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무등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못해요 리스트

입력 2025.01.02. 10:20 최소원 기자
그림 장현우 화가

못해요 리스트-이지현

"상희는 다 잘하잖아."

상희 주변으로 친구들이 동그랗게 모여들었다. 허리를 숙여 책상 끄트머리에 기대곤 모두 상희의 활동지를 바라봤다.

"잘하는 게 많아서 어떤 직업이든 다 잘해 낼 거야."

친구들이 쉬지 않고 입을 재잘거렸다. 그 속에서 상희는 아무 말 않고 연필만 쥐고 있었다.

"너무 많아서 하나를 못 고르겠어?"

머뭇거리는 상희를 본 미환이 물었다. 상희 활동지의 장래 희망 칸은 텅 비어 있었다. 상희는 애꿎은 연필만 뗐다 붙였다 반복했다. 그러자 미환은 본인 책상 서랍에서 공책 하나를 꺼내더니 표지를 열고는 첫 장에 <잘해요 리스트>를 적었다.

"너가 잘하는 걸 하나씩 적어 보자! 그럼 고르기가 더 쉽지 않을까?"

상희가 무엇을 잘하냐면…. 신난 친구들이 미환 주변을 둘러쌌다. 그림 그리기, 밥 많이 먹기, 피아노 치기, 리코더 불기, 이야기 들어주기, 노래 부르기, 골 넣기, 바르게 글씨 쓰기. 끝이 없는 계주를 뛰듯 친구들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희는 그들의 바통을 이어받기는커녕 여전히 활동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턱을 손으로 받치고 심각한 결정이라도 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치, 뭐가 그리 어렵다고? 아무렇게나 하나 적어내면 되지."

나는 그런 상희가 배부른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잘하는 것도 하나 있을까 말까인데. 잘하는 것도 많으면서! 왁자지껄한 사이 상희의 특기를 적은 <잘해요 리스트>는 어느새 한 장이 꽉 채워지는 중이었다. 나는 내 활동지를 바라봤다. 텅 빈 장래 희망 칸이 유난히 하얘 보였다. '나는 잘하는 게 뭐지…. 내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열심히 친구들 말의 속도를 따라가며 움직이던 미환이 손을 멈췄다. 여기 있어, 미환은 <잘해요 리스트>를 상희에게 건넸다. 상희가 <잘해요 리스트>의 표지를 넘겼다. 미환의 땀에 젖은 종이는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고마워."

상희는 도로 표지를 닫아 옆에 내려놓았다.

"내가 읽어 줄까?"

미환이 묻자 상희는 고개를 저었다. 미환은 물음표가 가득 담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열심히 적었는데 읽어봐, 주변 친구들도 상희의 반응에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읽어볼게."

상희는 다시 턱을 괴곤 활동지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친구들의 특기 주고받기 경기는 드디어 끝이 난 듯했지만 그 누구도 행복해하지 않았다. '잘하는 게 너무 많아서 읽기 귀찮다, 이거지?' 잘난 체하는 상희가 잘하는 게 많다는 사실이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수업이 끝나기 오 분 전, 빈칸을 채워 넣고 우주비행사, 유튜버, 축구 선수, 소설가, 과학자가 된 친구들이 본인의 장래 희망을 자랑했다. 제 스타일대로 다양하게 입은 친구들의 옷이 꼭 유니폼처럼 보였다. 나는 비싼 카메라로 내 일상을 재밌게 찍어서 유튜브에 올릴 거야, 라며 미환이 자랑하자 맞아, 너는 말을 되게 잘하니까 100만 구독자는 금방일걸, 하며 친구들이 되받아쳤다. 그렇게 한 친구가 나는, 하며 소망을 말하면 다른 친구들은 맞아, 너는 잘하니까 하며 맞장구치기를 반복했다. 나는 여전히 지웠던 연필 자국만 가득한 칸을 바라봤다.

"뭐야, 상희 너 아직도 못 적었어?"

상희는 서둘러 활동지를 두 손으로 가렸다.

"학교 마칠 때 활동지 내야 하잖아. 그냥 <잘해요 리스트>에 있는 거 보고 아무거나 적어."

친구들이 다시 상희 주변에 동그랗게 모였다.

"싫어."

상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하는 게 너무 많아서 못 정하겠지?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상희의 대답을 듣지 못한 미환이 옆에 놓인 <잘해요 리스트>를 집어 들었다.

"너는 그림도 잘 그리고…."

"그만하라니까!"

상희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순간 반에는 정적이 흘렀다. 직업을 가졌던 친구들 모두 학생으로 돌아왔다.

"봐봐, 이상희가 잘하기는 무슨. 선택 하나도 잘 못하는데."

내 말을 들은 상희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벌써 빈칸을 채워 넣은 지 오래였다. 물론 '없음'이라고 적었지만. 상희를 에워싸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을 해주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래서 상희가 괘씸했다.

"너 부러워서 그러지!"

친구들이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봤다.

"아니거든!"

뜨끔했지만 더욱 당당하게 외쳤다.

"이상희 너도 없으면 없다고 자신 있게 적어!"

나는 활동지를 반 접어 서랍 깊숙이 넣었다. 상희는 활동지를 두고 반 밖으로 나갔다. 연신 점심시간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반 친구들은 서둘러 식판을 정리하고 지난주 다른 반과 약속한 '반 대항 축구 경기'를 하러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얼른 칫솔을 가져다 놓으러 반으로 들어갔다.

"너가 있어야 우리 반이 이긴단 말이야."

모두가 떠난 반에서 미환은 상희를 설득하고 있었다. 상희가 꼼짝도 하지 않자 꼭 나와야 해, 라는 애원을 남긴 채 미환은 반을 떠났다. 나는 모른 체 하며 사물함을 열었다. 아무렇게나 쌓아둔 교과서가 미끄러지며 세워놓은 양치 컵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소리를 들은 상희가 뒤돌아보더니 나인 걸 확인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 '치, 삐지기는.' 양치 컵은 자유를 만끽하기라도 한 듯 멈추지 않고 우당탕 굴러갔다. 곧 밖에서 친구들의 웃음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축구공을 차는 둔탁한 소리도 들렸다. 나도 바삐 교과서와 양치 컵을 사물함에 욱여넣었다.

반을 나서려고 하자, 고개를 푹 숙이곤 활동지를 적고 있는 상희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못 적었단 말이야? 이내 다른 반 친구들이 골, 이라고 외치는 함성과 응원가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나는 창문으로 뛰어가 점수표를 확인했다. 4 대 1, 무려 3점이나 차이가 났다. 또 졌대요, 또 졌대요, 라며 놀려댈 다른 반 친구들의 모습이 눈앞에 거슬리게 그려졌다.

조금 전 미환의 말이 떠올랐다. 맞아, 축구를 잘하는 상희만 있다면 역전은 식은 죽 먹기인데!

나는 조심스레 상희에게로 다가갔다.

"상희야, 오래 걸려?"

상희는 활동지를 품 안으로 더 숨겼다.

"아까는 내가 미안했어."

나는 상희의 장래 희망 칸을 흘끔 쳐다봤다. 무언가를 적은 자국도, 지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고민인 거야?"

상희는 아무 말하지 않고 연필만 쥐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어떻게 하면 저 빈칸이 빨리 채워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상희가 내 사과를 받아줄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나는 손을 뻗어 서랍 속 활동지를 꺼내 상희 옆에 앉았다. 들춰진 나의 부끄러움이 축구 경기를 승리로 이끌기만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꼭꼭 숨은 부끄러움이 아닌 명예로운 부끄러움이니까!

"봐봐, 나도 없어."

나는 '없음'이라고 적힌 장래 희망 칸을 가리켰다. 상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손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너처럼 잘하는 게 없거든. 어떤 걸 적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없다고 적었어. 너도 없으면 없다고 해."

나는 종이의 구겨진 자국들을 꾹꾹 눌려 반듯하게 펼쳤다. 상희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연필을 쥐고 있었던 걸 보니 무언가를 적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너는 잘하는 게 많으니까 나보다는 쉽겠지."

나는 책상 위에 그대로 놓인 <잘해요 리스트>를 펼쳤다.

"어디 보자, 너는 피아노를 잘 치니까 피아니스트 되면 되겠네."

"피아노 싫어."

"그럼 그림을 잘 그리니까 화가는 어때?"

상희는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든 거절하는 상희를 보니 점차 답답함이 차올랐다. 나는 크게 숨을 들었다 내쉬고 눈을 찔끔 감았다.

"그럼, 가수는?"

이번 질문에 상희는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동안 큼지막하게 적힌 <잘해요 리스트>를 응시했다. 열린 창문 틈으로 골! 환호성이 들려왔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나는 책상 위를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연필을 쥐어 <잘해요 리스트>에 적힌 특기 옆에 알맞은 직업을 적었다. 밥 많이 먹기 옆에는 먹방 유튜버, 이야기 잘 들어주기 옆에는 상담 선생님….

"사실 내가 이것들을 잘하는지 모르겠어."

상희가 울먹였다. 상희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 한 방울이 톡, 하고 활동지에 스며들었다.

"너가 얼마나 잘하는데! 친구들이 인정했잖아!"

상희의 눈물에 놀라 리코더 불기 옆에 엉뚱한 직업을 적고 말았다. 나는 지우개를 찾았다. 이내 공책을 뺏은 상희가 내용들을 모두 지우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지저분하게 지워진 종이가 더욱 쭈글쭈글해졌다. 내 활동지보다 더 엉망이었다. 상희는 더럽혀진 종이를 찢었다. <잘해요 리스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책도 새것 같아 보였다. 나는 도무지 상희가 이해되지 않았다. 잘하는 것도 많으면서, 주변에서 인정도 받으면서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잘한다고 칭찬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

머지않아 상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칭찬 안 받으면 어때. 가끔은 못할 때도 있는 거지."

"그게 무서워."

상희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소매에 눈물 자국이 진하게 남았다. 그러다 상희 옷에 묻은 깍두기 국물과 간장 소스가 눈에 들어왔다. 밥풀도, 고춧가루도 붙어 있었다.

"너는 깔끔하지 못하네."

상희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너는 너무 울음에 약해."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때, 기분 나빠?"

아니, 상희는 고개를 저었다.

"잘한다고 말하면 그래 나 잘한다! 하면 되고, 못한다고 말하면 그래 나 못한다! 하면 돼."

나는 공책의 새로운 면에 자랑스럽게 <못해요 리스트>를 크게 적었다.

"그리고 나는 못하는 게 더 좋은걸? 못한다는 건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잖아!"

나는 못하는 것들을 고민했다. 청소하기, 옷 개기, 달리기…. 어쩜 이리 쉽게 떠오르는지, 잘하는 것도 이렇게 많았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하나둘씩 적어 내려갔다. 이를 가만히 보던 상희가 공책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도 적어 볼래."

온종일 연필만 잡고 망설이던 상희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요리도 못하고, 악보도 못 외우고, 옷도 멋있게 못 입고…."

한 페이지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어느새 상희는 즐거운 표정으로 <못해요 리스트>를 써 내려갔다.

"이제는 내 차례야!"

우리를 둘러싼 친구들은 없었지만 그때만큼 시끌벅적했다. 언젠가부터 운동장의 친구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 선생님은 10년 뒤 본인의 모습을 그리는 활동지를 나눠주었다. 그날도 상희 주변에는 변함없이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친구들이 상희의 그림을 보며 역시나 상희야, 잘 그렸다며 칭찬했다. 그 틈을 비집고 상희는 종이를 들어 내게 보여줬다. 그림 속 상희는 하얀 유니폼에 가지각색의 소스가 묻은 요리사였다. 나도 내 활동지를 들어 보여줬다. 그림 속 나는 1등 메달을 목에 건 육상 선수였다. 육상 선수가 된 나와 요리사가 된 상희, 그림 속 우리는 정말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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