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얼씨구학당] 궁중의 부적, 서민의 민화로 꽃피다

입력 2026.03.04. 13:45 이용규 기자
[이윤선의 얼씨구학당] 신다울루와 차

[서울=뉴시스] 이영환 기자 =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시민들이 공개된 문배도를 살펴보고 있다. 2022.01.26. 20hwan@newsis.com

신다와 울루는 모두 귀신과 악령을 감시하고 억제하는 쌍둥이 혹은 형제 신격이다. 중국(범칭 동아시아)에서 비롯된 전통이다. 사전에서는 이를 ‘귀신을 쫓는 신으로 알려진 신다와 울루의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놓은 나무’라 하고 신도울루목(神茶鬱壘木)이라 한다. 신다와 신도를 혼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본래 글자는 신도(神씀바귀 도)이고 변한 글자가 신다(神茶)이다. 일종의 문신(門神) 즉, 문을 지키는 신이다. 신체는 부적의 기능을 하는 복숭아(桃)나무다. 그래서 도부(桃符·복숭아나무 부적) 혹은 도판(桃板)이라 한다. 이외에 도봉(桃棒), 도경(桃梗) 등이 있다.

진도지역에는 당골이 자가 소유의 당골판을 일 년에 2회 순회하면서 벼(쌀)와 보리쌀을 받아 가는 제도가 있다. 이를 도부라고 한다. 그 기원이 복숭아나무 부적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죽었을 때 동쪽으로 난 복숭아나무 가지로 수저를 만들어 쌀을 세 번 망자의 입에 떠넣으며 “천 석이요, 이천 석이요, 삼천 석이요”라고 한다. 신도와 울루를 복숭아나무에 새겨 넣은 상징물이 악령의 침입을 막는다고 하여 궁중의 나례 의식에 사용하기도 하고 새해 첫날 혹은 입춘에 대문밖에 걸어 둔다.

[서울=뉴시스] 이영환 기자 =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시민들이 이날 공개된 문배도를 휴대전화로 촬영하고 있다. 2022.01.26. 20hwan@newsis.com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기원이 중국의 황제 때부터다. 대략 기원전 2700년 전에 생긴 풍속이라는 뜻이다. ‘위서’에 따르면 황제 시절에 신도와 울루라는 형제가 귀신을 죽이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후세 사람이 바다 가운데 있다는 도삭산(度朔山) 방면에 이르러보니 큰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그 가지의 길이가 3000리였다. 그 아래 신도와 울루라는 신이 살았는데 갈대로 엮은 새끼를 쥐고서 악귀를 잡아 묶어 호랑이에게 던진다고 한다. 그래서 섣달그믐날 도부(부적)를 만들어 문에 붙이거나 신도와 울루의 그림을 문에 붙여둔다. 요즘 화제가 된 호작도의 호랑이를 주목해볼 일이다. 민화에서 말하는 문배도(門排圖) 혹은 춘련(春聯)의 기능을 한다.

중국에서 전승해온 종규와 신라 헌강왕 때 비롯된 처용의 그림이 모두 이에 속한다. 민화의 시원을 처용으로 여기는 까닭이 여기 있다. 신도울루목이 새겨진 복숭아나무 부적은 매년 교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도의 당골이 당골판을 매년 주기적으로 심방하는 까닭이 여기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종실록에 의하면 신도울루는 1669년(현종 10)에 절기의 진상품인 송엽, 도지, 춘번, 인승, 세화와 함께 폐지되었다.

따로 논의하겠지만 장차 민화의 내력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이 지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궁중의 풍속이 민간으로 전이된 한편의 기점이기 때문이다. 복숭아 나무로 만든 방망이 즉 도봉과 도판이 손에 들고 상대방에게 휘두를 만한 크기였다는 점에서 도깨비방망이의 내력을 상고할 지점이기도 하다. 지난 이야기지만 윤석열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 일군의 무리들이 복숭아 가지(꽃)를 들고 청와대로 진입하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무속과 관련된 누군가가 이 대목을 활용했을 것이다. 대문간의 부적 신다울루 중 신다(神茶)에 대해 더 주목하는 까닭은 그 이름에 차 다(茶)자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울루(鬱壘)에 대해서는 따로 다룬다.

[서울=뉴시스] 이영환 기자 =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열린 ‘경복궁 수문장, 광화문에 문배도를 걸다’에서 내빈들이 문배도를 공개하고 있다. 2022.01.26. 20hwan@newsis.com

◆신도에서 신다로, 쓴풀에서 차나무로

본래 글자가 도()라는 점 위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쓴 풀이라는 즉, 약용의 대상이던 도()가 기호식품 차(茶)로 변한 것인가? 현상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차가 오늘날의 의미로 이해되기 훨씬 이전부터 부적이라는 의미의 글씨나 도상의 형태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글자만 차(茶)를 사용할 뿐이지 종규나 처용 혹은 입춘첩 등의 글씨에 훨씬 가깝다.

심지어는 도깨비의 시원으로 거론하는 비형랑(鼻荊郞)과 친연성이 높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신상과 신격 형랑에 대해서는 졸저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할미디어)’를 참고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정황을 보면 글씨나 그림으로 소비되던 신도(神)는 마시는 차와 관련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다울루(神茶鬱壘)의 표기나 신도울루라는 발음 등 둘을 혼용하는 문제를 허투루 넘겨버릴 수는 없다. 일차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것은 부적으로 사용하는 글씨나 그림을 신도라고 한다는 점이다. 왜 쓴 풀을 의미하는 글자를 대문을 지키는 신이나 부적의 이름으로 사용했을까.

남아있는 증거들이 있다. 당골(통칭하여 무당)이 제청이나 굿청, 혹은 용왕굿을 위해 선박을 정화시킬 때 쑥다발에 연기를 피워 공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쑥의 쓴 약효가 악귀를 물리친다는 믿음 때문이다. 상처가 났을 때 쑥을 뜯어 붙이거나 쑥뜸을 하는 것도 단지 쑥의 약효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연기와 향불의 친연성에 대해서도 차차 논한다. 심지어 단군신화의 쑥다발 얘기까지 파생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차의 기원이랄까. 기호식품화 된 차의 본래적 기능이 쓴맛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 신도의 도()가 차(茶)의 본래 글자였다는 점에서 그 기원을 살필 수 있다. 옥편을 보면 도를 씀바귀 도, 차나무 다, 옥이름 서, 성씨 야 등으로 풀이한다. 본자(本字)를 차(茶)라 하고 고자(古字)를 도()라 한다. 세 글자 모두 씀바귀 즉 쓴 풀이라는 의미를 포괄한다.

차의 본래 기능이 쓴풀 즉 약용이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불교적 용어로 정착된 끽다(喫茶·차나 한 잔 하게)와 음다(飮茶)를 넘어 차문화를 복용(服用)의 문화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몸의 외피를 두르는 의복(衣服)과 내피를 두르는 복용(服用)의 메커니즘이 모두 복(服)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분석이다. 그렇다면 언제 도()가 차(茶)로 바뀌었나. 그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할 따름이다. 상고 중국(범칭 동아시아)에서 도()는 쓴 풀, 약성 식물, 제사에 쓰이는 향성 식물, 때로는 독초적 성격으로 묘사되었다. 본초강목 등 문헌에 등장하는 고도(苦)가 그것이다.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어린잎은 차(茶)로, 묵은 잎은 도()로 구분한다. 하지만 당나라에 이르러 육우(陸羽)가 ‘다경(茶經)’을 찬술하면서부터 개념이 바뀌게 된다.

지난 2021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는 코로나19 극복 기원의 의미가 담긴 문배도를 광화문에 부착했다. 뉴시스

◆육우의 ‘다경’, 그 이전과 이후

육우(陸羽)가 말한 차는 특정한 나무, 특정한 가공법, 특정한 음용법, 문화적 취향이나 종교적 기호 등으로 정착된 이후의 이른바 기호식품이다. 오늘날 우리가 차라고 호명하는 것은 대략 760년 경 썼다고 하는 육우 이후의 개념일 것이니 쓴 풀에서 쓴 나무로 전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일 것이다. 현재 일본의 와비사비 계열의 문화론을 받아들여 차문화를 논하고 주로 초의 의순의 ‘동다송’을 거론하고 있지만, 그 전통은 훨씬 깊다. 정민의 연구에 의하면, 차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망라한 이목(1471~1498)의 다부(茶賦), 장흥지역 떡차 문화를 체계화한 문위세(1534~1600)의 다부(茶賦), 진도에서 19년 반을 유배살이 하며 차의 국제무역을 설파했던 이덕리(1725~1797)의 기다(記茶) 등 30여 책과 더불어 조선왕조 초기에 행해졌던 다례(茶禮) 전통이 맥을 잇고 있다.

어쨌든 약용의 쓴풀 도()의 의미는 줄어들고 차(茶)가 문화적 기호로 자리 잡은 기점이 육우다. 그럼에도 쓴맛, 해독, 정화, 맑음 등의 요소들은 차에 그대로 계승된다.

몇 차례 얘기했지만 커피와의 변별성을 주장하거나 차 2.0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지점을 반드시 체크 해야만 한다. 더구나 신도울루에서 보여주듯이 문자나 그림으로 정착된 한편의 맥락만 봐도, 쓴 것이나 정화, 제거 등의 의미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현상적으로 관련이 없으니 과도한 해석이라거나 견강부회로 치부하는 것은 열린 논의를 닫아버린다. 내가 그림과 음악, 문학과 춤, 연희와 종교 의례 따위를 넘어 철학적 맥락에 이르기까지 논의를 펼쳐온 까닭이 여기 있다. 구체적인 얘기들은 차차 나눈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

# 연관뉴스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