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배롱꽃 수놓는 명옥헌원림
한적한 계절엔 운치 더 깊어져
깊은 역사와 묵직한 국물 유명한
국밥거리 관광객 입맛 사로잡아
시간이 멈춘 듯한 삼지내 한옥마을
일부 훼손 안타까우나 걷기 좋아

광주와 가까운 담양은 훌륭한 관광지다. 돼지갈비, 떡갈비, 국수 등 호불호 없이 맛있는 음식 많고, 관방천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죽녹원과 국수거리는 짧은 시간에 강한 만족도를 준다. 타지 친구들과 함께 가면 백이면 백 만족한다.
그런데 정작 평소에는 담양읍 쪽이 너무나 '관광지'스러워서 잘 오지 않게 된다. 가족이나 홀로 담양에 오는 빈도수를 따져보면 80%이상은 다른 고서면이나 창평면이 주 목적지였다.
주말 점심을 창평시장에서 국밥이나 막창전골로 떼우고, 한적한 누정이나 정원을 걷는 것이 우리 가족의 루틴이기도 했다. 아 왜 이걸 소개할 생각을 못했을까.

◆ 홀로 긴 가을을 보내는 은행나무
'붉은색 푸른색 그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노란색 빛을 내는 저기 저 신호등이'
이무진의 노래 '신호등'은 자신을 재촉하는 주변의 상황을 신호등에 빗대고 있다. 파란불에서 빨간불로 넘어가는 노란불은 왜 그렇게 짧은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차에 실은 짐이 쏠리진 않을까. 온갖 걱정이 3초 안에 지나간다.
요즘은 문득 노래를 듣다 가을이 너무 짧아졌다는 생각을 한다. 10월까지 여름이었다가 금방 겨울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조금씩 선선해지는 날에 적응하며 한해를 마무리하면 좋으련만 이제는 날씨마저도 우리를 재촉한다. 계절의 노란색이 너무도 짧아졌다. 나뭇잎들은 노랗게 물들기도 전에 바싹 말라버려 낙엽으로 떨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담양 고서면에 위치한 후산리 은행나무는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가을이 되면 들르는 곳이다. 명옥헌주차장을 지나 후산리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회관 앞에는 20m 높이의 느티나무 한그루와 자그마한 후산저수지가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저수지 한쪽에는 커다란 왕버들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가지를 뻗치고 있는데 볼 때마다 아담한 저수지 크기에 비해 나무들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저수지 맞은편 갈림길에는 왼쪽의 후산리 은행나무, 오른쪽의 명옥헌원림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하지만 이정표 없이도 은행나무는 주택 지붕들 사이에서도 훤히 보인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은행나무의 색깔이 아직 노란색보다 녹색이 더 짙다는 사실이다. 도심의 나무들은 샛노랗기 빛을 발하고 떨어지고 있는데, 왜 이곳은 여전히 푸르름을 뽐내는 걸까.
가까이 다가가면 거대한 크기에 먼저 압도된다. 높이가 31m, 폭이 7.5m에 달한다고 한다. 나무가 커서 잎도 늦게 물드는 걸까. 큰 은행나무가 샛노랗게 변하는 것도 장관일 테지만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물드는 것이 거대한 미술작품을 연상시킨다.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인조대왕 계마행'이라는 일화가 있는데 후산리에 살던 선비 오희도를 만나러 온 인조가 이 은행나무에 마을 매어두었다고 한다.
후산리 땅이 좋아서 나무가 크게 자란 줄 알았더니 사실은 왕의 기운을 받았던 것일까. 갈수록 가을은 짧아지지만 후산리 은행나무는 살아 온 시간만큼이나 여유로운 가을을 보내는 듯하다.

◆ 연분홍 꽃 없는 한적함도 괜찮아
후산리 은행나무를 떠나 명옥헌원림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걸어서 5분 정도로 아주 가깝다. 명옥헌원림은 10여년 전부터 광주 인근 나들이와 데이트코스로 큰 인기를 끌었다. 여름이면 만발하는 배롱나무가 일품이고 정자에서 원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필수처럼 여겨졌다. 이 때문에 마을 담벼락 곳곳에는 각종 벽화가 그려지고 사진을 붙여놓는 공간을 만들었지만 수년사이에 벽화와 사진 모두 희미해져 버렸다.
하지만 명옥헌원림은 수세기동안 그 자리를 온전히 잘 지키고 있다. 조선 중기 오희도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이 명옥헌을 짓고 건물 앞뒤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가꾼 정원이다.
명옥헌원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작은 연못과 이를 둘러싼 배롱나무들이 눈에 띈다. 이파리는 다 떨어지고 없지만 사방으로 뻗친 배롱나무 가지의 형상이 적나라하게 보여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연못을 지나면 명옥헌 정자가 모습을 보인다. 정자 아래 동그란 연못이 '하지'라면 정자 뒤로는 네모난 형태로 만든 또 다른 연못 '상지'가 있다. 뒤쪽 산에서 흘러드는 물이 상지와 하지로 흘러드는 구조다. 다소 삭막한 하지의 풍경과 달리 뒤쪽 골짜기로 이어지는 산비탈과 원림 옆 작은 개울은 푸르른 기운이 아직 남아있다.
바람이 불자 발치의 풀들이 사르르 흔들리고 정자 위 지붕에 쌓인 낙엽도 하나둘 떨어진다. 여름에는 진분홍 꽃을 보기 위해 사람들로 치이는데, 이런 한적한 풍경도 나쁘지 않다.

◆ 취향 따라 골라가는 국밥 거리
담양의 유명한 관광지로 메타세쿼이아길이 있다. 아름드리나무가 둘러싼 가로수길을 직접 걷는 경험이 특별하긴 하지만 창평으로 국밥 좀 먹으러 다닌 이들에게는 메타세쿼이아가 너무도 익숙하다. 광주에서 고서면을 거쳐 창평으로 향하다 보면 메타세쿼이아가 도로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다. 직접 걸어볼 수는 없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터널을 차로 빠져나가는 경험도 제법 특별하다.

창평으로 오는 주목적은 단연 국밥이다. 지역마다 국밥의 형태가 각약각색인데 창평국밥은 광주와 전남중부권을 대표하는 국밥이다. 그 명성을 반영하듯 국밥집이 여럿 모여 있는 국밥거리도 조성돼 있다.
차를 가져온다면 국밥거리 쪽은 주차가 어렵기에 맞은편 창평전통임시시장 주차장을 추천한다. '임시'가 붙은 이유는 원래 창평시장이 현재 공사 중이기 때문이다.
1919년부터 개설된 창평전통시장은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병행하는 형태로 100년 넘게 운영됐으나 안타깝게도 2022년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이듬해부터 재건축에 들어갔다. 공사는 내년 2월 마무리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시장 맞은편 공영주차장 부지에 컨테이너와 몽골텐트를 설치해 임시 시장이 2년 넘게 운영 중이다. 시장에 들어서면 계란빵과 군밤의 고소한 냄새가 솔솔 퍼지고, 다가올 김장철에 맞춰 말린 고추를 파는 상인들도 더러 보였다. 하지만 시장 면적이 크지 않아서인지 오일장 날임에도 방문객의 수도 많지 않았고 상설 매장 중에서도 문을 닫은 곳이 더러 보였다. 남은 겨울을 잘 버티고 상인들이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임시 시장 맞은편의 국밥거리로 향한다. 창평국밥도 시장과 역사를 함께 한다. 담양·창평·대전의 3개 시장 중 창평에서만 1970년대까지 도축장이 운영됐다. 돼지 부속물을 신선한 상태로 구할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국밥집들이 생겨난 셈이다.
광주에서 자주 보이는 콩나물과 들깻가루 잔뜩 들어간 국밥과 달리, 창평국밥은 대체로 맑은 국물에 양념장을 풀어서 먹는 스타일이다. 안에 콩나물을 넣는 곳도 있지만 대체로 파 약간과 건더기가 가득 들어가 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스타일, 먹는 방법이 다르다 보니 단골집도 제각각이다. 우리 가족 만 해도 단골집이 두 번은 바뀌었다. 이날 방문한 국밥집만 해도 가족 중에서 나만 오는 곳이다. 맑은 육수의 간간함을 느끼기 위해 순대가 들어간 국밥 대신 머리국밥을 시켜 양념장을 따로 덜어놓고 먹는다. 아삭한 깍두기와 전라도 특유의 묵은지가 함께라면 국밥 한그릇은 뚝딱이다.
◆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돌담길
국밥거리에서 걸어서 7~8분 거리에는 '삼지내 한옥마을'이 있다. 돌과 흙으로 쌓은 담장과 자연스레 굽어진 길이 매력 있는 곳이다. 마을과 맞붙어 있는 창평면사무소도 한옥 모양이라 찾아가기 쉽다.
삼지내마을은 동쪽 월봉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세 갈래로 마을을 가로질러 '삼지천'마을로도 불린다. 전통 가옥 여러 채가 본연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전통마을로서 가치가 높은 곳이다. 2007년에는 슬로시티 국제 연맹이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 마을로 지정하기도 했다.
담벼락 가까이에서 똑바로 걸어온 길을 다시 바라보면 돌담과 길이 물결처럼 굽어진 것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이곳에는 고재선 가옥, 고재환 가옥 등 조선시대 주거 형태와 목조 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문화재들도 있으나, 평소에는 관리를 위해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는 없다. 다만 마을 곳곳에 한옥 카페와 민박이 있어 쌀엿과 전통음료를 맛보고 하룻밤을 묵어보며 한옥마을을 즐길 수 있다.
남쪽으로 200m 거리에는 6칸짜리 2층 누각인 남극루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원래는 1830년 현재의 면사무소 자리 앞에 있었으나 1919년 지금의 창평현로 옆으로 옮겼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 잔디밭에는 '슬로시티 담양'이라 적힌 포토존이 조성됐는데, 그 뒤로 허물어진 담벼락과 대문의 모습이 보인다. 삼지내마을에서 가장 아쉬운 장소인 '춘강 고정주 고택'이다. 한말 규장각 직각을 역임한 고정주의 고택으로 창평지역 근대교육의 효시이자 민족운동 근원지인 영학숙과 창흥의숙의 모태다. 현대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지만 안타깝게도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길을 지나던 한 어르신은 "다른 집은 후손들이 문화재 신청하고 관리를 하는데, 여기는 안주인이 20년전에 돌아가시고 자식들이 아예 방치를 해서 이렇게 됐다"며 아쉬워 했다.
100년이상 잘 보존된 고택도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으면 이렇듯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자연과 인문이 어우러진 장동마을
마지막 목적지는 여행을 계획하며 새로 알게 된 대덕면의 장동마을이다. 한옥마을에서 차로 5분, 버스로도 15분이면 닿는 거리다.
장동마을은 큰 벼슬을 한 9명의 인재가 나와 '구화동'으로 불렸고, 마을 뒷산인 매봉 아래 노루 형상의 노루봉이 있어 노루골로도 불렸다.
조선 선조 때 '미암일기'를 저술한 미암 유희춘과 그의 부인이자 조선 4대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송덕봉이 나고 자란 마을이기도 하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간 쓴 일기로 조선시대 사회·경제·풍속 등을 생생히 기록해 보물 제260호로 지정됐다. 임진왜란으로 승정원일기가 불탔음에도 미암일기가 있었기에 선조 즉위 초 10년간의 기록을 되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장동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미암일기와 각종 민속자료 800여점을 보관 중인 미암박물관이 있다. 미암박물관 맞은 편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 주변 풍경이 가져다주는 분위기가 기가 막혔다.
연못 한 가운데에는 자그마한 석조건물이 섬처럼 떠 있고, 주변의 커다란 나무들과 마을을 둘러싼 산들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전혀 알지 못했던 장소였기에 기분이 배로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모현관'이라는 이름의 이 작은 건물은 1957년 지어졌으며 미암의 각종 고서적을 보관한 수장시설이다. 안에 있던 자료들은 모두 미암박물관으로 이전됐다.
연못 옆 작은 언덕에는 '연계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미암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후학들을 교육하던 곳이라 한다.
연못 뒤로는 마음을 선산 유씨 미암 종가와 미암을 모시고 있는 미암 사당도 있다. 연계정 반대편으로는 미술관을 겸한 카페 건물도 보이는데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미암박물관 역시 내부 정리를 위해 지난해 5월부터 닫혀 있어 아쉬웠으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장소를 새로 알아낸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성공한 것 같다.
글·사진=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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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류현경·배우 염혜란 광주극장에
영화 '1026: 새로운 세상을 위한' 스틸컷
광주극장이 새해를 맞아 다채로운 행사로 관객들을 맞이한다. 화제작의 관객과의 대화(GV)부터 역사의 이면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시사회까지 스크린 안팎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는 자리들이 마련됐다.오는 17일 오후 2시에는 영화 '고백하지마'의 GV가 열린다. 이 작품은 배우 류현경의 장편 영화 감독 데뷔작으로, 연출뿐만 아니라 출연, 편집, 배급,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제작의 전 과정을 진두지휘한 '프로젝트 매니저'형 영화로 개봉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영화 '고백하지마' 스틸컷영화는 장편영화 '하나, 둘, 셋, 러브' 촬영 현장에서 배우 충길이 현경에게 고백하며 벌어지는 예측 불허의 상황을 담고 있다. 현실과 연기의 경계가 무너지는 찰나와 류현경 감독 특유의 재치가 돋보이는 순간들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특히 이날 행사에는 류현경 감독과 더불어 영화 '어쩔수가없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등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엄혜란 배우가 스페셜 게스트로 참여해 두 배우의 깊은 인연과 영화 제작 뒷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될 전망이다.이어 22일 오후 5시에는 하이브리드 역사 다큐멘터리 극영화 '1026: 새로운 세상을 위한'의 광주 특별 시사회가 개최된다.영화는 1979년 10.26 사건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1946년부터 1980년까지 김재규, 박정희, 장준하 세 인물의 첫 인연부터 마지막 운명까지를 역사적 사실과 함께 추적하며 사건의 전후 맥락을 종합적으로 통찰한다.독립영화사 리얼곤시네마가 제작하고 '1026: 새로운 세상을 위한' 함께보기 시민연대가 주최하는 이번 시사회는 무료 관람으로 진행된다. 영화 상영 후에는 감독과 주요 출연진이 참석해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관람료와 상영 시간표 등 자세한 내용은 광주극장 네이버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다.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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