를 범장에 비유할 정도로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려준다.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던 이순신이 여진족의 공격으로 그 지역이 커다란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이순신이 책임을 지고 투옥됐을 때 같이 근무하던 선거이가 옥을 방문해 위로한 적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진도군수로 전라우수영의 관할에 속했던 선거이는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수군과 함께 경상우수영을 지원하는 합동작전에 참전했다. 선거이가 한산도 해전에 참전했던 기록이 선조실록에 있다.김응남이 말했다.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 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했다. …”정곤수는 말했다. “정운이 ‘장수가 만일 가지 않는다면 전라도는 필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가서 격파했다 한다.”전쟁 발발 초기 경상도 수군의 요청을 받아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대다수 전라도 장수들은 머뭇거렸다. 앞서 진무성 장군을 다룰 때 언급했지만, 이순신의 휘했던 송희립, 정운 등이 참전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선거이도 전쟁 초기부터 적극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선거이는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음에서 알 수 있다.호남·영암 수군이 견내량에 모여 왜적의 큰 배 중 10척, 중·소선 70여 척을 발견하고 접전했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을 쏘았으나 전혀 깨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 큰 바다로 퇴진해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군수 선거이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난중잡록1, 임진년 7월한산도 해전에 참여한 선거이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로 선거이가 한산대첩 승리의 주역임을 알려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한산도 해전에서 선거이 역할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은 당시 수군 편제상 선거이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전라도 수군과 공동작전을 펼치고 있던 선거이는 전라감사 이광의 지원 명령을 받고 수원으로 이동했다. 전라병사 최원과 의병장 김천일이 수원에서 인천으로 진을 옮기면서 이광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광은 진도군수 선거이에게 김천일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후 전라병사로 승진한 선거이는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직접 참전하지는 않고 외곽에 포진해 있었다. 행주대첩에는 간접적으로 참여한 셈이다. 하지만 선거이 부대가 요로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이 행주산성을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산도 해전, 행주산성 전투에서의 조선군 승리는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전투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선거이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1595년 충청수사에 임명된 선거이는, 그해 5월에서 9월까지 약 115일 동안 한산도의 통제영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작전을 논의했다. 이 시기에 무려 31일 이상 만났음이 난중일기에 기록되고 있다. 1595년 9월 14일 선거이와 이별할 때 이순신은 다음의 시를 지어 석별을 아쉬워했다.북쪽에 갔을 때 함께 고생했고남쪽으로 와서는 생사를 같이 했네.오늘 달 밝은 밤에 술 한 잔 같이 하면내일은 이별의 감정을 느끼겠구려.한산도 이순신 장군 집무실에 해당하는 제승당.이순신은 선거이와 북의 여진족, 남의 일본과의 전투에서 생사를 함께 한 정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1596년 9월 24일 이순신이 공무로 보성에 갈 일이 있자 선거이의 집을 방문했다. 거기서 이순신은 선거이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안타까워했다.한편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선거이는 성을 비우라는 명군과 권율 등 조선군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진주성을 나와 외곽 방어를 했다. 김천일 등은 진주성이 함락되면 호남이 위태롭다는 판단에 따라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했다. 유성룡은 진주성 함락은 공성 작전을 따르지 않았던 김천일의 실책이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성룡이 남인, 김천일이 서인으로 당색이 다른 것도 이러한 평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조정의 명령에 따라 공성 작전을 수행한 선거이에게 진주성 함락 책임을 물었다. 임진왜란 공신 책록에서 선무공신 아래 등급인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됐다. 이순신과 3차례나 연합해전을 전개하고 육전에서는 일본군과 끈질긴 전투를 하고 마침내 전투의 선봉에서 지휘하다 장렬한 전사를 한 영웅에 대한 온당한 처사는 아니었다. 고향인 보성에 선거이 등 보성 선씨 5인의 영정을 봉안한 ‘오충사’가 있다. 한경국기자 hkk4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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