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어지러워도 꽃구경 마다할손가

입력 2025.04.01. 16:08 최소원 기자
[그림으로 농사짓는 박문종 에세이③]
불·매·운·동(不梅運動)
매화는 사군자 중 맨 먼저 자리
백매는 백묘법·홍매는 몰골법
연진미술원 수련 중 국전 입선
의재선생 공간 춘설헌서 반년
조희룡 '매화서옥도' 분위기도
일에는 공력 들여야 꽃 피더라
박문종 '매화 부지깽이 꽃'. 47x75cm 종이 먹 2022.

일찍부터 남도 여기저기서 꽃소식에 들떠있다. 세상사 어지러워도 꽃구경 마다할손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 모이는 자리면 한마디씩 하는데 매화꽃 입에 물고 "매화 매화 매화" 타령이다.

"매화만 꽃일랍디여?"

어깃장을 놓고 싶은 것은 지독한 편애에 대한 반작용쯤으로 해둘까? 하다 하다 꽃 시샘이라니, 불매운동이라도 할까부다. 꽃구경 못 나가는 심사가 이리 뒤틀려 있다.

옛사람들은 매화보기를 꽃이 드물고(稀), 나무가 오래되고(老) 가지가 마르고, 꽃봉오리가 진 것 네 가지를 귀(四貴)한 것으로 정하고 관상의 기준을 삼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정한 노릇이지만 매화는 사군자, 그중 맨 먼저 자리하는데 동양 그림의 기초가 되면서도 화면을 구성해 나가는 데 주요수단으로 삼는다. 매화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무등산 춘설헌의 '춘설매'다. 춘설헌(春雪軒) 당호에서 따온 것이겠지만 한겨울 눈꽃이 분분한 날 핀다 해서 춘설매(春雪梅) 나무 등걸이 굵고 굽고 뒤틀리고 온갖 풍상은 고스란히 드러내는 노매(老梅)다. 비탈진 곳에 드리워져 청향을 내뿜는다. 그리려고 하면 붓을 눕혀 비비듯 찰(擦) 건필로 단숨에 쳐올린다. 백매는 백묘법(白描) 홍매는 몰골법(墨骨)으로 점을 찍듯 하는데 색이 들어갈 것 같으면 붉디붉은 연지로 찍는 매화점(梅花點)이다. 한 닢 두 닢 세 닢 네 닢 다섯 닢….

◆동양화의 메카 춘설헌

알려진 대로 춘설헌은 의재 허백련 선생의 공간이다. 무등산 증심사길 오르막에 위치하는데 간결하게 지어진 근대식 건물이다. 그 일대는 후학들을 양성하며 작품 활동을 하시던 곳으로 춘설헌을 중심으로 미술관, 차밭, 차 공방, 묘소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선생께서 생전에 애정한 것들이다.

내가 그림에 입문했을 때(1970년대 후반)만 해도 증심사(의재로) 골짜기는 산속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사람들이 들어찬 생활 공간이었다. 당시에 폭발적인 동양화 인기에 힘입어 전국에서 수묵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묵객)들이 홍수처럼 들이닥쳤는데 가히 동양화의 메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활성화된 공간이었다.

당시로써는 화가로서 입지를 가지려면 공모전 출품이 당연시되던 때였다. 특히 관에서 운영하는 국전(미술대전)은 필수적이어서 비빌 언덕이라고는 없는 신출내기에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데, 후일 생각건대 달콤한 독약과 같은 것이었다. 경쟁이 치열해 입선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당시 다니던 연진미술원에서 익혔던 수묵 사군자를 중심으로 출품이 되었는데 그냥 그리는 연마의 시간이었다. 앞뒤 볼 것 없이 죽어라고 붓을 그어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떡 입선을 해버린 것이다. 그해(1982년)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매화 피고 차밭에 햇차를 따고 차 공방에서 차를 덖을 때였는데 세상을 다 얻은 듯 기고만장했던 기억이다.

허백련 '묵매도'. 23x67cm 지본묵화 개인소장.

◆춘설헌에서의 반년

나는 운 좋게도 춘설헌에서 반년을 살게 된다.

선생님 타계 후 잠시 비어있을 때인데 공모전 준비 작업을 명목으로 복식건물 중 객실을 쓰게 된 것이다. 그리되니 비탈진 곳을 오르내리며 생활하셨던 선생님처럼 일찌감치 도인 흉내를 내봤던 것이다.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생활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다. 산중답게 겨울은 길고, 봄은 더디고, 여름에는 습하고, 가을 되면 들창문 밖에 큼직한 개오동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뭇잎 떨구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저벅저벅 반기는 이 발자국 소리 같아 문을 열어젖히기도 했다.

겨울 무등산 설경은 어디를 봐도 좋은데 산속이라고 다를 바는 없다. '백발 성성한 의도인' 같기도 하고 조선조 후기의 화가 조희룡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거기 있는 동안은 사계가 또렷한 병풍 속에 사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누경빙상지리득 각도동풍일야개(累徑氷霜遲離得 却道東風一夜開)'라 했다.

'여러 차례 빙상을 지나 오랜 세월 끝에 문득 동풍을 만나 하룻밤에 꽃을 피웠더라'(의재 화집)

작가 작품에 붙은 화제인데 봄을 기다리는 심정이 절절하다. 금방 봄인데 또 더뎌오는 게 봄인가 보다.

산비탈에는 잔설이 아직 남아 조급함을 더하는데 한편으로는 어렵게 꽃을 피웠건만 뭇사람들은 쉽게도 말하더라.

"하룻밤 새 꽃이 피어부렀다고!"

마침 꽃 필 때 시어가 현실이 될 줄이야.

조희룡 '매화서옥도'. 종이에 담채. 106.1x45.6cm 간송미술관.

아침에 일어나니 반가운 소식처럼 꽃이 피는데 그날은 좀 이상했다. 골짜기에 기운이 안온하게 감돌고 전날 살짝 뿌린 비로 사위가 축축한데 드디어 꽃을 보게 된 것이다. 봄바람에 하룻밤 새 꽃이 핀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매화라면 춘설매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다.

작년에 의재미술관전시회(허백련상 수상기념전)는 감개무량한 것이었다. 작품 춘설헌 1, 2, 3 연작과 무등산거도 등을 선보였는데 그날의 감격이 한몫했으리라. 무슨 일이든 공력을 들여야 얼어붙은 땅에서 풀뿌리가 녹고 꽃을 피우고 새우는 것 아니겠는가? 부뚜막에 부지깽이도 불구덩을 부단히 드나들다 보면 발화가 되는 이치라고나 할까?

박문종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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