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마다 여행 스타일이 다르고 선호하는 여행지도 다르다.
필자의 경우 그때그때 끌리는 여행지를 고르는데, 새로운 음식이나 풍경을 접할 수 있는 곳을 좋아한다. 음식이 후각과 미각으로 즐거움을 선사한다면 풍경은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한다. 이색적인 도심의 골목길이나, 찬란한 대도시의 야경, 인간이 빚어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지형지물 등이 여기 해당한다.
광주 가까운 곳에도 감탄을 자아내는 멋진 절경이 있다. 다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을 뿐이다.
댐 건설로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의 안타까움이 담긴, 그래서 더 귀하고 아름다운 화순적벽을 들어가 봤다.
◆ 중국 부럽지 않은 화순의 보물
화순 동복천 상류에는 7㎞에 걸쳐 크고 작은 절벽들이 있다. 1519년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에 유배를 온 신재 최산두 선생은 이들 절벽의 비경을 중국 양쯔강에 있는 '적벽'에 버금간다 해 같은 이름을 붙였다.
'화순적벽' 중에 널리 알려진 곳은 당시 마을의 이름을 딴 물염적벽, 창랑적벽, 노루목(장항)적벽, 보산적벽 등 4곳이다.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은 동복댐 상수원보호구역에 들어가 있어 진입이 쉽지 않지만 물염적벽과 창랑적벽은 언제든 방문이 가능하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아침, 물염적벽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인 물염정 주변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도시에서 들어보지 못한 다양한 새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쓰레기를 주우러 나오신 할머니 두 분은 바위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르신들의 시선은 매마른 가지 사이로 수려한 경관을 간직하고 있는 물염적벽에 머물러 있었다. 예전이야 적벽 바로 앞까지 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물염정이나 인근의 물염교에서 바라봐야 한다.
물염정은 물염 송정순이 16세기 중엽에 건립했으며 내부에는 물염적벽의 풍경을 표현한 시액들이 다수 걸려 있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훌륭한 산수를 보며 호연지기를 기르지 않았을까 싶다.
물염정에서 차로 1분 도보로 15분 거리에는 창랑적벽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위치가 적벽과 제법 떨어져 있지만, 물염적벽보다 적벽의 규모도 크고 주변에 시야를 방해하는 나무가 없어 비경을 온전히 감상하기에는 물염정보다 낫다.
넓은 모래사장과 동복천, 적벽이 한눈에 보여, 과거 수몰되기 전 적벽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물염적벽을 잠시 감상하는 동안 부산에서 이곳을 찾아온 관광객을 볼 수 있었다.
조기수(63)·신선화(59·여)씨 부부는 3박4일 일정으로 차박 여행 중이었다. 첫날은 구례를 둘러봤고, 이날은 화순, 셋째날은 여수를 들르고 마지막날 부산으로 돌아가는 일정이다. 조씨가 퇴직한 후 재작년부터 여행을 수없이 다녔지만, 화순 적벽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기에 이들에게도 생소한 곳이었다. 수천만년동안 쌓인 지층이 만들어낸 창랑적벽의 모습에 매료된 듯, 이들 부부는 연신 핸드폰으로 사진과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후 물염적벽, 세량제를 들렀다 화순천에서 차박을 할 예정이었다.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가보지 못한 멋진 곳이 많은 것 같아요. 멋진 풍경에 힐링하고 돌아갑니다"
◆ 절경 뒤 숨겨진 실향의 아픔
창랑적벽에서 차로 15분거리에는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으로 들어가는 화순적벽 입구가 있다. 일반 관광객들은 '적벽투어' 버스를 이용해야 출입이 가능한데 현재는 진입도로 확포장 공사로 4월말부터나 투어가 재개된다.

이곳에서 만난 김광진(60)씨는 10년째 동복댐이주민협회장을 맡고 있다. 화순적벽을 여행하면서 동복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현재 동복댐 아래에는 김씨가 살고 있던 난산마을을 포함해 15개 마을이 수몰돼 있다. 이곳 출입을 동복댐이주민협회가 관리하고 있는데 이날은 김씨가 옛길 탐방로를 점검하러 들어가는 길에 동행할 수 있었다.
적벽 옛길은 아직까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곳으로 과거 마을이 있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도록 조성 중이다. 왼쪽으로 기암괴석과 오른쪽으로 동복호가 보이는 길을 잠시 걷다 보면 대나무숲이 나오는데, 그 옆으로 2층짜리 누각인 송석정이 자리 잡고 있다.
송석정은 1687년 석정처사 김한명이 건립한 정자로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2003년에 광산김씨 후손들이 자리를 옮겨 복원했다. 송석정 앞으로는 너른 바위가 있어 동복호의 주변 경관이 훤히 보이는데, 원래 이 바위는 호수가 아닌 마을을 내려다보는 바위였다.
동복댐으로 인해 본래의 풍경을 잃어버린 것인데 이런 장소는 주변에 여럿 있다.
송석정 옆 대나무숲에는 색이 바랜 대나무들이 수십다발씩 쌓여있다. 이는 김씨를 비롯한 동복댐 이주민들이 틈나는 대로 길을 뚫고 관리한 결과물이다. 숲으로 더 들어가다 보면 대나무숲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나무 기둥과 돌로 쌓은 담벼락, 우물터 등이 나온다.

원래 이 숲은 보암마을 옆 작은 대밭이었으나 마을이 수몰되고 사람이 떠나면서 사람이 살던 공간을 뒤덮어 버린 것이다.



한창 걷다 보면 노루목적벽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위치가 나오지만 그 사이에는 상수원보호구역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다.
좀 더 또렷한 적벽의 모습은 대나무숲을 벗어나 망미정에서야 볼 수 있다. 과거 화순적벽에는 30여개의 누정이 있었지만 현재는 앞서 둘러본 물염정, 송석정과 이곳 망미정만이 남아있다.
망미정은 1646년 적송 정지준이 건립했는데 앞서 둘러본 송석정과 마찬가지로 6·25전쟁 때 소실됐다가 복구됐다.
망미정에서 바라본 적벽도 멋졌으나 오르막을 올라 망향동산으로 향한다. 적벽투어버스를 탄다면 망향동산에 도착해 마지막으로 망미정에 들르는데 옛길을 따라왔기에 거꾸로 관람하는 셈이다.
망향동산은 1986년부터 동복댐 이주민들이 꾸준히 필요성을 외치다가 1995년부터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거쳐 2005년에서야 조성이 완료됐다.
넓은 잔디밭에 망향정이 우뚝 세워지고 있고 주변으로 적벽팔경이 새겨진 비석, 수몰된 15개 마을의 비석을 세운 망향비와 망배단, 천제단 등이 설치됐다. 넓은 잔디밭에서 적벽의 비경, 푸른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다, 망향정에 들어가 앞서 봤던 풍경을 다시 한눈에 담아 본다.
돌아가는 길은 왔던 곳 대신 도로 공사 현장을 지나쳐 갔다. 대형버스가 커브길을 돌기 힘들어 포장 공사를 하는 것인데, 공사가 완료되면 좀 더 안전하게 이동이 가능할 것 같다.
공사현장 인근의 제2전망대에서는 동복호와 적벽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조금 전까지 서 있던 망향동산 아래 펼쳐진 보산적벽의 모습도 절경을 자랑한다.
필자는 제주도 여행을 가면 산방산을 자주 들르는데 경이로운 자연물이 주는 경외심과 함께, 매일 이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감정을 헤아려 본다.
그렇다면 화순적벽은 원주민들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동복댐이 건설되면서 김씨를 비롯한 동복댐 이주민들은 수백년동안 선조들이 가꿔온 마을도, 자부심이라 할만한 아름다운 풍경까지 모두 두고 떠나야 했다. 1970년까지 이서면 인구는 9천명에 달했으나 현재는 1천명이 채 되지 않는다. 우리가 마시고 있는 물에는 이런 한이 서려 있었다.


◆ 예술의 고장 동복면
화순적벽에서 나온 후 주변을 운전하다 의외의 장소를 마주쳤다. 노루목 적벽 뒤로 보이는 옹성산 아래, 동복면 안성리를 지나다 오지오 화백 묘소가 있다는 표지판을 발견했는데, 동복면소재지에서는 오지호 기념관 표지판을 본 것이다.
이날 여행 계획에는 전혀 없던 곳이었지만, 두번이나 표지판을 본 것도 인연이다 싶어 즉흥적으로 오지호 기념관 쪽으로 핸들을 틀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인 오지호 화가는 광주지역 문화예술을 이끈 대부다. 조선대학교에 미술과를 창설하며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아들인 오승우·오승윤 화가도 서양화단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오지호 기념관은 1996년 건립됐는데 수차례 전시실 확충과 정비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1층에는 오지호 화가의 작품과 유품인 도록 등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고, 지하 1층에는 아들인 오승우·오승윤 등 국내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이 기증돼 있다.
기념관의 오지호의 작품에는 유독 밝은 원색이 자주 사용됐으며 향토적인 풍경과 소재에서도 유럽의 분위기가 어우러진 인상을 받았다.
기념관에서 가까운 곳에서는 오지호 화가의 생가도 있는데 그가 그림 작업을 하던 화실도 잘 보존돼 있어 방문해 볼 만하다.
남쪽으로 차를 몰다 또다시 의외의 장소를 발견했다. 한천리라는 마을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흔한 나무나 꽃이 아닌 당산나무에서 마을굿을 하거나 풍물을 연주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 한천리는 농악으로 유명한 곳으로 1979년에 전남도 무형유산 제6호에 지정됐다.

한천농악 보유자인 노승대 가옥을 중심으로는 연대별로 활동한 상쇠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 마을의 역사를 한번에 알 수 있어 좋았다.
오래된 마을의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벽화들도 좋지만 이처럼 마을의 역사와 특징을 한번에 설명해 주는 벽화가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 방랑시인의 종착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동복면 구암리에서는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이곳에는 김삿갓 문학동산과 그가 6년간 머물다 생을 마감한 종명지, 이장 되기 전까지 3년간 묻혀 있던 초분지가 있다. 특히 김삿갓 문학동산에는 그의 주옥같은 시들을 비석에 새겨 놓았는데 권력자에 대한 풍자와 해학,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어 들러볼 만하다.
김삿갓이 35년간 전국을 방랑하게 된 경위도 기구하다 할 수 있다. 20세에 응시한 과거시험에서 홍경래의 난 당시 항복한 김익순을 비판하는 글을 써 장원급제를 했는데, 이후에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것을 알고 '푸른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다'며 방랑에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조상을 욕보이고 고향을 떠난 김삿갓이 화순에 머문 이유는 당시에도 천하제일경으로 불리던 적벽 때문이다.
'무등산이 높다하되 소나무 아래 있고 적벽강이 깊다하되 모래위에 흐른다'
김삿갓이 묘사했듯 동복호에 비치는 적벽의 모습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고향을 떠난 이들의 아픔까지 같은 공간에서 이어질 줄은 누가 알았을까. 눈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잔뜩 담고 왔음에도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는 날이었다.
글·사진=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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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밑의 사람들', 강제동원의 기억 깨우다 니 히로하루 외 2명 작 '하나오카를 잊지마라' "마쓰다 도키코는 정의를 추구하는 작가였습니다. 한국 강제징용자들이 학살된 하나오카 사건을 일본 사회에 밝힌 그의 문학과 생애에 대한 국제 학술대회를 정의의 도시인 광주에서 여는 것이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12일 만난 차타니 주로쿠(茶谷 十六) 아키타현 역사교육자협의회 회장은 광주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 심포지엄 '마쓰다 도키코의 문학과 생애'의 의미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니 히로하루 외 2명 작 '51.장례식'오는 18일 오후 2시 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1층 1전시실에서 열리는 이번 국제 학술 심포지엄은 시립미술관이 하정웅 선생으로부터 기증 받은 컬렉션 중 '하나오카 이야기' 작품을 계기로 성사된 행사이다. 이 작품은 동명의 서적에 실린 판화 작품으로 1951년 니 히로하루, 다카다이라 지로, 마키 다이스케가 제작했다. 동명의 서적은 하나오카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의 모습을 담은 판화와 시 등이 실렸다.니 히로하루 외 2명 작 '32.조선인'하나오카 사건은 아키타현 오오다테시에 위치한 하나오카 광산에서 벌어졌다. 그 시작은 1944년 벌어진 나나쓰다테 사건이다. 하나오카 광산은 구리 광산으로 전범 기업인 도와광업이 강제징용한 한국인과 일본인 노동자들을 동원한 현장이다. 태평양전쟁 중인 일제에 구리를 조달하기 위해 무리한 채굴을 벌이다 갱도가 무너지자 구조 신호가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당국과 도와광업은 현장을 모래로 덮어 한국인 11명을 포함해 총 22명을 생매장한 사건이다. 이후 중국인 포로 노동자까지 투입돼 과중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하나오카 광산의 중국인 노동자가 견디다 못해 봉기하자 일본 군경이 419명을 학살한 사건이 하나오카 사건이다. 같은 장소에서 불과 몇개월만에 일본 당국의 강제징용과 학살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는 점에서 하나오카 사건과 나나쓰다테 사건은 줄곧 함께 언급되고 있다.마쓰다 도키코노동자와 농민의 인권을 대변하는 활동을 펼쳐온 마쓰다 도키코는 그의 대표작인 소설 '땅 밑의 사람들'은 이 하나오카 사건과 나나쓰다테 사건을 다루고 있다. 1905년 아키타현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광산사무소에서 근무하며 광산 노동자의 노동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이후 작가로 활동하게 되며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일어난 나나스다테 사건과 하나오카 사건에 관심을 작가로서 사건 진상규명에 매진했다.이번 국제학술포럼은 조선인 강제 징용 문제와 그들의 인권 회복, 학살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 헌신해 온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는 자리로 '하나오카 이야기' 연작도 함께 전시된다. 또 마쓰다 도키코가 하나오카 광산을 직접 다녀와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작성한 서적 '하나오카 사건 회고문'의 한국어판 서문을 쓴 문병란 시인의 저항 정신을 마쓰다 도키코와 비교 분석하며 한일 양국 문학인의 저항 정신을 되짚는다.문병란 시인포럼은 다카하시 히데하루 아키타현립대 부총장이 '마쓰다 도키코의 문학과 생애'를 주제로 한 기조 강연으로 시작해 발제로 이어진다. 발제는 마쓰다 도키코회 대표의 '나나쓰다테 사건과 하나오카 사건의 진상', 차타니 주로쿠 아키타현역사교육자협의회 회장의 '한국으로 확장되는 마쓰다 도키코 문학과 생애',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의 '문병란과 마쓰다 도키코의 저항정신'으로 진행된다.윤익 시립미술관 관장은 "5·18민주화운동 45주년을 맞이해 민주인권평화의 도시 광주에서 아시아 민중이 겪은 아픔과 저항의 역사를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시립미술관은 조선인 강제징용의 아픔을 기억하며 이를 기리려 했던 하정웅 명예관장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한편 이번 국제 학술포럼은 광주시립미술관, 일본 역사교육자협의회, 광주전남작가회의, 문병란시인기념사업회가 주최·주관하며 5·18기념재단, 한일민족문제학회, 역사교사모임이 협력한다.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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