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지형·생활상·역사, 현재와 잇다

입력 2024.03.27. 19:52 김혜진 기자
마을문화원형의 재발견<8>광주 서구 뽕뽕다리
지난해 개통된 뽕뽕다리. 뽕뽕다리는 임동 방직공장과 서구 발산마을을 이어주던 다리로 당시의 산업사, 지역사가 숨어 있다.

더위가 슬 찾아올 무렵인 지난해 5월, 광주천 주변이 붐볐다. 평소 산책길로 애용되던 천변 산책로가 아닌 도로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북적인 이유는 50여년 만에 반가운 존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서구 발산마을과 임동 방직공장 사이를 이어주던 뽕뽕다리가 그 주인공.

뽕뽕다리는 지역 스토리텔링 자원으로도 이제는 유명하다. 방직산업이 호황을 이루던 1960년대 임동의 방직공장으로 전국 각지의 여공들이 일을 하기 몰려 들었는데 그 수가 많아 직원 기숙사로 감당하지 못하자 여공들이 비교적 방값이 저렴한 인근의 발산마을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임동과 발산마을을 이어주는 이 뽕뽕다리를 애용했다는 이야기다.

어려웠던 시절, 구멍이 '뽕뽕' 뚫린 옛 안전발판을 이용해 만든 다리는 지역 곳곳에 있었으나 강력한 스토리텔링이 덧붙여지며 발산마을-임동 뽕뽕다리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다리를 세운 주체나 가설 시기는 불분명하다. 방직공장 측이 발산마을에 거주하는 직원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전남도 산하기관이 가설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설시기도 불분명하나 여러 사료를 통해 추측할 수는 있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펴낸 '광주천'에 따르면 1964년과 1965년 사이에 가설된 것으로 추측된다. '광주시사'에 따르면 1964년 기준 뽕뽕다리를 '전방인도교'라고 소개하며 다리가 목조식으로 돼있다고 기록했으나 같은 책에서 1965년 기준으로는 '전방인도교'가 '구멍철재'로 돼있다고 소개한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옛 뽕뽕다리 사진 또한 김홍인 작가가 1967년에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멍이 뽕뽕 뚫린 다리는 통행 편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이힐을 신고 건너던 여성들은 힐이 구멍으로 빠져 걷기가 옹삭스러웠던 것은 물론이고 철판을 이어 만든 다리라 자전거가 지나갈 때면 다리가 크게 흔들려 주민들이 무서워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인근 주민들은 길을 멀리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에 이 뽕뽕다리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 통행 편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생활 편의에 도움을 준 다리이다.

임동과 발산마을을 연결해 주던 뽕뽕다리는 1973년 인근에 발산교가 들어서면서 점차 주민 사용이 줄어 들었고 1975년에는 홍수에 떠내려가 사라졌다.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회자되고, 결국 현대에 들어 이를 재해석한 뽕뽕다리가 다시 들어선 것은 다리라는 존재가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강력한 문화적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일제강점기 역사적 배경 아래 현재의 위치에 놓이게 된 부동교에는 역사 뿐만 아니라 지역 지형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처럼 뽕뽕다리는 지역 생활사, 산업사, 문화사에 걸쳐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다리들이 존재한다.

이 다리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 지역의 지형이나 생활상, 역사 등이 담겨 있다.

동명동의 동지교 또한 그렇다. 동지교는 농장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농장다리는 강이 아닌 철길로 분절된 동명동과 지산동을 이어주던 다리다. 현재는 폐선부지가 푸른길이 돼 철로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농장다리가 존재함으로써 과거를 회상할 수 있고 어렴풋이 상상해 볼 수 있다.

동지교란 이름을 두고 농장다리로 더 많이 불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971년 북구 문흥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광주교도소는 1912년부터 동명동에 자리했다. 이곳 재소자 중 모범수들은 노역을 하기 위해 현재 법원거리로 변화한 광주교도소 농장으로 걸어가곤 했는데 그때 건너다녔던 다리가 동지교다.

농장다리는 경전선 폐선 이후 2014년 철거하고 재가설했다. 폐선 부지에 생긴 푸른길에서 올려다 본 농장다리.

인근 주민들은 동지교라는 이름 대신 '재소자들이 농장으로 가기 위해 건넜던 다리'라는 뜻에서 농장다리라는 별칭을 주로 사용한 것.

복역수들이 이 다리를 건널 때면 아이들은 이들에게 말을 걸며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복역수들은 아이들에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 자신들이 지은 고구마나 무를 챙겨 던져주기도 했다 전해진다. 배고픈 시절 마을 아이들에게는 배를 채울 군것질거리를 선물 받는 장소로, 세상과 단절돼 복역했던 재소자들에게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장소로 기억되는 다리인 것이다.

이후 농장다리는 1979년 콘크리트 다리로 재가설했다가 경전선 폐선 이후 2014년 다리를 철거하고 도로시설 기준에 맞게 재가설했다. 철거와 재가설이 이어졌음에도 인근 주민들은 동지교라는 이름 대신 농장다리라는 별칭을 아직 사용하고 있다. 현재 인근 버스 정류장 이름 또한 주민에게 친숙한 '농장다리'를 사용하고 있다.

경전선 폐선 이후 2014년 철거하고 재가설한 농장다리 모습.

광주천 본류의 50여개 다리 중 부동교는 광주천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1933년 준공식을 가져 이때 준공된 것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발간한 '광주천'에 따르면 부동교의 당시 교명주 사진에서 1932년 12월 준공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 초 지어진 시설 가운데 광주 시내에 남아 있는 것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것을 생각하면 부동교는 광주천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부동교란 이름은 지역 지형과 관련한 의미를 갖는다. 이름인 부동(不動)은 인근 불로동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2004년 보강공사를 하기 전 부동교의 교명주. 김경수 향토지리연구소장 제공.

불로동은 일제강점기까지 '부동'으로 불렸다. 이곳은 광주천 물줄기를 바로 맞아야 하는 위치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석축제방을 쌓고 제방림을 심는 등 광주천 홍수를 막고자 했다. 이와 함께 동네 이름을 '부동(不動)'이라 지은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곳의 가설 위치 또한 일제강점기라는 역사가 숨어 있기도 하다. 위치상 상류의 금교와 하류의 광주교의 중간에 다리가 놓여야 적절했으나, 부동교를 가설할 당시의 사료를 살펴보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많이 사는 불로동, 황금동과 가까운 당시 유명 요정인 하루노야 일대에 다리를 가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정치적으로 힘이 센 일본인들의 주장에 따라 부동교는 지금의 위치에 세워지게 됐다.

1967년으로 추측되는 뽕뽕다리 모습. 뽕뽕 뚫린 구멍으로 여성들의 하이힐이 빠지는 등 건너기에 좋은 노면은 아니었으나 인근에 발산교가 생기기 전까지 인근 주민의 편의를 도왔던 다리다. 광주시 제공

전문가들은 다리에 대해 "다리는 기능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지형이나 지리, 역사, 생활상 등이 다리의 위치와 이름 등에 담겨 있다"며 "우리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다리가 하나의 건설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문화원형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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