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듯 닫힌 배경 마당서 시작
모순된 공간감 주제와 맞닿아
취업 경쟁자 제거하는 과정서
현대 노동시장 경쟁구도 탐색
염혜란·차승원 역할 재미 더해
제목 속 숨은 사회 폭력성 강조

어느 순간부터 '구직자'보다는 '취준생'이라는 단어가 더 자주 쓰이게 됐다. '취준생'은 취업준비생의 줄임말로, 말 그대로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어감상 '취준생'이라 하면 대학 졸업을 앞둔 청년이나 갓 사회로 발을 내딛은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대외활동으로 스펙을 쌓고, 인턴을 경험하며, 각종 자격증 취득을 위해 분투하는 청춘들 말이다. 그래서일까, 실직자 혹은 구직자보다는 다소 희망적인 느낌이 있다. 아직 실패가 허용되고 다시 도전할 여지가 남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업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은 취준생이다. 나이와 경력을 불문하고 삶의 방향을 다시 모색하는 모든 이들이 그 범주에 속한다.

어릴 적 든든하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어깨가 어느 순간 좁아져 보일 때가 있다. 언제나 의지할 수 있을 것 같던 그 등이 작아지고 그늘 같던 존재가 점점 지쳐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가장(家長)'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외롭고 무거운 것인지 깨닫는다. 아파도 아프지 못하고, 슬퍼도 슬프지 못한 채 버팀목으로 남아야 하는 존재.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바로 그 외로움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죽거나, 죽이거나

2022년작 '헤어질 결심'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이번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세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린다. '헤어질 결심', '아가씨', '박쥐' 등에서 인간의 사랑과 욕망을 탐구하던 그는 이번엔 '가장'이라는 존재의 불가피함, 즉 '생존 경쟁'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박 감독 특유의 정교한 미장센, 그리고 건조하면서도 묘하게 촉촉한 색감과 조명은 그대로다. 다만 이번에는 사랑이 아닌 존재의 문제를 다룬다.
사건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시작된다. 사방이 막힌 실내와 달리, 마당은 열린 듯하지만 담벼락에 의해 갇힌 공간이다. 바로 그 모순된 공간감이 영화의 주제와 맞닿는다. 25년간 몸담았던 제지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된 만수(이병헌)는 '취업 재도전'에 나선다. 하지만 그 방식은 비정상적이다. 그는 같은 업계의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려 한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전형적인 서사지만, 박 감독은 그 익숙한 공식을 비틀어 현대 노동시장과 취업 경쟁의 냉혹함을 탐색한다.
그의 첫 번째 희생자는 구범모(이성민)다. 무기력한 남편 범모와 그런 남편을 뒤로 한 채 젊은 배우와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 아라(염혜란)의 이야기는 영화 속 가장 '인간적인' 결을 지닌다. 염혜란의 연기는 이번 작품의 백미라 할 만하다. '폭싹 속았수다'의 따뜻한 어머니 전광례와는 정반대의 인물을 연기하며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만수와 범모, 그리고 아라가 벌이는 난투극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배경음악으로 흘러 아이러니한 희극성을 띤다. 박 감독 특유의 블랙코미디적 감수성이 극대화되는 장면이다.

반면 고시조(차승원)의 서사는 상대적으로 단조롭다. 제지회사에서 해고된 뒤 신발 가게를 운영하며 묵묵히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단지 만수의 '경쟁자'라는 이유만으로 총에 맞아 쓰러진다. 설득력을 부여할 만한 맥락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은 그의 죽음은 충격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허무하게 느껴진다. 고시조라는 인물에 대한 서사는 딸에 대한 간접적 언급 정도에 머무르며 왜 그가 제거돼야 했는지에 대한 필연성을 구축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만수가 단순히 '취업'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생존'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회
영화는 개봉 후 관객들로부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연상케 한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극단적 방식, 그리고 사회 구조가 빚어낸 불가피한 비극이라는 점에서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시선은 계급보다 '노동'의 지속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제지회사 해고자 명단을 작성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해고자가 되어 면접장 앞에서 떨어지는 현실. 전문성과 연륜조차 시대의 변화 앞에 무력해지는 오늘의 노동자들. 감독은 그 잔혹한 아이러니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존엄'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처절한 사투 끝에 만수는 사람 대신 AI와 일하게 된다. 더 이상 인간의 경험이나 노력, 윤리조차 필요 없는 시대에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것을 위해 범모와 시조의 희생이 불가피했던 것일지 짚어보면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어쩔 수 없음'을 운명으로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 말 속에 숨은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개인의 무력함을 상징하지만, 우리에게 그 무력함을 강요하는 것은 오늘의 사회다.
그렇기에 만수의 마당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가장들과 취준생들의 초상(肖像)이자, 우리 모두의 '묘지'일지도 모른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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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넘나드는 소녀들의 우정
영화 ‘레이의 겨울방학’ 스틸컷
광주독립영화관(GIFT)에서 오는 25일 정식 개봉을 앞둔 영화 ‘레이의 겨울방학’을 미리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자리가 마련된다.광주독립영화관은 12일 오후 7시 박석영 감독의 신작 ‘레이의 겨울방학’ 개봉 전 특별 관객과의 대화(GV)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정식 개봉에 앞서 광주 관객들과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기획됐다.영화 ‘레이의 겨울방학’은 도쿄에 사는 중학생 레이와 도쿄에서 일하는 아빠를 만나러 온 한국 여고생 규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쁜 부모들 사이에서 심심한 겨울방학을 보내게 된 두 소녀가 낯선 도시에서 겪는 정서적 교감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이번 영화를 연출한 박석영 감독은 영화 ‘샤인’, ‘너의 오름’ 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밀도 있게 포착해왔다. 이날 GV에는 박석영 감독이 직접 참석하며, 진행은 광주를 기반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허지은 감독이 맡아 작품을 깊이 살피는 풍성한 대화를 이끌 예정이다.관람료는 성인 1만 원이며 예매는 디트릭스 또는 광주독립영화관 누리집을 통해 가능하다.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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