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천년사 논쟁 지상토론회] ④·끝 일본서기 지명 인용
◆ 홍성화 건국대 교수
학문적 논의 벗어난 선동만 반복
한국 고대사 연구는 日 식민사관
탈피과정 통해 성장 '현재진행형'
최근 전라도천년사와 관련한 논쟁이 그칠 줄을 모른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일본서기는 일본사서이니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일본에서만 찾아야 한다든지, 일본서기를 인용하면 식민사학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인용하면 식민사학자인가.
일본서기는 일본의 고대 역사서이지만, 한반도 관계 기록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전하지 않는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부분도 있다. 이는 백제 사료가 백제유민들에 의해 왜국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기술돼 있고, 일본이 한반도의 일부 지역을 점유하거나 백제에게 한반도의 땅을 하사하는 내용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서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역사서는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의 사관이나 입장들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특히 작성자의 정치적 의도나 이해관계에 따라 사실이 왜곡, 조작될 가능성이 있다.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은 4세기 이래 백제 등 한반도 국가로부터 우수한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고대국가를 완성했다.
그러나 백제 패망 후 위기상황에 빠졌고 율령국가를 추진하며 신라를 적대시하고 자신들이 우월했다는 인식으로 바뀌었다.
이후 720년경에 쓰인 일본서기에는 주변 나라를 속국으로 보는 번국(蕃國)사관으로 과거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서기에 보이는 한반도 관계 기록은 그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본래 백제계통의 원사료로 부터 개변된 것이므로 왜곡된 내용을 걷어내면 역사적 사실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예를 들어 백제 무령왕 탄생과 계보의 경우 일본서기 내 '백제 3서'의 원사료가 비교적 사실에 바탕을 둔 기록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25대 무령왕이 24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돼 있는 것에 반해,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에는 무령과 동성을 곤지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 것일까.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 지석에 따르면 무령왕은 523년 62세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백제신찬에도 무령왕이 461년(신축년)에 태어났다고 적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 동성은 곤지가 461년 왜국에 파견되어 정착한 이후에 태어났다고 돼 있어 무령왕보다 아래일 확률이 높다. 이는 곤지의 둘째 아들이 동성이었다는 백제신찬의 기록을 통해서도 첫째가 무령이며 이를 통해 일본서기 내 백제신찬의 계보가 더 정확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학계의 고대사 연구는 과거 일본이 설정해놓은 식민사관을 탈피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해왔다. 더욱이 일본서기에 쓰인 고대사를 재검토해 임나일본부설의 부당성을 입증해왔고 이는 일본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만 고대사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현재의 통설적 입장이 곧 당시 역사적 사실의 종착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끊임없이 통설에 대한 문제 제기와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필자 역시 칠지도(七支刀)에 대한 해석과 기문, 임나 4현 등의 지명 비정과 관련해서는 통설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학문적인 논의의 틀 속에서 문제가 제기돼야 할 것이며 그러한 논증 또한 많은 연구자들의 공감대 속에서 진행돼야 통설로 자리잡는 수순을 밟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천년사를 반대하는 이들은 입증되지도 않은 내용을 선동을 통해 확산시킴으로써 학문의 비판적 논의를 넘어서고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반도 관련 지명을 일본 내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의 경우도 일본열도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점령하였다는 독단적 인식 속에서 나온 것이다. 이 주장은 1960년대 북한의 김석형이 발표했던 '분국론(分國論)'을 그 근저에 두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식민지인 분국을 건설했다는 이론은 수많은 연구자들의 검증이 있었지만, 이를 실증할 만한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
김석형 또한 직접 일본열도를 조사했던 것이 아니라 몇몇 유물, 유적 자료를 중심으로 구상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필자는 지난 30여 년간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몸소 일본열도를 찾아다녔지만, 일본열도 어느 곳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식민국가를 건설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일본열도에서 한반도 관련 유적, 유물이 발견되는 것만을 보고 이것이 한반도인이 건너가서 세웠던 국가의 흔적으로까지 확대 해석할 수는 없다. 이는 거꾸로 한반도에서 일본 계통의 유물이 발견됐다고 해서 바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대 교류 속에서 나타난 산물을 곧바로 지배와 피지배의 사관으로 보려고 하는 인식에 문제가 있다.
필자는 역사 속에서 호남인들이 보여줬던 자주, 평화, 민주 의식을 누구보다 흠모하는 사람이며 근현대사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바로 서게 한 호남인들의 의지와 행동을 수업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쪼록 선동에 휩쓸리지 않는 호남인들의 지성을 바라마지 않는다.
◆ 김수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日 역사서에 등장하는 지명들이
한반도의 국가라고 볼 근거 희박
日제국주의 관점에서 나온 편견
전라도천년사 편찬진은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지명들을 한반도 남부에 그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일본서기를 백제가 쓰면서 백제가 한반도에서 했던 일들을 마치 오사카 나라지역에 있었던 야마토 왜가 한 것처럼 포장, 위장해 썼다.
이에 따라 신공 49년 신라정벌 내용의 신공왕후가 근초고왕이며 근초고왕이 한반도 남부를 경략하는 내용을 야마토 왜가 가져다가 왜곡해서 쓴것이기 때문에, 그 지명들을 전부 한반도 남부에 비정하는 것이 맞다는 황당한 '기적의 논리'를 정설이고 통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기적의 논리라고 말한 것은 신공을 근초고왕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어이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일본남한식민학계의 주장을 보자.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 49년은 249년이다. 그런데 여기에 120년을 더해서 369년 만든다.
369년을 만들면 근초고왕 재위시기가 된다. 그렇게 만드는 이유는 신공 49년에 '신라', '백제', '초고(肖古)왕', '왕자 귀수(貴須)'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같은 신공기 신공 40년에는 "40년 위지에는 정시 원년에 건충교위제휴(建忠校尉梯携)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고 왜국에 가게 하였다고 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은 중국사서와 기년이 일치하므로 120년을 더하지 않는다. 이때의 사실은 일본서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중국사서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국여왕 '비미호'때의 일로 본다.
즉 다시 말하면 신공이라는 인물이 '비미호'인지 '근초고왕'인지 아니면 완전히 조작된 인물인지 그 자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서기는 '언제', '어디서', '누가'라는 사실관계의 기본이 해명이 되지 않는 사서이다. 이런 사서를 토대로 오로지 지명만이 옳으니 지명만 가지고 와서 한반도 남부에 비정하자는 것이 지금 일본남한식민사학계의 입장이다.
이런 관점은 전적으로 한반도 고대국가 주민들이 고대에 몇 차례에 걸쳐 대거 이주했다는 과학적인 근거를 전면 부인하는 관점이다.
아래의 그림도표를 보자.
위 도표는 일본 인류유전학의 선구자인 교툐대학의 오모토 게이치의 유전학적 한일계통관계 연구결과에 대한 것이다. '그림 1'은 23개의 고전적 유전 마커를 사용해서 세계 25집단 간의 유전적 계통관계를 도식화한 것인데 '본토 일본인(아이누와 오키나와 집단을 제외한 일본인)'과 '한국인'이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는 것을 한눈에 보여준다.
인류유전학은 고대 한국인들이 이주해 고대 일본인들을 형성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의 농경시대인 야요이 시대도 그 이후 고훈(고분)시대도 전부 한반도에서 열도로 이주해간 이주민들이 열었고 그 인구를 형성했기 때문에 1천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가 25개 집단 중에서 제일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에서 언급되는 신라, 백제, 백제왕의 이름, 고구려, 가야라고 주장하는 '임나'와 그를 둘러싼 사건 내용에서 등장하는 지명들이 일본열도에 없었고 한반도에 있었다고 단정할 과학적 근거가 없다.
다시 말해 한반도 고대 국가 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한 숫자가 바로 고대 일본 인구를 형성했고, 이주자들이 열도에서 소국 신라, 소국 백제, 소국 고구려들을 정착지마다 형성했다고 보는 것이 과학적이다.
즉 그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인 지명들이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고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이유가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일본서기 편자가 일본서기에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인류유적학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이렇게 과학적 근거로 보면 신공 49년에 120년을 더하지 않아도 된다. 120년을 더하여 근초고왕의 재위시기에 맞추는 억지보다, 신공 49년조의 신공의 신라정벌 사건은 신공 249년에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중국 사서인 후한서 왜전과 삼국지 위지 왜전에서도 249년은 아니지만 왜국에서 대란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훨씬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 나온 지명인 '기문', '대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계체 7년(513)에 백제가 일본천황에게 '반파국'이 백제 땅인 기문을 뺏어갔으니 돌려받게 해달라고 일본천황에게 요청한 기록으로 시작돼 계체 9년(515)에 '반파'를 상대로 '일본과 백제'가 전쟁을 했다는 기록에 등장하는 지명이 기문과 대사이다.
현재 일본남한식민학계는 반파를 '장수군'이라고 하고, 기문을 '남원'이라고 대사는 '하동'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백제와 일본이 장수군에 있었던 반파와 전쟁을 하기 위해 섬진강 하류인 하동에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도를 보고도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을 이을 수가 없다. 백제가 또는 백제와 일본이 장수군에 있었던 반파와 섬진강 하류에서 전쟁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만약 그런 사건이 한반도에서 있었다면 백제는 장수군 위에 존재했었기 때문에 육군 보병으로 백제 아래에 있는 반파로 쳐내려 들어가면 된다. 백제가 장수군에 있는 소국 반파를 이기지 못해서 일본에게 청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장수군에 있는 반파와 싸우기 위해 계체기에 '백제 장군 문귀는 신라를 거쳐갔다'는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신라의 낙동강으로 가서 배를 타고 남해안으로 온 다음에 섬진강 하류로 가서 반파와 전쟁을 한 것이 된다.(이 전쟁이 계체기에는 수전으로 분명히 기록돼 있다.)
있을 수 없는 이런 몰상식한 행태가 바로 일본서기에 나온 지명을 한반도에 비정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일본열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로 봐야한다. 그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들은 일본열도에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과학이고 상식이다.
기본적으로 일본열도 고대사는 일본 이주사로 봐야한다. 일본의 인구 형성을 고대 한반도 국가 주민들이 건너가서 형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세계사적 보편성과 통하는 것이다. 영국의 인구 형성은 바다 건너 유럽 대륙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형성한 것이다.
미국 역시 이주 이민을 간 사람들로부터 미국사가 시작된 것이다. 호주도 마찬가지다.
일본 역시 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고대사를 이주사 관점으로 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한반도 고대 국가 주민들이 대거 이주를 하면서 일본 고대가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라고 주장하는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던 국가들이라고 볼 근거가 희박하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각 나라들과 관련해 나타나는 지명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대일본민족 팽창패권주의'에 근거한 전형적인 일본제국주의 관점에서 나온 편견일 뿐이다.
- "마한 멸망시기, 연구방법 이해차" vs "마한 존속기간 연장, 학자 의견에 불과" 박중환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 [전라도천년사 논쟁 지상토론회] ③마한사◆ 박중환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백제본기 '마한 멸망 앞당겼다' 중론中·日 역사서, 서기 9년 이후 등장역사 복원 한계…中·日 역사서 활용다른 역사 복원 기록 부인하는 격전라도천년사가 '식민사관'에 의해 쓰여졌다는 비판이 있다. 이런 오해는 역사연구 방법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 같다.과거 전라도 지역은 오랜 시간동안 백제의 땅이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기록에 나와 있다 .이 역사서에는 '마한이 서기 9년에 멸망해서 사라졌다'고 쓰여 있다. 또한 30여 명의 백제 왕들이 재위하는 동안 '마한'에 대한 언급이 일체 나오지 않는다.그런데 백제 측에서 남겨놓은 기록을 토대로 한 백제본기 기록은 백제 측에서 마한을 완전 멸망시킨 시기를 매우 과장해 놓은 것으로 역사학계는 평가하고 있다.그 전후 사정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남쪽에 있던 마한세력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겪은 것으로 보이는 모종의 어려움이 마한 멸망시기를 과장한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백제본기의 마한기록의 오류는 삼국사기 안에서도 신라본기나 고구려본기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록들에는 마한이 멸망했다는 서기 9년 이후에도 마한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국내 역사서가 아닌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들에서도 마한의 존재를 늦게까지 파악할 수 있다.마한 54국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에서 출발한 부족국가 백제가 건국 후 불과 27년 만에 한반도 서남부 전역을 점유했다는 말 자체가 우선 상식적이지 않다.삼국사기 안에서도 신라본기에서는 신라가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를 532년에 가서야 정복했고 고령의 대가야까지 정복해서 낙동강 유역을 모두 확보한 것이 562년이었다고 썼다.신라가 낙동강 유역을 장악한 것이 562년이었는데 백제가 경기·충청·전라지역 전체를 서기 9년에 모두 영유했다면, 백제의 최대판도 달성이 신라의 낙동강유역 확보보다 553년이나 빨랐다는 말이 된다.553년이란 시간은 백제로부터 통일신라시대를 지나고 고려초기도 지나고 고려중기에 이를 만한 장구한 시간이다. 과장된 것이다.백제 측 기록이 마한의 정복과정을 이처럼 이른 시기에 통째로 달성된 것처럼 써 놓았기에 한강에서 금강과 만경강과 영산강을 거쳐 남해안에 이르렀을 백제 확장과정의 실제 모습을 삼국사기에 의해 복원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때문에 충청·전라도지역 고대 역사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삼국지'·'후한서'·'진서'·'양직공도' 그리고 일본의 '일본서기' 등 해외자료를 연구하고 곳곳에 남은 기록들을 활용할 수 밖에 없다.전라도천년사가 식민사관에 의한 책이라고 주장하는 비판은 전라도 고대 역사의 실제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인용한 위의 여러 역사서 가운데 일본서기를 인용했다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일본서기는 상반된 두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첫번째 측면은 일본왕실을 추켜올리기 위해 한반도의 여러 왕들이 마치 자기들의 신하였던 것처럼 왜곡해 놓았다. 연대도 뒤바꾼 곳이 많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두번째 측면이 있다. 일본 왕을 미화하기 위해 왜곡한 일본서기의 원전자료들이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가 일본 고대국가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한반도계 이주민들의 기록에 크게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모르타르로 뒤섞어 벽을 쌓았지만 그 속에 반짝이는 원석 조각들이 수없이 파묻혀 있는 것과 같다.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준 왕인이나 불교를 전해준 노리사치계 이야기도 일본서기 기록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백제의 세 역사책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 기록도 일본서기 곳곳에 인용문 형태로 남아 있어 삼한과 삼국역사 연구의 희귀자료가 되고 있다.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 이야기나 무령왕릉 지석의 발견으로 그 사료가치가 입증된 무령왕 출생기록도 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 측 원전 속에 들어있다. 이 기록들을 모두 버릴 것인가.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회는 일본서기 문제점인 '일왕을 추켜세운 서술표현'과 '문투가 거짓이고 왜곡'된 것임을 전제로 일본서기 기록을 다루고 인용해 왔다.백제왕을 자신의 신하인 듯 왜곡한 서술방식과 일본서기 기록 속에서 마한과 관련해 그 주체를 뒤바꾼 일본의 군사활동도 사실 백제의 군사활동이었음을 뚜렷하게 지적했다.일본서기의 서술표현과 자기과시적 문투가 거짓이고 왜곡된 것임은 한국 역사학계뿐 아니라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상식이 된 지 이미 오래다.그런데 전라도천년사가 식민사관에 의한 책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그저 '일본서기를 인용했다. 그러니 너는 식민사학자'라는 식이다. 얼마나 단순한 판단이고 비학문적인 문제제기인가.기록의 비판을 거쳐 동아시아 학계와 구미학계가 이미 학술자료로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일본서기를 두고 왜곡된 표현만을 시비 삼아 식민사학자로 매도한다면 우리나라에서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고대 역사 연구가 어떻게 진전될 수 있을 것인가.이덕일 순천향대 대학원 교수◆ 이덕일(순천향대 대학원 교수) 편찬위, '백제본기' 마한 기록 부인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마한=고구려'천년사, 멸망시기 틀려 조작 의심멸망시기 의도적 늘린 이유 뭔가역사학은 사료를 해석하는 학문이다. 그럼 마한에 대해 사료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사기'의 '최치원 열전'에 따르면 최치원(857~?)은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한은 곧 고구려고, 변한은 곧 백제고,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라고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지리지'는 최치원의 이 말에 대해 "사실과 가깝다고 할 만 하다"고 덧붙였다.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마한=고구려'라고 보았다는 뜻이다.그런데 현재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회를 비롯한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마한을 백제의 '전신'이라고 주장한다. 한백겸은 광해군 8년(1616) 경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마한=백제, 변한=가야, 진한=신라'라고 썼는데 이를 근거로 든다.한백겸은 반도사관에 기초해 마한·변한·진한의 삼한을 반도 남부로 축소했는데 이를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받아들이고 광복 후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받아들여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었다.그러나 삼한에 대한 기본 사료인 중국의 '삼국지'·'후한서'는 모두 삼한의 강역을 "사방 4천리"라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를 포함해야 사방 4천리가 된다.현재 사방1천여 리에 불과한 충청·전라·경상도 땅에 삼한을 우겨넣고 '정설'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는 사료와 크게 배치되는 주장이다.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살펴보자. 삼국사기는 신라를 계승한 것으로 여겼던 고려 유학자들이 편찬했기 때문에 신라사는 비교적 자세하고 백제사는 비교적 소략하다.그러나 마한과 백제의 관계만큼은 아주 자세하게 써놓았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에는 마한이 무려 여덟 번이나 나온다.이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온조왕 때 백제와 마한에 대해서 많은 사료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삼국사기 온조왕 때의 마한 기록은 맥락이 있다. 백제는 원래 마한이 동북땅 1백리를 떼어주어 시작했다는 것이다.그래서 백제 온조왕은 신비로운 사슴을 잡자 마한에 보내고 말갈 추장을 생포해서 마한에 보내는 등 상국으로 모셨다.그러나 마한이 점점 약해지자 온조왕은 재위 26년(서기 8) 7월 '다른 나라가 마한을 차지하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격이니 백제가 먼저 차지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10월 마한을 습격해서 수도를 차지했다. 이 때 원산·금현 두 성만 함락되지 않았는데, 이듬해인 온조왕 27년(서기 9) 4월 "두 성(원산·금현)이 항복해서 그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비로소 멸망했다"고 삼국사기는 말하고 있다.그러나 편찬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마한 기사는 사료로서 문제가 있다는 공통된 입장이다. 삼국사기를 '믿을 수 없다'(전라도천년사 3권 107쪽)고 우겼다.과거 전라도천년사 문제 토론회가 열렸을 때 필자가 편찬위 측 교수에게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서기 9년에 망했다고 나오고 전라도천년사는 530년까지 있었다고 나오는데 어느 사료에 그렇게 나오는가"라고 물으니 '학자들끼리 그렇게 합의했다'고 답변했다. 한 마디로 역사학이 아니다.전라도천년사 3권은 마한이 369년에 멸망했다고 썼는데 4권에서는 530년까지 존속했다고 말하고 있다. 사료에 없는 내용을 조작하려니 횡설수설하는 것이다.전라도천년사가 이미 망한 마한을 530년까지 살리는 이유는 백제사를 지우고 야마토왜의 지배지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라도가 백제강역이면 야마토왜가 지배했다고 우길 수 없다.삼국지 등 중국 사료는 마한이 54개 소국으로 이뤄졌다고 말하고 있으니 야마토왜가 그 일정 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편찬위가 마한을 369년, 혹은 530까지 존속시키려면 사료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근거가 없으니 남는 것은 억지뿐이다.메시지에 자신이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는 식으로 전라도천년사를 비판하면 "사이비역사학", "일본서기를 인용하면 다 식민사학이냐"는 등 비학문적 논리로 일관한다. 마한을 빙자해 전라도를 야마토왜의 식민지로 조작한 업보가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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