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부모 바보' 18일 '정돌이'
감독·배우 참석해 대화 나눠

한국 사회의 사각지대를 짚어보는 독립영화들의 제작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잇따라 마련된다.
광주독립영화관은 영화 '부모 바보'와 '정돌이'의 관객과의 대화(GV)를 개최한다. 영화 제작자들과 배우들이 직접 참석해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관객들과 나눌 예정이다.

'부모 바보'의 GV는 오는 8일 오후 3시 광주독립영화관에서 진행된다.
영화는 사회복무요원인 영진과 그의 담당자 사회복지사 진현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어느 날 진현은 아버지의 집에 본인의 방이 없어 다리 밑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영진과 마주친다. 결국 영진은 진현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한편 힘겹게 살아가는 노인 순례는 진현에게 자신이 수급자로 인정되지 않아 발생하는 고충들을 토로한다. 작품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청년과 노인에 대한 문제를 첨예하게 다뤘다. 2023년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프리미어로 관객에게 첫 선을 보인 후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 등 국내 영화제들에 초청됐다.
이날 GV는 '부모 바보'의 이종수 감독, 정보라 프로듀서, 윤혁진 배우, 안은수 배우가 참석한다. 진행은 '소리굴다리'를 연출한 구파수 륜호이 감독이 맡는다.

이어 18일 오후 6시30분 영화 '정돌이'의 GV가 진행된다.
다큐멘터리 '정돌이'는 주인공 송귀철의 삶의 자취를 밟아보는 여정이다. 1987년 14세였던 소년 송귀철은 경기도 연천에서 아버지의 주취 폭력을 피해 가출한 뒤 청량리 역전을 배회하다 수배 중인 고려대 운동권 학생을 우연히 만나 심야 만화방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다음날 아침, 수배 학생은 가출 소년을 돌볼 수가 없어 소년을 데리고 고대에 온다. 소년은 정경대 학생회실에서 기거하며 정돌이라는 별명을 얻은 뒤 고대에 눌러 앉는다. 그해 6월 정돌이는 형과 누나들을 따라 6월 항쟁에 참여하며 이후 고대 농악대의 일원이 돼 북을 들고 시위대의 앞에 서게 된다.
이날 GV에는 '정돌이'의 김대현 감독과 주인공 송귀철씨가 참석한다. 진행은 이세진 PD가 맡을 예정이다.
GV는 영화 상영 후 진행되며, 영화 예매 등 자세한 사항은 광주독립영화관 누리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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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육지 오가며 왜군 격파··· 한산·행주대첩의 승부사
삼도수군사령부가 있었던 통제영(경남)통영)의 세병관(국보305호).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1차 진주대첩 등을 ‘3대첩’이라 한다. 이 가운데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등 양 대첩에 참전해 공을 세운 보성 출신 선거이가 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선거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해전과 육전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1598년 10월 울산성 전투에서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선두에서 독전하다 적탄에 쓰러졌다. 최근 보성 선씨 문중에서 주관한 학술대회에서 선거이 공적이 새롭게 조명됐다. 특히 이순신 장군과의 관련성을 집중 살핀 순천대 이욱 교수의 글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본 호 집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선거이 등 5명의 보성 선씨 위패를 모셔놓은 오충사(전남보성).선거이는 명종 즉위년(1545년)에 태어났다. 호는 ‘친친(親親)’이었다. 그의 효성이 남달라 붙여진 이름이다. 본관은 보성이고 보성 조성에서 살았다.선거이는 최근 발굴된 ‘기묘문무과방목(己卯文武科榜目)’에 따르면, 1579년 기묘년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합격 당시 ‘겸사복(兼司僕)’에 있었다. 대통령 경호 부대 곧 최정예 금군(禁軍) 출신이었다. 그가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무과에 합격한 후 그는 북쪽 국경에서 근무했는데, 이곳에서 이순신을 만났다. 선거이는 무과 합격하고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무관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절충장군이 됐다. 이는 무예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승진이 빨랐음을 말해준다.선거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 3월10일 진도군수에 부임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휘 능력이 검증된 실전 경험이 뛰어난 인물들을 경상, 전라 등 남해안의 지휘관으로 보임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591년 2월 이순신이 진도군수에 임명됐다가 가리포 첨사로, 다시 전라좌수사로 보임됐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도군수에 이순신, 선거이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연이어 보임된 것은 진도가 왜구의 주된 공격 루트였던 것과 관계 깊다. 이순신과 선거이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유성룡이 무과 급제 후 인사차 들른 선거이에게 “전날 이순신을 보고, 또 오늘 그대를 보니 범장(范張)이 다시 나타난 것과 같다”고 했다.범장은 범식(范式)과 장소(張邵)을 가리키는 말로 깊은 우정을 빗댈 때 하는 고사이다. 서애가 이들의 관계를 범장에 비유할 정도로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려준다.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던 이순신이 여진족의 공격으로 그 지역이 커다란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이순신이 책임을 지고 투옥됐을 때 같이 근무하던 선거이가 옥을 방문해 위로한 적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진도군수로 전라우수영의 관할에 속했던 선거이는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수군과 함께 경상우수영을 지원하는 합동작전에 참전했다. 선거이가 한산도 해전에 참전했던 기록이 선조실록에 있다.김응남이 말했다.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 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했다. …”정곤수는 말했다. “정운이 ‘장수가 만일 가지 않는다면 전라도는 필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가서 격파했다 한다.”전쟁 발발 초기 경상도 수군의 요청을 받아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대다수 전라도 장수들은 머뭇거렸다. 앞서 진무성 장군을 다룰 때 언급했지만, 이순신의 휘했던 송희립, 정운 등이 참전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선거이도 전쟁 초기부터 적극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선거이는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음에서 알 수 있다.호남·영암 수군이 견내량에 모여 왜적의 큰 배 중 10척, 중·소선 70여 척을 발견하고 접전했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을 쏘았으나 전혀 깨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 큰 바다로 퇴진해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군수 선거이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난중잡록1, 임진년 7월한산도 해전에 참여한 선거이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로 선거이가 한산대첩 승리의 주역임을 알려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한산도 해전에서 선거이 역할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은 당시 수군 편제상 선거이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전라도 수군과 공동작전을 펼치고 있던 선거이는 전라감사 이광의 지원 명령을 받고 수원으로 이동했다. 전라병사 최원과 의병장 김천일이 수원에서 인천으로 진을 옮기면서 이광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광은 진도군수 선거이에게 김천일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후 전라병사로 승진한 선거이는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직접 참전하지는 않고 외곽에 포진해 있었다. 행주대첩에는 간접적으로 참여한 셈이다. 하지만 선거이 부대가 요로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이 행주산성을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산도 해전, 행주산성 전투에서의 조선군 승리는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전투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선거이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1595년 충청수사에 임명된 선거이는, 그해 5월에서 9월까지 약 115일 동안 한산도의 통제영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작전을 논의했다. 이 시기에 무려 31일 이상 만났음이 난중일기에 기록되고 있다. 1595년 9월 14일 선거이와 이별할 때 이순신은 다음의 시를 지어 석별을 아쉬워했다.북쪽에 갔을 때 함께 고생했고남쪽으로 와서는 생사를 같이 했네.오늘 달 밝은 밤에 술 한 잔 같이 하면내일은 이별의 감정을 느끼겠구려.한산도 이순신 장군 집무실에 해당하는 제승당.이순신은 선거이와 북의 여진족, 남의 일본과의 전투에서 생사를 함께 한 정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1596년 9월 24일 이순신이 공무로 보성에 갈 일이 있자 선거이의 집을 방문했다. 거기서 이순신은 선거이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안타까워했다.한편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선거이는 성을 비우라는 명군과 권율 등 조선군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진주성을 나와 외곽 방어를 했다. 김천일 등은 진주성이 함락되면 호남이 위태롭다는 판단에 따라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했다. 유성룡은 진주성 함락은 공성 작전을 따르지 않았던 김천일의 실책이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성룡이 남인, 김천일이 서인으로 당색이 다른 것도 이러한 평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조정의 명령에 따라 공성 작전을 수행한 선거이에게 진주성 함락 책임을 물었다. 임진왜란 공신 책록에서 선무공신 아래 등급인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됐다. 이순신과 3차례나 연합해전을 전개하고 육전에서는 일본군과 끈질긴 전투를 하고 마침내 전투의 선봉에서 지휘하다 장렬한 전사를 한 영웅에 대한 온당한 처사는 아니었다. 고향인 보성에 선거이 등 보성 선씨 5인의 영정을 봉안한 ‘오충사’가 있다. 한경국기자 hkk4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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