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망명·연금·납치…시련의 연속
80년 사형선고…세계인사 구명 운동
97년 대통령 당선, 첫 여야정권 교체
'작고 효율적 정부' 천명 행정 개혁
IMF 한파 극복 위해 벤처 육성 주력
6·15남북 공동선언…개성공단 가동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 믿었다"
김대중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민주화운동까지 굴곡진 우리나라 근현대사 만큼이나 그의 삶도 굽이쳤다. 한국전쟁 당시 죽을 고비를 눈 앞에서 넘긴 그는 이념을 떠나 민주주의가 꽃피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정계에 투신한 이후로도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 간 감옥에 있었으며 수십 년 동안 망명과 연금 생활을 했다. 정치인으로서도 쉬운 길을 걷지 못했다. 국회의사당에 앉기까지 9년, 197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렸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생을 돌아본다.
◆외딴 섬 소년, 바다를 건너다
1924년 1월 신안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36년 목포로 이사해 목포공립제일보통학교와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경영인으로 살아가던 그는 1945년 4월에는 첫 아내 차용애와 결혼한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사업 차 서울에 출장 중이던 그는 20일을 걸어 목포로 돌아왔다. 돌아온 지 얼마 안돼 그는 대한청년단 소속이라는 이유로 인민군에 끌려가 목포형무소에서 총살 직전 살아남는다. 목포에서 다시 해운업을 시작한 김대중은 1951년 사업기반을 부산으로 옮겼다가 정치에 뛰어들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이승만이 재집권하기 위해 직선제 개헌안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키려 한 부산정치파동을 겪으면서다.
"반공이란 이름으로 독재 정권을 연장하는 친일파와 그 동조자들의 야욕을 똑똑히 지켜봤다. (중략) 나는 국민을 섬기는 참다운 민주주의가 아니면 국민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파란만장한 정치 생활의 시작
1954년 목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했으나 관권의 선거 개입으로 패한 후 1955년 서울 남영동으로 이사한다. 민주당 소속으로 1958년과 1959년 강원도 인제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궐선거까지 두 번의 고배를 마신다. 세 번의 낙선으로 김대중은 재산을 모두 잃었으며 아내 차용애 마저 병사한다.
이승만은 하야 후 1960년 7월 새 헌법에 따라 진행된 국회의원 선거에 나간 김대중은 인제에서 또 한 번의 고배를 마셨으나 총리로 선출된 장면 내각에서 대변인으로 발탁돼 활약한다. 이듬해 인제군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김대중은 선거판에 뛰어든 지 7년 만에 승리를 쟁취한다.
기쁨도 잠시, 의원 등록 직후 쿠데타가 발생해 국회는 해산되고 만다. 1962년 김대중은 이희호를 아내로 맞는다. 결혼한 지 열흘 만에 그는 '반혁명' 죄목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한 달 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났으나 정치활동금지 대상이 돼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한다.
1963년 정치활동금지에서 해제된 그는 옛 동지들과 민주당을 재건했고 4월엔 동교동에 집을 마련했다. 11월 그는 고향 목포에서 당선돼 재선 의원이 됐다.
1964년 김준연 공화당 의원 구속 동의안 상정을 저지하기 위한 필리버스터를 5시간 19분 동안 펼쳐 기네스북에 국회최장발언시간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해 정무위원이자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한 번 당선된다. 이어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가 됐으나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박정희에 졌다.
1971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신민당 후보들을 돕기 위해 전국으로 유세를 다니던 그는 의문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공화당의 계략으로 8톤 트럭이 그가 탄 차를 덮쳐 김대중은 크게 다쳤으나 유세를 계속 이어나갔고 이 사고로 인한 후유증은 그의 일생을 따라다녔다.
◆망명과 납치, 사형 선고와 두 번째 망명
1972년 10월, 교통사고로 좋지 않던 고관절 치료를 받기 위해 일본에 머물던 김대중이 귀국하기 이틀 전, 박정희가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독재 서슬 아래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어렵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나라 밖에서 투쟁할 것을 결심한다.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언론에 기고를 하고 인터뷰 등에 응했다. 집회, 강연에 참여해 한국의 독재에 대해 까발리는 등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73년에는 반독재 투쟁을 이끌 구심체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미국에서 결성하기도 했다. 이어 일본에서도 한민통을 결성한 그는 1973년 8월8일 일본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납치 당한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박 정권은 그를 살해하려던 목적으로 납치했으나 국제 사회에 이 같은 행적이 곧바로 밝혀지자 살해하지 못하고 그를 동교동 집 앞에 풀어준다. 이후 김대중은 가택연금을 당해 약 6년 동안 삼엄한 감시 속에 살게 된다.
1976년 3월1일 그는 재야민주지도자들과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다. 진주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1977년 12월 서울대병원으로 이감돼 창문이 봉쇄된 특별감옥서 접견은 물론 운동과 서신이 금지된 채 보낸다. 이후 1978년 12월 2년 10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또다시 장기 가택연금을 당한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살해 당한 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김대중도 226일 만인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됐다. 1980년 2월 29일에는 그를 비롯한 재야인사에 사면·복권 조치가 내려졌다.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안을 통과시키며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이날 저녁 김대중은 사회혼란과 학생, 노조 배후 조종 혐의로 연행된다.
8월27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이 되고 결국 김대중은 9월17일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이 소식은 국제 사회에 알려지며 이슈가 됐고 세계 지도자, 해외 교포 민주화운동 인사들은 구명 운동을 펼쳤다. 이후 1981년 1월 무기징역으로, 1982년 3월 20년 형으로 감형된다. 전두환은 그의 정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신병 치료를 명목으로 1982년 12월 말 형 집행 정지로 그를 석방하고 미국으로 보낸다.
미국에서 그는 교회와 대학에서 연설을 통해 한국의 실상을 알리며 민주화 투쟁을 벌인다. 이후 귀국하면 다시 투옥시킬 것이라는 전 정권의 협박에도 그는 그의 암살을 걱정한 미국 저명 인사들의 동행과 함께 1985년 2월 귀국했다. 귀국 즉시 자택에 압송된 김대중은 또다시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그는 이후로도 1987년까지 55차례의 가택 연금을 당한다.
◆돌고 돌아 청와대에
1987년 그는 김영삼과 후보단일화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다. 1988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이 됐다.
1992년 김대중은 민주당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으나 지역감정과 색깔론을 이용한 흑색선전에 그는 또다시 패배의 눈물을 삼켰다. 그는 대선 직후 정계 은퇴 선언을 한다.
이듬해 1월 영국으로 떠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하다 학기가 끝나고 점차 경색되는 남북, 북미 관계를 개선하고자 7월 귀국한다. 1994년 말 그는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아태재단)를 설립하고 상임공동의장에 취임한다.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대승을 거뒀고 김대중은 정계복귀를 선언하며 민주당 탈당파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오랜 도전 끝에 그는 결국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다. 선거 사상 첫 여야 정권 교체였다.
◆대통령, 그리고 그 이후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자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천명했다. 내무부와 공보처 폐지, 세계 열세 번째 여성부 신설 등을 추진했으며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는 등 행정 개혁을 펼쳤다. 취임 한 달여 만에 IMF와의 자금지원 합의를 통해 214억 달러를 도입했으나 이에 따른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었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IT 관련 벤처 기업 육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2000년 6월 그는 김정일과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추구하는 통일에 대해 합의한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며 개성공단을 세울 것에 합의한다. 그해 연말 그는 독재 정권 시절 한국 인권에 헌신하고 남북간의 화해 무드를 조성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퇴임 후 그는 건강이 많이 악화됐으나 2004년 1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재심 선거 공판에 출석해 무죄를 받아내는 가 하면 유럽 등지의 초청으로 현지 연설을 다니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 2009년 7월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입원한 그는 8월 18일 오후 1시43분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서거했다. 향년 86세. 현재 그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같이 말한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역사의 심판이다. 우리들은 한때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수 있지만 역사를 속일 수는 없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무등일보는 '김대중 특별기획'(연중 기획 포함)과 관련, 많은 도움을 주신 김대중 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측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포용과 화합, 좋은 세상을 만드는 '씨앗'이 되다 김대중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기려 2000년 노벨평화상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수여했다. 시민들이 김대중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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