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도를 여행 후보지로 잡은 것은 어쩌면 '남쪽이라 조금은 따뜻하지 않을까', '봄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행 당일 광주와 전남 전역에서 부는 강한 바람은 일말의 기대감을 대차게 날려버렸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누구에게도 날씨에 대한 원망을 들을 필요 없는 혼자만의 여행이란 것이다. 여행 전날이나 당일에도 일정을 내 멋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혼자 여행만의 묘미다.
추운 바람을 피하며 골목길 곳곳에서 구도심 곳곳을 탐방했고, 운림산방에서는 따뜻한 미술관에서 5대에 걸친 예술혼도 엿볼 수 있었다. 해가 지기 전 진도읍성에서 진도읍을 내려다보니 하루 만에 진도에 대한 없던 정도 생겼다.
계절과 세월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 진도의 매력을 함께 살펴보자.
◆ 골목길에서 마주한 진돗개와 세방낙조, 벽화골목
광주에서 두시간가량 걸려 마주한 진도공용터미널은 마치 스마트폰을 쓰는 어르신 같았다. 좁고 어두운 대합실과 큼지막한 배차 시간표가 전형적인 옛날 터미널임을 말해주지만, 직원이 자리를 비운 매표소 옆에는 네 대의 승차권 키오스크가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터미널을 나서면 진도읍에서 가장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남문길이 진도군청 방향으로 1㎞가량 뻗어있다.
주변에 4층 이내 낮은 건물들밖에 보이지 않지만 파스텔톤으로 칠해진 건물들은 푸른 하늘과 대비돼 보는 재미를 준다.
오래된 건물들이 곱게 분칠하고 자신을 뽐내는 것 같으면서도, 앞에 최신식 주차 관리 카메라가 일렬로 쭈욱 설치된 것은 생소한 광경이다.
남문길이 나무의 큰 기둥이라면 골목길들은 옆으로 뻗은 가지와 같다. 남문길 골목길 구석에는 형형색색의 벽화들이 어두운 골목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어 마치 가지 끝에 피어난 꽃들을 떠올린다.

이 같은 변화는 진도군과 상인회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진도군은 지난 2020년 상권 르네상스 사업 공모 선정으로 '남문로 상권 활성화 사업'을 추진해, 오래된 상가들의 외관을 정비하고 골목길에는 각종 벽화를 그려 넣어 '걷고 싶은 거리'를 조성했다.
추운 날씨에도 푸르른 나무와 알록달록한 꽃들이 그려진 골목길을 마주하다 보면 거리의 이름 그대로 자꾸만 걷고 싶어진다.
찬 바람도 미치지 않는 골목길을 미로 빠져나가듯 헤매다 보면, 풍정 소리가 울리는 한옥카페와 진도의 특산품인 홍주를 체험할 수 있는 '홍주리움'도 마주친다.
골목 모퉁이의 큰 나무 벽화 안에는 다람쥐가 도토리를 까먹고 있고, 해가 지는 저녁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그 유명한 '세방낙조'를 골목길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유독 하늘이 맑고 푸른 날이어서인지, 한 놀이터에서 마주한 종이비행기 벽화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는 듯했다.
두근거리며 골목길을 걷게 만드는 것은 벽화뿐만이 아니다. 남문길 구석구석에는 '진도몬'이라고 이름 붙은 진돗개 조형물들도 만날 수 있다. 곳곳에 숨겨져 있는 18개의 조형물은 장구를 치며 상모를 돌리는 '춤추개', 부채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노래하개' 등 그 이름도 모습도 정말 다양하다. 마치 증강현실을 이용한 게임 '포켓몬고'처럼 '진도몬'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었고, 이미 길을 지나간 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진도몬'이 있을 땐 아쉽기까지 했다.

◆ 첨찰산 자락에 뿌리내린 진도의 미술혼, 운림산방
진도읍에서 운림산방까지는 버스나 자가용이나 모두 10분 정도 걸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진도공용터미널에서 사천·쌍계사로 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의신방면 승강장에서 기다리면 된다.
지도어플에서 경로를 확인하면 80-1번 버스도 있는데, 사천·쌍계사 방면과 동일한 버스다.
버스는 오전 7시 40분부터 오후 6시까지 두세시간 간격으로 총 5대가 있다.
지난해 7월부터 진도군의 농어촌 버스는 무료로 운행하고 있는데 버스 경로와 시간만 잘 확인한다면 대중교통만으로도 부담 없이 진도 곳곳을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운림산방은 조선후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그림을 그리던 화실 이름이다.
소치화실과 허련 일가가 거주하던 고택, 영정실인 운림사, 소치기념관인 소치 1관, 후손들의 작품을 전시한 소치 2관이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하고 입장료는 성인기준 2천원이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넓은 잔디밭과 함께 20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커다란 소나무가 반긴다. 소나무 뒤로는 3칸짜리 작은 전각이 있는데 그 앞으로 운림산방을 대표하는 연못인 운림지와 소치화실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전각에서 바라보면 기둥과 지붕을 프레임 삼아 운림지와 소치화실, 첨찰산 정상부의 모습이 한폭에 모여진다.
작은 돌다리를 지나 연못을 끼고 걷다 보면 인근의 쌍계사에서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풍정 소리와 연못의 물소리가 함께 어우러진다.
소치 화실 옆으로는 커다란 은목서가 심어져 있었고, 앙상한 가지의 매실나무와 목련은 3월에 활짝 필 꽃을 기대하게 했다.
소치화실과 고택을 둘러보다 보면 아늑한 풍경의 운림산방이 허련 생전에도 이런 모습이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런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곳이 허련 선생의 작품이 전시된 소치 1관이다. 이곳에서는 소치의 다양한 서화 작품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여러 글을 통해 그의 성격과 인생을 엿볼 수 있다.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허련은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시·서·화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 '삼절'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벽화로 가득했던 골목길이 200년전 허련이 태어난 동네임을 깨닫자 순간 묘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허련은 여러모로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의 자서전인 소치실록에는 당대 문인들이 자신을 높이 평가한 내용도 빼곡하게 기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후원자들이 발을 끊고 생활도 빈곤해지자, 가족과 주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는데 79세에 적은 유언장에는 '어렵게 구한 나무들 처분하고 읍에 가서 살아라', '벽촌에서 내가 어떻게 명성을 얻었겠냐' 등 가족들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허련은 수많은 작품도 남겼지만 미적 감각을 물려받은 후손들도 남겼다.
소치1관의 외관이 한옥이라면 소치2관은 현대식미술관의 모습인데, 허련의 후손 9명에 대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실감영상실에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허련의 작품들을 체험해 볼 수 있고,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 커다란 유리창 앞 홀로그램 포토존에서 붓을 들고 앉으면 잠시나마 허련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전시실에는 2대 미산 허형, 3대 남농 허건, 임인 허림, 4대 임전 허문, 5대 허은, 허청규, 허진, 허재, 허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모두 허련의 후손들임에도 시대와 인물에 따라 화법은 천차만별이었다.
3대 허림의 경우에는 남종화풍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였고, 선염기법을 활용한 4대 허문의 작품들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했다. 5대에 이르러서는 현대적인 느낌의 산수화부터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현대화까지 볼 수 있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것은 3대 남농 허건이다. 1908년 태어난 허건은 아버지 뜻에 따라 상업을 공부했으나 타고난 그림 재주로 인해 결국 화술을 전수받고, 왕성한 작품 활동과 수많은 제자양성을 통해 남종화와 호남 화단의 대가로 여겨진다. 1982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이해 운림산방을 복원했다.
소치 2관 전시실에 들어서는 입구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그림이 그림을 낳다" 5대 화가들 이후로도 6대, 7대까지 허련의 화맥이 이어질지 내심 기대가 됐다.

◆ 겨울에도 푸르른 쌍계사 상록수림
운림산방을 나서 주차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쌍계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이 등장한다.
일주문 옆 작은 개울에는 겨우내 물이 말라 있어, 앞서 운림산방에서 본 넉넉한 풍경과는 너무도 대비됐다.
857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쌍계사는 고즈넉한 천년고찰로 대웅전에는 2018년 보물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도 있다. 운림산방을 온다면 함께 둘러볼 법 하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사찰이 아닌 그 뒤 첨찰산 등산로에 위치한 상록수림 때문이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참가시나무 등이 분포한 쌍꼐사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됐다.
쌍계사 옆 등산로로 조금만 오르다 보면 사찰 입구에서 봤던 살풍경한 풍경은 어느새 사라진다.
발밑의 등산로에는 색바랜 낙엽들이 쌓여 있지만 고개를 올리면 녹색으로 가득한 이파리들이 푸른 하늘을 뒤덮는다.
잠시 바람이 멈춘 상태에서 들리는 계곡물 소리까지 더해지면 지금이 2월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계곡 사이로 바람이 불 때서야 눈이 아닌 피부로 겨울임을 실감했다.
편한 운동화를 신고 얕은 경사로를 20여분 걸었지만, 봄이나 여름에는 첨찰산 정상을 향해 등산 목적으로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상록수림에서 내려와 진도읍으로 돌아가기 길에는 각종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운림예술촌, 오토캠핑장과 한옥펜션이 있는 운림공원, 고려시대 몽고에 저항했던 왕온의 묘도 있어 들러봄 직하다.

◆ 600년 가까이 그 자리에, 진도읍성
진도공용터미널로 돌아와 15분가량 걸어 올라가면 진도군청이 나온다. 진도군청 뒤로는 15세기에 지어진 진도읍성의 성벽이 200m 가량 남아있다. 관청과 민가를 지키기 위해 지어진 성이 600년 가까이 지난 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현재 진도읍성은 일제강점기 이후 도로건설과 도시확장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일부만 남은 상태다.
군청에서 200m떨어진 군강공원에도 성벽이 남아있으나 안전사고 예방과 성곽보호를 위해 보행이 제한된 상태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군강공원에는 진도 출신의 호국영령들을 모신 충혼탑이 있는데 그 맞은편으로는 진도읍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해가 지기 전 오후에 바라본 진도읍내의 풍경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앞서 둘러본 벽화거리가 어디쯤 있는지 찾아보고 그동안 이곳의 풍경은 얼마나 바뀌었을지 생각해 봤다. 이곳에 있는 성벽과 충혼탑은 그 변화의 과정을 쭉 바라봤을 테다.
시간이 흐르고 도심의 모습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벽도 있지만 허련의 후손들은 자신의 선조를 따라 대를 이어 그림을 그려오질 않았나. 허련이 태어난 쌍정리 골목에는 벽화가 그려지며 새로운 이야기를 피우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남겨야 할지에 대한 갑작스런 고민이 생겼다. 해가 지기 전 진도를 벗어나며 나중에 다시 올 때 그 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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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어른 김장하' 입소문 타고 인기몰이 영화 '어른 김장하' 스틸컷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의 명신고 이사장 퇴임사 중)시대의 '어른'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진정한 어른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묻는 다큐멘터리가 다시금 화제가 되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광주독립영화관은 오는 17일부터 영화 '어른 김장하'를 재개봉해 관객들을 맞이한다.영화 '어른 김장하' 스틸컷지난 2023년 개봉한 김현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한약방 대표이자 교육인, 시민활동가로서 일평생을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해온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1944년 경남 사천군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열아홉 살 최연소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 진주시 동성동에 '남성당한약방'을 열고 60여 년간 운영했다. 그는 한약방을 운영해 번 수익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며 나눔을 실천했다.김 선생은 1984년 100억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진주 명신고를 설립하고, 10여 년간 이사장으로 지내며 학교시설을 완비한 뒤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했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1천여 명 이상에게 장학금을 주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외에도 교육·문화·여성·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건 없는 나눔을 실천하며 지역 사회 곳곳에 따뜻한 손길을 건네왔다. 김 선생은 2022년 은퇴해 한약방 문을 닫고 현재 평범한 할아버지의 일상으로 돌아갔다.영화 '어른 김장하' 스틸컷최근에는 김 선생과 문형배 헌법재판관과의 인연이 재조명되며 영화 '어른 김장하'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문 재판관은 지난 2019년 4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김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판사가 못 됐을 것"이라며 김 선생에 대한 감사함을 전하기도 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문 재판관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김 선생을 만나 대학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간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광주독립영화관을 비롯해 이달부터 전국 영화관 곳곳에서 영화가 재개봉해 다시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넷플릭스에서도 '역주행'을 거듭해 '오늘 대한민국의 TOP 10 시리즈' 순위권에 오르기도 했다.광주독립영화관은 오는 21일 오후 7시 영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GV)도 진행할 예정이다. 행사에는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기자, 이국언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등이 참석한다. 자신의 선행을 언론에 알리기를 기피했던 김 선생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다큐멘터리에 담아낸 김 기자의 취재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시간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광주독립영화관 누리집을 통해 예매할 수 있으며, 상영시간과 자세한 정보도 누리집에서 확인 가능하다.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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