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나루 겸한 지역민의 발
일제강점기 주민에 나눔 실천
마지막 뱃사공 박호련 사연도
극락교 아래엔 '벽진나루' 흔적
[문화원형 시리즈]④-광주 서구 서창동 서창나루
일제 강점기, 그의 집은 몹시 가난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빚까지 겹치면서 하루하루 살기가 빠듯한 지경이 됐다. 궁지에 몰린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야반도주였다.
타지에서 몇 해를 전전했는지 모른다. 그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몸은 몸대로 힘들고 마음까지 지쳐갔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던가. 그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향으로 향했다.
어느 해인가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지키던 사람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했던 그는 노를 잡기로 했다. 나루에서 뱃사공 일을 시작한 것이다. 뱃사공으로 물건을 싣고 사람을 나르며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채권자에게 빚을 갚아나갔다. 그는 뱃사공을 그만 둔 뒤로 서창마을 안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농토를 사들였고 다른 사업도 시작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제법 큰 재산을 모아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유지가 됐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의 형편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보릿고개를 넘으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아낌없이 쌀을 풀었다.
후에 서창나루에는 송덕비인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가 세워졌다. 2개의 비면엔 각각 4자(字)의 운문으로 네 구(句) 16자(字)가 새겨져 있다.
節食節用 아끼고 아껴서 남은 것이 있는 줄 알면
剩知救貧 가난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네
恩深於海 깊고 깊은 은혜가 바다와 같고
德高於山 그 높은 덕은 산보다 높다네.
[1925년 2월 서창면 공립(共立)]
飢思若己 남의 굶주림을 자기 일로 여겨
傳施恤貧 여기저기 나눠주어 가난한 이 구제했네
萬口咸誦 모든 사람들이 입모아 칭송하니
遺德日新 남기신 덕 날로 새로워라.
[1929년 11월 서창면 일동]
1925년과 1929년 세워진 두 개의 송덕비는 고을을 다스리는 이들을 대상으로 것이 아니라 평범한 뱃사공을 서창민들이 직접 기리는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더욱이 4년을 거치면서 두 개를 잇따라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박호련이 지역민들에게 많은 나눔을 실천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호련은 경찰파술소 앞에 있는 비석의 주인공이다. 징그럽게 가난하던 시절에 그 양반이 명태 열 마리, 곡식 몇 되씩인가를 서창면 전체에 돌렸다고 한다. 그래서 서창면 사람들이 비석을 세웠다. 그 때문에도 아무도 그 비석을 뜯어낼 수가 없다. 그때 도와준 것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 양반은 원래 나룻배를 부렸는데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는 모른다. 부자였을 때는 천석꾼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뱃삯을 모아 돈을 벌었을 것이다.'
지난 2019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광주 서창, 기억의 풍경' 중 '서창사람들이 기억하는 서창'에 담긴 내용이다.
서창나루의 송덕비들은 처음 나루터 근처에 세워졌으나 1974년 서창치안센터 맞은 편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눈에 띄게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아 무심코 지나치면 보이지 않는 곳이다.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삶처럼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제 색을 잃은 모습만이 세월의 더께를 말해줄 뿐이다.
박호련이 세상에 알려진 배경에는 광주 서구문화원의 노력이 있었다. 서구문화원은 박호련의 행적을 1년여 간 조사한 끝에 1930년 1월 22일자 '중외일보' 4면에 실린 박호련의 미담 기사를 찾았다. 당시 보도는 '희세(稀世)의 자선가 박호련씨 기념비, 광주 서창면 12구민 감사루의 결정으로'라는 제목 아래 사진과 함께 기사가 게재됐다. 중외일보는 1926년 11월 15일 이상협이 창간했다가 1931년 9월 2일 폐간한 일간신문이다.
박호련이 마지막 뱃사공으로 일한 서창나루는 광주 서구 서창동에 있다. 서창(西倉)은 '서쪽에 있는 창고'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광주는 동창(東倉)과 함께 두 개의 세곡 창고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세곡창고가 들어선 것은 물류 때문이었다. 광주읍으로 들어가는 육로인데다 세곡이나 소금, 어류를 실어 나르던 바닷길과 이어지는 곳이었다. 나주와 송정리 등지에서 광주로 들어오거나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목이기도 했다.
특히 서창나루의 의미가 큰 것은 나루와 포구의 기능을 겸했기 때문이다. 나루터는 강이나 내에서 작은 배가 건너다니는 다리의 기능을 하는 곳이고, 포구는 물길을 따라 이동하며 드나드는 배의 정류장 같은 곳이다. 창고가 강변에 설치된 것은 나주와 서창나루 사이에 배가 왕래했음을 알려준다. 서창에 모인 곡식들은 한양으로 실려 가거나 백성을 구휼하는 용도로 쓰였다. 특히 이곳은 나주 북문거리와 광주 서문거리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나루였다. 한 때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던 탓에 배로 모두 실어나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한 때는 잘 나가는(?) 나루였지만 현재 서창나루는 위치만 확인될 뿐이다. 영산강 신서창교 아래에 자리했던 표지판은 지난해 7월말 정비사업이 시행되면서 철거됐다. 인근에 작은 주차장이 조성돼 있고, 쉼터와 벤치도 놓여 있어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영산강 종주 자전거길을 달리는 라이더들의 중간 휴식처로도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서창나루에 대한 인식은 저조한 편이다. 굳이 배를 이용할 필요도 없이 도로와 도로를 튼튼한 다리가 잇고 있기 때문이다.
서창나루와 가까운 광주~송정간 극락교 아래에는 벽진나루가 있다.
벽진나루는 과거 영산강을 기준으로 동쪽의 광주 관아와 서쪽의 전라병영을 연결하는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영산강 종주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극락교를 중심으로 자전거안내센터와 체육시설, 어린이 놀이시설 등이 배치돼 있지만 벽진나루는 주차장 앞 '종합시설안내' 표지판에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옆에 선 이정표에는 '서창나루 3.6㎞'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나루터가 사라진 계기는 교통망의 발달에 있다. 1910년대 철도역을 근간으로 송정리가 광주의 관문으로 부상하면서 송정리와 광주 시내를 잇는 신작로가 놓여졌고 이때 어지간한 홍수에는 쉽게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가 가설됐다. 다리가 놓이면서 나루터를 찾는 발길이 줄어들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배와 함께 점차 잊혀져갔다.
오늘날 과거 주민들의 중요한 이동수단이었던 서창나루와 벽진나루는 사라졌지만 극락강의 역사와 그곳에 기대 삶을 이어갔던 선인들의 숨결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 광주시립창극단 '정년이'가 들려주는 휴먼 드라마 광주시립창극단이 '단막 창극 광한루'를 연습하고 있다. "남장은 물론이고, 1인 9역까지 해봤던 적도 있어요. 옷을 계속 갈아입어야 되는게 힘들지만 너무 재밌더라고요. 창극 무대가 아니라면 제가 어디서 이 사람으로 살아보겠어요."한국전쟁 후 여성 국극단을 배경으로 단원들의 경쟁과 우정을 그려내며 감동과 웃음을 선사한 드라마 '정년이'가 최근 인기리에 종영했다. '정년이'의 흥행 여파로 국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실제 무대에서 기량을 뽐내고 있는 광주시립창극단 단원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광주시립창극단 창악부 김정미 단원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정년이'를 보며 마치 자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학 졸업 후 곧장 창극단원으로 활동하며 적벽가의 '군사', 흥보가의 '놀부처'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던 그는 드라마 속 국극단원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와닿았다.광주시립창극단이 '단막 창극 광한루'를 연습하고 있다.김씨는 드라마를 감상하며 공연 장면의 높은 싱크로율에 특히 놀랐다고 한다. 그는 "장면 하나하나가 진짜 창극 무대를 옮겨놓은 것 같았다"며 "하지만 정년이 같은 캐릭터가 실제로 있다면 다른 단원들에게 질타를 받을 것 같다. 실력을 떠나 창극은 함께 만드는 무대라 팀워크가 상당히 중요한데, 연습에 자주 늦으면 주연은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웃었다.광주시립창극단이 '단막 창극 광한루'를 연습하고 있다.그는 고등학생 시절 처음 판소리를 접하고 우리 음악에 매료돼 대학에서 전공까지 하게 됐다. 그는 대학생 때 처음 창극 무대에 서며 느꼈던 설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김씨는 "내가 평소에 살아볼 수 없던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창극의 장점을 설명했다. 창극에서 연기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정년이'를 통해서였다.그는 "지금까지는 창극을 하며 '소리'를 가장 많이 신경 썼던 것 같다"며 "창극은 소리, 연기, 몸짓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안 되면 몰입이 깨지는데, 드라마 속 '문옥경'이라는 캐릭터의 연기력이 출중해 특히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광주시립창극단이 '단막 창극 광한루'를 연습하고 있다.광주시립창극단에서 25년여간 함께해 온 방윤수 차석단원 역시 드라마 덕분에 젊은 사람들까지 창극을 알게 된 것 같다며 '정년이 효과'를 전했다. 그는 “고흥 출신 선배께서 어릴적 여성국극단을 보셨을 때 당시 국극단원들의 의상이 일반 가수보다도 훨씬 화려했고 인기도 많았다고 얘기해주셨던 적이 있다”며 “고등학생인 딸도 ‘정년이’를 보고 창극이 정말 저렇게 인기가 많았냐고 묻기도 했다”고 미소 지었창극단원들이 정기공연을 한 번 올리기 위해서는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까지의 연습 기간을 갖는다. 60여 명의 단원들이 무대에 올라 하나가 돼 호흡하기 위해서는 동선 하나하나 조율하는 세심함이 필요하다.광주시립창극단의 '여울물 소리' 공연 모습하지만 그는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들고 작품성이 뛰어난 무대들이 줄어들며 창극이 점점 외면받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소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방씨는 "마당판에서 벌어졌던 판소리가 각각의 배역으로 나뉘어 창극으로 발전했고, 매체가 들어오며 창극이 쇠퇴할 때 새로운 바람을 모색하기 위해 여성 국극이 유행했다"며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창극이 나타났기 때문에 앞으로 전통 판소리를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방향에 맞춰 지속적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광주시립창극단의 '천변만화' 공연 모습광주시립창극단은 1989년 6월 1일 광주시립국극단으로 창단해 2018년 광주시립창극단으로 개명했다. 창단 이래 수궁가와 흥보가, 심청가 등 전통 창극을 비롯해 쑥대머리, 의병장 고경명, 안중근 등 다양한 창극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한편 광주시립창극단은 오는 14일 오후 3시 광주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기획공연 '송년 국악 한마당'을 선보인다. 이날 공연에서는 20여 년 만에 여성 단원이 이몽룡과 방자 역을 열연하는 '단막 창극 광한루' 무대를 만나볼 수 있다. 티켓은 S석 2만원, A석 1만원으로 광주예술의전당 누리집을 통해 예매할 수 있다.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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