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조사 순국 의병만 1만3천명
의병계열 독립유공자 전체 15%
박사화 등 남도의병장들 사진 공개
처형 기록 담긴 '통감부래인' 입수
미서훈자 많아 정부 차원 관심 필요
30만 의병 독립투쟁은 유례 없는 일
남도 의병사령부 영암 연구 절실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⑬이태룡 강연- 영암 의병 투쟁
한말 항일투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영암 의병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남도 의병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영암은 항일의병투쟁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지만, 이곳에서 활약한 영암 의병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영암 의병의 상당수는 여전히 미서훈 독립유공자로 남아 있다.
'일제침략기 영암의 의병투쟁'을 주제로 한 대중강연이 지난 23일 오후 영암문화원 공연장에서 열렸다.
남도 의병 학술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번 강연은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이 강사로 나섰다.
이태룡 소장은 국내에서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35년 넘게 의병과 독립운동사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2020년 4월 출범한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국내 대학 최초로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기 위해 운영되고 있는 연구소다.
이태룡 소장은 연구 책임자로서 2019년부터 2020년까지 4번에 걸쳐 독립유공자 2천60명을 발굴해 국가보훈처에 서훈신청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의병사 상·하',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1~4', '우리의 역사, 이것이 진실이다', '민족지도사 석주 이상룡' 등 27종 38권의 저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저술했다
최근에는 일제강점기 호남지역에서 의병투쟁이 절정기였던 1908년 가을 호남의병단의 결성 과정을 담은 '일제침략기 호남동의단 결성 전후 66인의 호남의병장' 책을 출간했다.
이태룡 소장은 이날 강의에서 "외세가 침략했을 때마다 나라를 구한 것은 의병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소장은 "1907년 10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이후 본격화된 의병 투쟁에 맞서 일본군 정규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됐다"며 의병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 규모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용산에 주차한국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용산은 임오군란 후 청군이 조선에 들어와 처음 주둔한 곳이다.
사령부 산하 남부수비관구에는 보병 2·14·47연대와 한국파견기병대가 있었고, 북부수비관구에는 보병 13·23·27·45·64연대와 기병 6연대, 야포병 6연대, 공병 6대대가 있었다. 특히 북부수비관구에 포병대가 있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또한 1907년 7월에는 경남 진해만에 중포병대대를, 1909년 6월에는 남부수비관구에 14연대 대신 보병 제12여단과 보병 3연대를 영남에, 보병 1연대를 호남에 배치했다.
의병 진압으로 인한 사상자 규모는 1만명을 웃돌았다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한국주차일본군사령부, 즉 일본군 조사에 의하면 순국한 의병은 1만3천445명"이라면서 "그런데 국내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의병이 7천717명에 그친다. 이는 전체 서훈자의 15.2% 수준으로, 일본군 통계와 비교해 본다면 매우 적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공개한 독립유공자 본적지별 현황에 따르면 경상도가 3천917명으로 가장 많고, 전라도가 2천621명으로 그 뒤를 잇는다. 이어 평안도 2천369명, 충청도 2천266명, 미상 1천550명, 경기도 1천441명, 함경도 1천388명, 황해도 830명, 강원도 642명, 서울 531명 등 순이었다.
이 중 전라도는 후손이 끊어지거나 서훈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 실제 독립유공자 수보다 적을 것이라는 게 이 소장의 의견이다.
등급별 의병 공적 포상자는 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3명(이강년, 최익현, 허위), 2등급 건국훈장 대통령장 14명(문태수, 이인영, 전해산 등), 3등급 건국훈장 독립장 165명(고광순, 김태원, 서병희 등), 4등급 건국훈장 애국장 1천407명(강사문, 백운하, 서두성 등), 5등급 건국훈장 애족장 794명(강대여, 김영엽, 서상룡 등), 6등급 건국포장 238명(김병주, 김학수, 양방매 등), 7등급 대통령표창 96명(김공서, 유해용, 하천일 등)이다.
이 소장은 의병 연구과정에서 발굴한 귀중한 사진과 자료도 공개했다.
사진 중에는 광주감옥에 투옥된 남도 의병장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있었다. 나주의병의 전설이 된 박사화, 영암 의병 양방매의 남편 강무경, 호남의소 사령관 심남일 등 귀에 익은 얼굴이 이름과 나와 있었다.
이 소장은 "광주감옥에 투옥된 의병장들의 사진은 제가 일본에서 직접 찍은 원본이다. 여러 매채 등을 통해 공개된 사진과 달리 원본에는 사진 아래 부분에 한자로 의병장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면서 "사진을 자세히 보면 의병장들 옆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감옥에서 찍힌 사진으로 추청된다"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 통감부로부터 대한제국 의정부에 보내온 문서들을 담은 책 '통감부래안'이 있다고 했다.
그는 "통감부래안을 직접 입수해 처음 공개한 뒤 번역을 마쳤다. 이 책에는 처형 기록이 남은 의병·의병장 중 미서훈자가 많았다"면서 "국가보훈처에 이들 미서훈자의 서훈을 촉구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어 "서훈을 받으려면 제적등본이 필요하지만 후손이 없거나 일제 치하의 호적을 정리하지 않은 경우에는 서훈을 받을 수 없었다"며 "지금과 같이 후손들에게 서류를 받는 소극적인 자세로 서훈하지 말고 보훈처나 각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의병을 찾아 공적을 서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벌여 의병을 학살했다. 이름 없는 의병은 즉결 처분하고 공적을 내세울 만한 의병장 등은 재판에 부쳤다"면서 "100여 년 전 30만명 넘는 의병이 국권 회복을 위해 싸운 것은 세계사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서훈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영암 출신이거나 영암에서 활동한 의병으로 분류돼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인원은 14명에 불과하다"면서 "현재 전남도에서 실시하고 있는 미서훈자 발굴 용역 사업을 통해 의병 부문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의병 관련 자료를 묶으면 12권 이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강연에는 김한남 영암문화원장과 최기욱 전 영암향교 전교, 이영현 영암학회 회장을 비롯해 군민들이 참석했다.
이관우기자 redkcow@mdilbo.com
- 들불처럼 일어난 남도 의병, 목숨 바쳐 일제에 맞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전선에 앞장서 왔다. 사진은 조선 오란(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인좌의 난)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호남 의병 2천143위를 기리는 충의사 호국충혼탑.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⑮끝·에필로그?지난 7월 25일 광복회 전남지부 회원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백두산(중국 장백산)이 천지와 간도 일대를 답사했다. 천지 비경을 보는 것은 날씨가 예측 불허해 운이 따라야 했다.올라가는 데 비가 쏟아지더니 천지를 보려고 할 때 구름이 살짝 걷히며 비경을 살포시 드러냈다. 신비로웠다. 단군신화가 떠올랐다.천지 올라가는 낡은 지프를 타려고 무려 2시간 넘게 줄을 섰다. 평일인데도 수만 명이 몰려 있었다. 충격이었다.대한민국 국민은 우리 팀 말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말 안내판도 없다. 이상하다.중국인에게 장백산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몰렸을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조선족 출신 가이드에게 물었다. 2007년 무렵부터였다고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 측이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할 때이다.천지 입구에 영상물 상영하는 공연장이 있었다. 백두산의 사계(四界)를 소개하는 데 천지에 말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중국 역사를 열었음을 웅장하며 신비롭게 묘사했다. 이른바 장백산에서 중국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단군국조는 어디로 가야 할까. 역사가로서 느낀 자괴감은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의 토대이다. 정체성을 잃은 민족은 존립의 근거가 없다.1907년 8월 1일 일제는 기습적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해 국권 침탈을 노골화했다. 서울 시위대 박승환 대대장은 부대 해산명령 대신 자결을 통해 부하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서울 시위대, 지방 진위대 등 자랑스런 대한제국 군인들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의병봉기가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다. '13도 창의군'이라 해 1만명 이상으로 구성된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일본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남도 의병장들이 광주감옥에 투옥됐다.남도 의병은 1907년 가을부터 1909년 10월까지 만 2년 동안 일본군과 400차례 가까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거의 이틀에 한 차례 전투가 치러진 셈이다.1909년 통계를 보면 남도 의병이 전국 의병 봉기의 60%를 차지했다. 일본이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의병들을 쉽게 격파하지는 못했다. 비록 화승총으로 무장해 일본군과 정상적인 전투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치렀다.일본의 식민통치 야욕을 그만큼 늦추게 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런 남도 의병의 모습을 잘 모르고 있다. 서훈자는 전국 통계의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이는 후손이 끊어졌거나 개인이 공적을 입증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더라도 전국 의병의 60%를 차지한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음을 알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에 전남도는 전국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유일하게 미서훈 독립유공자를 찾는 일을 시작했다. 3·1운동 관련 미서훈자를 찾는 1단계에 이어 1895년 의병계열부터 1945년 해방 순간까지 우리 지역에서, 우리 지역 출신들이 국내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사를 발굴하는 2단계 용역이다.2022년 10월부터 시작된 이 용역은 11월 15일 기준 의병계열 795명을 포함해 2천300여 명에 달하는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의병계열은 그 공적을 입증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다. 적어도 150명 남짓 서훈 신청이 가능하리라 본다. 60년 넘게 333명 서훈 신청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이다.남도 의병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는 노력도 부족했다. 일본이 편의상 분류한 이른바 '거괴(巨魁)'라 불렸던 심남일, 김태원 형제, 고광순, 안계홍 등 몇몇에 국한해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남도를 빛낸 많은 의병의 전적이 드러나지 않았다.예컨대 고흥 팔영산 만경암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고흥 의병 120명, 구체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수형인 명부가 있는 보성 의병,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의 주력을 형성한 어쩌면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를 형성한 영암의병 등의 존재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특히 완도, 진도, 신안 등 남도의 많은 섬 지역에서도 의병들의 활동도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형 군함까지 파병한 일본군은 때로는 해상에서 함포 사격까지 가하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남도 곳곳에서 전개된 의병들의 활약상을 그동안 피상적으로 살펴 남도 의병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일본군과 싸워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는 위대한 의병전쟁을 의병운동으로 성격을 짓거나 연합 의진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분산돼 활동해 항전이 실패했다는 주장이 그 예이다.어등산은 김준·조경환·김원범 의병장 등을 포함한 한말 의병이 최소한 50여 명이 전사한 격전지다. 사진은 한말 의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대한제국기 남도 의병은 당시 세계 최강 일본군과 2년 넘게 최후의 1인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장렬하게 옥쇄(玉碎)를 택했다. 그리고 그 의병 정신이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이러함에도 한말 남도 의병의 활동을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이러한 문제 의식을 토대로, 무등일보는 그동안 살피지 못한 의병의 실체를 추적한 특별기획 연재를 했다. 보성 의병을 개척한 정태화, 나주 의병을 상징한 송석래·최택현, 연합의진의 상징 김치홍, 작전의 귀재 권영회, 조직의 귀재 유병기 그리고 고흥 의병을 이끈 신성구 등 새로운 의병 열전을 만들었다. 남도 의병의 스토리가 훨씬 풍부해지고, 성격 규명도 보다 분명해졌다.기획연재와 더불어 대중강연을 통해 남도 의병의 활약상을 널리 알렸다. 국내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은 남도 의병의 핵심을 형성했으나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영암 의병의 의의를 심층적으로 설명해 지역민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학술포럼을 통해선 영암 의병의 실체를 밝혔다. 을미의병에서 남도 의병의 역할을 밝힌 장우순 박사, 그리고 해상 의병의 실체를 밝힌 신혜란 박사의 글 등은 그동안 학술포럼에서 쉽게 접하지 않은 주제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포럼에서 얻은 성과였다.남도 의병의 실체 규명, 빛나는 항전을 전개한 새로운 주역 발굴 및 이들의 활동이 지닌 역사적 의미까지 소개함으로써 역사의 대중화에 한걸음 더 다가간 결과였다. 앞으로도 남도 의병은 우리 민족사를 비추는 존재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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