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림에는 기운이 가장 중요
벼루·먹에 새 물…붓은 순해야
부단한 연습으로 운필 용이하게
1970년대 동양화바람 타고 붐
온실 화초서 야산으로 돌려줘야

그 많은 난초는 다 어디 갔을까?
남도 나지막한 야산, 비탈진 곳 몸 나직이 숨어 살던 춘란, 흔하디흔하더니 지금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옛날 나뭇짐 해 나르던 시절 오리나무숲과 잔솔가지 민둥산에 자생하던 야생란 생각이 난다. 언제부터인가? 희귀종이 되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더니 누군가가 캐가버렸나? 지금 도시 아파트에서 호강할까?
꽃이 피어부럿다고 난리
꽃이 져부럿다고 난리
남도의 봄은 합창 난리통이다. 꽃 때문에….
집에 든 난분에도 물이 오르고 촉을 내더니 꽃이 피는데, 꽃이 피기라도 할라치면 온 식구가 나서서 호들갑이다.
"오매! 세상에 난 꽃이 피었다야!"
"내 안 본 사이 꽃이 피어부럿다야…!"
난바람이 인 것은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이니 오래된 얘기다. 광풍이라 할 만큼 이곳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고는 했는데 여리디여린 가는 잎 몇 가닥이 무슨 힘이 그리 셌는지?
난 채집이 한창일 때는 뭔가에 홀리듯 중투호(잎 가운데가 흰 것), 소심(素心), 복륜(잎 가장자리가 흰 것) 희귀난이 있다는 곳이면 쫓아다니기도 했다.
귀하게 여기는 만큼 태산준령 깎아지르는 단애에서나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살 것 같지만 의외로 평평한 민가 가까운 곳에 자생하는데 남서해안에 집중된다고 하니 기후와 토양과 연관 있어 보인다. 누런 황토와 물 빠짐이 좋은 마사토 지대, 해풍이 부는 곳이어서 변이종이 많은 것일까? 소문 때문에 한때 함평군 같은 데는 남벌로 인해 온 산이 몸살을 앓았다고. 지역의 난바람도 처음에는 여행자나 소수자 취향이었던 게 빠르게 대중화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홍도풍란->석곡란(돌에 붙은 난)->희귀란 순으로 대상과 표적이 달라지는데 희소성에 대한 가치를 따지다 보니 가격이 천정부지여서 부르는 게 값이라는데 그 정도면 취미나 탐미의 수준을 넘는 것 아닌가?
난을 치는 데 있어 예부터 자세나 마음가짐을 중히 여긴다고 가르치고 있다.
난을 그리는 묘미는 기운(氣韻)이 가장 중요하다.

먹은 반드시 정품(精品)임을 요(要)하고 물은 반드시 새로 길어온 것이라야 한다.
벼루는 먹을 먹찌꺼기로 씻어버리고 붓은 순(順)해야 하고 등등 계자원화전(界子園畵傳) 주문이 꼬장하지만 하다 보면 다 지켜지지는 않는다. 표현은 또 다른 표현을 낳기 때문 아닐까?
난의 매력은 여릿한 자태에도 있지만 동양미술에서는 선 긋기의 수단으로 삼는다. 길고 유연한 모필도 운필이 용이하게 하는 데는 '붓을 이긴다'는 말처럼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난과 난 그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림에 앞서 난이겠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지역 문화를 토대로 하는 것이므로 그림 액자나 병풍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된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고급문화이던 것이 근현대를 거치면서 일반화되는데 보통 시민들도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난바람은 동양화의 붐(1970년대)과 그 궤를 같이 한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주거환경 개선을 주요인으로 꼽는데 베트남전 노동자들의 중동 진출로 인한 오일달러의 국내 자본 유입이 건설 붐과 맞물리면서 투자심리가 급증함으로써 신드롬과 같은 호황기를 맞게 되는데 그러니 그림의 '그' 자도 모르는 사람도 사람 모이는 자리면 그림 얘기 난 얘기 수석 얘기하다 보니 급기야 박봉을 쪼개 사들고 집에 떡 걸어놓게 됐다는 것.
그러니 일반 가정은 물론이고 다방, 여관, 술집, 특히 2층 슬라브집이 도시주거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그 수요가 급증하게 되는데 애호가들 말고도 의사, 교사, 샐러리맨, 나중에는 공무원들까지 가세하게 되는데 선물 등 그 쓰임새가 알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당시 도시 슬라브집 응접실을 살피자면 유행 시기가 조금씩 다른 수집품들의 전형을 엿볼 수 있는데 난, 수석, 목물, 박제 등이 가구 책장과 같이 진열돼있는데 거실 가운데 놓이는 탁자의 경우 나무 탁자를 잘 다듬어 다리 삼고 그 위에 두꺼운 유리판을 까는데 당시에는 신박한 물건이었다. 부의 상징으로 치부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림과 그 대상이 서로 맞물려 한 식구처럼 한 공간에서 공존한다고나 할까?
난바람은 시골 다방 아가씨의 치마폭에서 온다?

나는 그림 초년에 시골 읍 단위 다방에서 전시회를 가진 적이 있다. 여러 명이 하는 그림 전시회였는데 도시에서도 그렇지만 소읍에서도 다방만큼 적절한 소통 공간은 없었다. 전시 오픈식이라고 지역의 읍장님 등 기관장님들도 모시고 테이프 커팅을 하게 되는데 휘장을 두른 난 화분이 즐비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축수의 상징물이 되고는 한다. '난을 칠 때는 기쁜 마음으로 행한다' 했는데 이 때문일까?
남도의 화가들에게 행복했을 때를 꼽으라면 이 시절을 말하지 않을까? 비록 전문 공간이라 할 수 없어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살롱 문화가 자연스레 스며들었으니 말이다. 한참 호황기에는 진도나 목포에 가면 개도 지전을 물고 다닌다더라 했을 만큼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더러는 '남발'이라는 한 단어로 폄하도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고민하고 웃고 떠들고 했으니 그 사회적 가치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부터 광주시에서는 아트페어를 여러 경로를 통해 개최하는데 매번 시도는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는가? 대중을 정서적으로 움직인다는 게 어려운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난바람은 그림 액자 병풍에서 튀어나왔다 했다.
줄지어 그림 감상하는 것도 만들기 어려운데, 그림을 받는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건 한 장르에 머물지 않고 문화 전체가 상호작용에 의한 시너지 효과일 터다.

당대 화단의 거두였던 의재 남농 선생과 그 선대인 추사 소치 미산으로 이어지는 남도 미술 혈맥에서 단초 제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결정적인 것은 남농이다. 지금도 목포남농기념관에 근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후 있을 붐의 장본이라고나 할까.
남풍이 가능했던 것은 남도 사람의 감수성과 고양된 미감도 한몫하게 되는데 '나도 알만큼 안다'이다. 유전자를 타고났는지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보는 눈이 생긴 것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여기 와서 그림자랑 마라'가 되었다. 이를테면 당시 인기 작가는 화실에는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표현대로 하면 '그림 받는다'라고 한다.
한 번은 그림을 사 갔던 이가 그림을 다시 들고 온 것이다.
이유인즉슨 그림에 빈자리가 많아 좀 더 그려 넣어줄 수 없겠냐는 주문이었다는데(수묵화 대 난초 추정) 그림 그리는 사람과 그림 받는 사람 서로 입장 차가 생긴 것. 같은 지면을 그린 사람은 여백으로 보고 받는 사람은 공백으로 봤으니…. 좌중을 웃기는 해프닝으로 웃고 넘겼는데 다시금 생각건대 눈이란 막연해서 그려주는 대로 고분고분하지만은 았았던 모양이다. 보는 눈이 생겼으니….
청풍피불자다사 사일담운향만림(淸風被拂自多思 斜日淡雲香滿林)

'맑은 바람 살랑이면 절로 생각이 많아지고 지는 해에 구름이니 향기가 숲에 그득하구나' (의재화집)
화제 글처럼 산골짝 온순한 난초가 어찌하여 '촉당 얼마'(한 포기)에 팔리는 지경에 이르렀던고. 한자 풀이가 해칠 피 해칠 불로 읽히면서 갑자기 선이 거칠어지고 '산발'이 연상되어 풀어헤치듯 난이 더이상 난이 아닌 것이었다. 광풍에 그만 '미친 난'인 것이다.
더이상 온실의 화초이기를 거부하듯 말이다. 이제 그만 놔줘야 하지 않을까? 아파트 베란다 난분들 보듬어다가 가까운 야산에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박문종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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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 광주' 새로운 도약, 광주예술문화융성포럼 출범 광주예술문화융성포럼 준비위원회 '예향 광주'의 문화적 가치를 제고하고, 다양한 '문화선도도시' 비전과 정책들을 제시하기 위한 단체가 새롭게 출범한다.'광주예술문화융성포럼'(가칭) 준비위원회는 9일 오전 광주 동구 예술이빽그라운드에서 포럼 발족을 위한 회의를 가졌다.광주예술문화융성포럼은 '문화 선도도시 광주'를 위한 비전과 정책들을 제시하는데 뜻을 두고 있으며 광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 예술계 각 분야 전문가들이 고루 포함됐다. 이들은 위기에 처한 광주 문화생태계의 현 상황과,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의식에 공감해 포럼을 결성하게 됐다.이날 회의에는 김봉국 디자인씽커스 대표, 김소진 독립 큐레이터, 김영순 전 광주문화재단 전문위원, 김일태 조선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이당금 예술이빽그라운드 대표, 이승찬 씨움갤러리 대표, 이정철 전 광주 북구의회 의원, 장현우 예술문화기획자, 정인서 광주 서구문화원장 등이 참여했다. 준비위원 중 한 명인 백종옥 미술생태연구소장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다.이날 회의에서 준비위원들은 포럼 발족에 앞서 광주의 예술문화 생태계가 마주한 문제점을 짚어보고 포럼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실천 과제에 대한 의견들을 나눴다.먼저 광주 예술계의 위기에 대해서는 모두가 한목소리로 공감했다. 미술은 유통시장 붕괴로 침체됐고, 공연예술은 공간과 예산의 이중 고갈에 직면했다고 입을 모았다. 정치와 행정은 예술문화를 정책이나 신산업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으며, 예술인은 고립된 현장에서 생존을 고민하고 있다고 토로했다.인공지능·기술미디어·기후위기가 예술의 존재 방식을 새로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광주 역시 문화 생태계를 회복할 전환점에 있다고 진단했다.특히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이재명 정부가 '문화강국론'을 제시한 만큼, 문화 예산 확대, 예술인 기본소득,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정책기조에 맞춰 광주가 대한민국 문화정책 전환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이를 위해 광주예술계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을 마련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예술문화 데이터베이스 구축, 예술인창작 허브 및 레지던시 조성, 디지털 예술 플랫폼 개발, 예술문화 관광루트 운영, 지역 K-컬처 클러스터 조성 등을 위해 노력할 방침이다.정인서 서구문화원장은 "역대 광주 시장들 모두 문화예술을 발전시키겠다고 공언했으나,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광주는 문화예술도시를 표방하면서도 콘텐츠적으로도 도시 외관적으로도 전혀 새로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정치와 행정에서 변화를 이끌 수 있도록 우리 포럼이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말했다.장현우 문화예술기획자는 "지금 광주에 필요한 것은 예술문화 기반을 통한 관광 산업이다. 공원을 만들고 전망대를 만들어 관광객을 불러모으겠다는 기존의 하드웨어 관광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세계의 예술가들이 오고싶어하는 아트플랫폼 구축, 비엔날레와 여러 미술관, 작가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체감형 신산업 등을 통해 광주의 미래를 디자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광주예술문화융성포럼은 실천 과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가다듬은 후 오는 16일 오전 11시, 광주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포럼 발족을 선언하고 회원을 모집할 예정이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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