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강 나루터에 담긴 서민 삶과 애환 엿보다

입력 2024.02.28. 17:37 김만선 기자
바닷길 이어진 서쪽의 창고
포구-나루 겸한 지역민의 발
일제강점기 주민에 나눔 실천
마지막 뱃사공 박호련 사연도
극락교 아래엔 '벽진나루' 흔적
광주 신서창교 아래에 위치한 서창나루. 서창나루 표지판은 지난해 7월말 철거됐다.

[문화원형 시리즈]④-광주 서구 서창동 서창나루

일제 강점기, 그의 집은 몹시 가난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빚까지 겹치면서 하루하루 살기가 빠듯한 지경이 됐다. 궁지에 몰린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야반도주였다.

타지에서 몇 해를 전전했는지 모른다. 그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몸은 몸대로 힘들고 마음까지 지쳐갔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던가. 그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향으로 향했다.

어느 해인가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지키던 사람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했던 그는 노를 잡기로 했다. 나루에서 뱃사공 일을 시작한 것이다. 뱃사공으로 물건을 싣고 사람을 나르며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채권자에게 빚을 갚아나갔다. 그는 뱃사공을 그만 둔 뒤로 서창마을 안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농토를 사들였고 다른 사업도 시작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제법 큰 재산을 모아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유지가 됐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의 형편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보릿고개를 넘으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아낌없이 쌀을 풀었다.

후에 서창나루에는 송덕비인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가 세워졌다. 2개의 비면엔 각각 4자(字)의 운문으로 네 구(句) 16자(字)가 새겨져 있다.

節食節用 아끼고 아껴서 남은 것이 있는 줄 알면

剩知救貧 가난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네

恩深於海 깊고 깊은 은혜가 바다와 같고

德高於山 그 높은 덕은 산보다 높다네.

-1950년대 서창교. 김경수 향토지리연구소장 제공.

[1925년 2월 서창면 공립(共立)]

飢思若己 남의 굶주림을 자기 일로 여겨

傳施恤貧 여기저기 나눠주어 가난한 이 구제했네

萬口咸誦 모든 사람들이 입모아 칭송하니

遺德日新 남기신 덕 날로 새로워라.

광주 서창치안센터 맞은편에 위치한 박호련 시혜불망비.

[1929년 11월 서창면 일동]

1925년과 1929년 세워진 두 개의 송덕비는 고을을 다스리는 이들을 대상으로 것이 아니라 평범한 뱃사공을 서창민들이 직접 기리는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더욱이 4년을 거치면서 두 개를 잇따라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박호련이 지역민들에게 많은 나눔을 실천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호련은 경찰파술소 앞에 있는 비석의 주인공이다. 징그럽게 가난하던 시절에 그 양반이 명태 열 마리, 곡식 몇 되씩인가를 서창면 전체에 돌렸다고 한다. 그래서 서창면 사람들이 비석을 세웠다. 그 때문에도 아무도 그 비석을 뜯어낼 수가 없다. 그때 도와준 것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 양반은 원래 나룻배를 부렸는데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는 모른다. 부자였을 때는 천석꾼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뱃삯을 모아 돈을 벌었을 것이다.'

중외일보 1930년 1월 22일자 4면 보도된 박호련 관련 기사. 광주서구문화원 제공.

지난 2019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광주 서창, 기억의 풍경' 중 '서창사람들이 기억하는 서창'에 담긴 내용이다.

서창나루의 송덕비들은 처음 나루터 근처에 세워졌으나 1974년 서창치안센터 맞은 편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눈에 띄게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아 무심코 지나치면 보이지 않는 곳이다.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삶처럼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제 색을 잃은 모습만이 세월의 더께를 말해줄 뿐이다.

일제강점기 주민에 나눔을 실천한 박호련. 광주서구문화원 제공.

박호련이 세상에 알려진 배경에는 광주 서구문화원의 노력이 있었다. 서구문화원은 박호련의 행적을 1년여 간 조사한 끝에 1930년 1월 22일자 '중외일보' 4면에 실린 박호련의 미담 기사를 찾았다. 당시 보도는 '희세(稀世)의 자선가 박호련씨 기념비, 광주 서창면 12구민 감사루의 결정으로'라는 제목 아래 사진과 함께 기사가 게재됐다. 중외일보는 1926년 11월 15일 이상협이 창간했다가 1931년 9월 2일 폐간한 일간신문이다.

박호련이 마지막 뱃사공으로 일한 서창나루는 광주 서구 서창동에 있다. 서창(西倉)은 '서쪽에 있는 창고'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광주는 동창(東倉)과 함께 두 개의 세곡 창고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세곡창고가 들어선 것은 물류 때문이었다. 광주읍으로 들어가는 육로인데다 세곡이나 소금, 어류를 실어 나르던 바닷길과 이어지는 곳이었다. 나주와 송정리 등지에서 광주로 들어오거나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목이기도 했다.

특히 서창나루의 의미가 큰 것은 나루와 포구의 기능을 겸했기 때문이다. 나루터는 강이나 내에서 작은 배가 건너다니는 다리의 기능을 하는 곳이고, 포구는 물길을 따라 이동하며 드나드는 배의 정류장 같은 곳이다. 창고가 강변에 설치된 것은 나주와 서창나루 사이에 배가 왕래했음을 알려준다. 서창에 모인 곡식들은 한양으로 실려 가거나 백성을 구휼하는 용도로 쓰였다. 특히 이곳은 나주 북문거리와 광주 서문거리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나루였다. 한 때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던 탓에 배로 모두 실어나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광주 서구 극락교와 영산강 종주 자전거길.

한 때는 잘 나가는(?) 나루였지만 현재 서창나루는 위치만 확인될 뿐이다. 영산강 신서창교 아래에 자리했던 표지판은 지난해 7월말 정비사업이 시행되면서 철거됐다. 인근에 작은 주차장이 조성돼 있고, 쉼터와 벤치도 놓여 있어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영산강 종주 자전거길을 달리는 라이더들의 중간 휴식처로도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서창나루에 대한 인식은 저조한 편이다. 굳이 배를 이용할 필요도 없이 도로와 도로를 튼튼한 다리가 잇고 있기 때문이다.

서창나루와 가까운 광주~송정간 극락교 아래에는 벽진나루가 있다.

벽진나루는 과거 영산강을 기준으로 동쪽의 광주 관아와 서쪽의 전라병영을 연결하는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영산강 종주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극락교를 중심으로 자전거안내센터와 체육시설, 어린이 놀이시설 등이 배치돼 있지만 벽진나루는 주차장 앞 '종합시설안내' 표지판에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옆에 선 이정표에는 '서창나루 3.6㎞'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벽진나루 위치는 주차장 앞에 설치된 종합시설 안내 표지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루터가 사라진 계기는 교통망의 발달에 있다. 1910년대 철도역을 근간으로 송정리가 광주의 관문으로 부상하면서 송정리와 광주 시내를 잇는 신작로가 놓여졌고 이때 어지간한 홍수에는 쉽게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가 가설됐다. 다리가 놓이면서 나루터를 찾는 발길이 줄어들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배와 함께 점차 잊혀져갔다.

오늘날 과거 주민들의 중요한 이동수단이었던 서창나루와 벽진나루는 사라졌지만 극락강의 역사와 그곳에 기대 삶을 이어갔던 선인들의 숨결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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