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얼씨구학당] 정음의 극치, 恨으로 빚은 소리의 미학

입력 2025.06.03. 14:07 이용규 기자
문패-이윤선의 얼씨구학당①

◆판소리 아름다움 그 자체 '추월만정'

달빛이 정원에 가득하게 쌓여있는데 황후가 된 심청이 산호로 구슬을 꿰어 만든 발을 들어 올리고 밖을 내다본다. 마침 기러기가 날아오므로 그를 불러 말을 한다.

전한 시기 무제(武帝) 때 소무(蘇武)라는 사람이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있을 때 기러기 발에 편지를 묶어 보냈다는 게 소중랑 고사인데 이 이야기를 빌어 심봉사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설정이다.

편지라는 뜻의 안찰(雁札)이나 안신(雁信)이라는 용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모두 기러기 편(便)에 전하는 지(紙, 종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편지(便紙)라는 말만 남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글자를 어찌 제대로 쓰겠는가. 글자를 쓸 때마다 젖은 눈물에 뭉개져 마치 그림처럼 번지고 만다.

그래도 간절한 마음으로 몇 줄 적어서 나오는데 기러기는 간 곳 없고 별과 달만 아득하게 멀리 떠 있다. 문학적으로도 매우 격조 높은 데다 진양조장단으로 짠 판소리의 격조가 더욱 높아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대목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김소희 명창의 추월만정 소리를 즐겨 듣는다.

사실 이 대목은 전설의 명창 이화중선이 가장 잘 불렀고 국창 김소희가 더 잘 불렀다. 나중에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어렸을 적에 고창에서 광주에 사는 언니 집으로 유학을 왔던 김소희가 마침 송만갑이 이끄는 포장극단 곁을 지나다가 이화중선이 부르는 이 대목을 듣고 반하여 가출 아닌 출가를 하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 명인명창 중에서 유년기에 소리를 찾아 가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를 불교 출가에 견주어 소릿길로의 출가(出家)라고 표현하곤 한다.

어린 나이에 광주에 유학왔던 김소희가 이화중선의 추월만정을 듣고 왜 한걸음에 반하게 되었을까?

판소리 자체가 그러하지만, 심청전은 심청이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판소리라는 음악으로 발달한 장르다.

'심황후사친가', '황후자탄', '심황후자탄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노래의 앞머리를 따서 '추월은 만정하여'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악사전에 의하면, 추월만정의 초기본으로 간주되는 '박순호 소장 낙장 27장본'에는 심봉사 부친을 걱정하는 소박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19세기 후기에는 보다 장황한 내용이 붙기도 한다. 이후 사설이 지금처럼 압축되고 간략화된 것은 1920년대 유성기 음반을 발매하였던 당대 최고의 명창 이화중선(李花仲仙, 1899~1943)에 의해 녹음되면서부터였다고 알려져 있다.

편지를 중심으로 한 유파별 사설의 전체적인 맥락은 대부분 유사한데 초대 국립창극단 단장을 지냈던 고흥사람 김연수(金演洙, 1907~1974)로부터 비롯된 동초제 유파에서는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 부르기도 한다. 추월만정은 시김새, 장단, 호흡, 공명 등 판소리가 가진 표현이 가장 섬세하게 조율된 대목 중 하나로 꼽힌다. 정음(情音)의 극치라고나 할까, '소리의 미학'이 완성된 결정체라 할 만하다.

예컨대 조선 후기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한'의 정서와 미학이 집약되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유교적 질서, 효의 미덕, 여성의 희생과 재생이 서사적으로 응축된 상징적 장면이기도 하다. 문화사적으로도 여성 명창의 '정전화된 감정'의 발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소리의 맥 짚어보자"

광주MBC '얼씨구학당' 후속 프로그램인 '얼씨구당' 유트브 프로그램에 나간 지 꽤 오래되었다.

판소리를 중심으로 백수십 분의 명인 명창들을 다루었다. 일주일에 한 꼭지씩 참여한 것이 햇수로 4년 남짓 되나?

일반인들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시청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다.

국악 마니아는 물론 국악 관련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나 일반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으니 독자 수가 적은 국악계의 관심을 환기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외에 광주전통문화관에서 진행하는 광주시 지정 명인 명창 토크도 3~4년 진행했다. 한 달에 한 번꼴이었으니 이 또한 꽤 많은 숫자가 되었다.

빛고을국악전수관 개원 20년을 기념하여 시작한 명인 명창 토크콘서트 진행도 올해로 3년째 접어들었다.

역시 한 달에 한 번씩 우리나라 최고의 명인 명창들을 모셨으니 아카이빙만 해도 성과가 크다. 이래저래 국악을 기반으로 한 남도의 음악을 기획하고 더불어 이야기하며 또 전개하는 일에 관여해온 듯싶다.

이제 이 성과들을 중심으로 우리 소리의 맥을 짚어보는 연재를 시작하기로 한다. 토크와는 좀 다르게 전문적인 영역도 다루게 될 것이다.

다만 너무 심도를 더하면 지루하기도 하고 딱딱해지므로 가능하면 에피소드나 열전 중심으로 풀어가려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염려하는 것은 남도의 대표적 정론지에 할애되는 귀한 지면을 일 획이라도 허투루 소비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레거시 미디어의 시대는 저물었다.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된 소셜 네트워크(SNS)를 통해 쏟아지는 정보의 양이나 질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울림이 없고 메아리가 없는 말이 가지는 허황함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매끄럽고 잘 정돈된 글이라도 진정성이 없으면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고 만다.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글들도 많다.

내 글이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전통을 기반 삼아 현재의 예술 특히 음악 관련 예술을 논설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여간해서 주의를 환기하기 어렵다. 기를 쓰고 법고창신을 말하고 용을 쓰고 온고지신의 해법을 제시해도 피드백이 없으면 공염불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이런 현실이 두려워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도외시하는 것은 직무유기일 것이다. 다만 생각한다. 공명 없이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애오라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것이니 이를 어쩌랴. 막고 품는 수밖에.

바야흐로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 K라는 접두어를 걸고 한국적인 것들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잠시 주춤거렸지만 도도하게 흐르는 장대한 물결은 그침이 없을 것이다. 내란을 거뜬히 물리치고 새시대를 준비해나간 빛의 혁명을 주목한다.

방탄소년단을 비롯해 영화, 드라마, 음악 등 세계 정상에 우뚝 선 한국문화를 주목한다. 이렇게 된 데는 마땅한 까닭이 있다. 그것이 뭘까? 각 분야와 장르에서 논할 일이로되 나는 이를 한국의 소릿길에서 찾고자 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과거가 현재를 구한다'는 말이 슬로건이 되었다. 정치나 역사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문화사 쪽에서 추켜들고 나아가야 할 언설임을 주목한다. 밥딜런이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것은 그이의 노래가 시대정신을 현대의 양식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한국의 소릿길을 K-컬쳐 로드에 담아내고자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서남해 바닷길에 놓였던 노두, 그 디딤돌 하나 놓는 마음으로 이 연재를 시작한다. 이름도 빛도 없지만 도처에 난무하는 무림의 고수들께 지도편달 구한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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