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격적이거나 혹은 낯설거나
틀 벗어난 작품·무대·구성 파격
'이미지'들의 지나친 반복 지루
공연예술계의 거장 로버트 윌슨의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굳이 장르를 구분 짓기 위해 실험 오페라로 규정하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도 맞지 않는 것 같다. 대게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 제목 역시 작품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해변의 아인슈타인'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는 없고 '이미지'의 나열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추상적인 공연은 어떨까라는 호기심에서 시작됐다'는 연출가의 의도가 무대에 고스란히 녹여져 있다.
4막과 5개의 막간극으로 구성된 장면들은 4시 30분에 걸쳐 촘촘하게 진행된다.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4막은 각각 '기차'와 '법정', '우주선'을 주제로 서로 다른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각각의 막들 사이에는 막간극 형식을 통해 또 다른 별개의 이미지가 전개된다.
언뜻 보기에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장시간의 공연이 반복되면서 이들 장면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차로 주제로 한 1막에서는 망루에 올라선 어린 아인슈타인이 종이비행기를 접어 무대로 날리고, 여자 무용수는 무대 중앙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왔다갔다를 반복하고 빨간색 셔츠를 입은 남자 역시 수학공식을 푸는 듯한 마임을 되풀이한다.
이들 사이로 실제 사이즈에 버금가는 기차가 무대에 나타나더니 이내 빛의 기둥이 수직으로 들어와 무대를 반으로 가른다.
법정을 주제로 한 장면에는 실제 법정을 옮겨놓은 듯 한 세트에 피고와 판사, 배심원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일련의 형식에 맞춰 판결이 진행된다.
또 우주선을 주제로 한 장면에는 10명의 무용수가 빙글빙글 돌거나 뛰어오르는 듯 경쾌한 동작을 반복한다.
각각의 무대가 서로 전혀 연관이 없는 듯 하지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대표적 이미지들이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혀를 내밀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나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아인슈타인 등의 이미지는 배우들의 대사나 언어로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인슈타인을 조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들이 시간이나 공간의 구분 없이 반복되면서 서로 관련이 있음을 관객들이 서서히 깨닫게 해준다.
현장에서 라이브로 들려주는 음악 역시 기존의 우리에게 익숙한 멜로디의 개념이 아닌 단조롭고 반복적인 기계적인 음에 가깝다.
각각의 테마에 따라 덧입혀지는 음악 또한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장면의 독립성이 더욱 부각되지만 반복될수록 익숙해지는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들의 반복들은 마치 관객들에게 강요하듯 되풀이 되면서 지루함과 더불어 불쾌함을 주기도 했다.
또한 예술극장 측에서는 공연시간이 5시간에 다다르기 때문에 관객들의 이동을 자유롭게 허용했지만 관객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되레 공연의 몰입도를 저해하기도 했다.
1976년 초연 당시 공연계의 관습과 규칙을 뛰어넘은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던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15-2016 시즌 프로그램 개막작으로 지난 22일부터 25일까지 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에서 공연됐다.
이 작품은 1976년 미국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 필립 글래스(78)와 안무가 루신다 차일즈(75)가 협업한 작품으로 더욱 눈길을 끌었다. 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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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육지 오가며 왜군 격파··· 한산·행주대첩의 승부사
삼도수군사령부가 있었던 통제영(경남)통영)의 세병관(국보305호).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1차 진주대첩 등을 ‘3대첩’이라 한다. 이 가운데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등 양 대첩에 참전해 공을 세운 보성 출신 선거이가 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선거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해전과 육전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1598년 10월 울산성 전투에서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선두에서 독전하다 적탄에 쓰러졌다. 최근 보성 선씨 문중에서 주관한 학술대회에서 선거이 공적이 새롭게 조명됐다. 특히 이순신 장군과의 관련성을 집중 살핀 순천대 이욱 교수의 글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본 호 집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선거이 등 5명의 보성 선씨 위패를 모셔놓은 오충사(전남보성).선거이는 명종 즉위년(1545년)에 태어났다. 호는 ‘친친(親親)’이었다. 그의 효성이 남달라 붙여진 이름이다. 본관은 보성이고 보성 조성에서 살았다.선거이는 최근 발굴된 ‘기묘문무과방목(己卯文武科榜目)’에 따르면, 1579년 기묘년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합격 당시 ‘겸사복(兼司僕)’에 있었다. 대통령 경호 부대 곧 최정예 금군(禁軍) 출신이었다. 그가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무과에 합격한 후 그는 북쪽 국경에서 근무했는데, 이곳에서 이순신을 만났다. 선거이는 무과 합격하고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무관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절충장군이 됐다. 이는 무예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승진이 빨랐음을 말해준다.선거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 3월10일 진도군수에 부임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휘 능력이 검증된 실전 경험이 뛰어난 인물들을 경상, 전라 등 남해안의 지휘관으로 보임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591년 2월 이순신이 진도군수에 임명됐다가 가리포 첨사로, 다시 전라좌수사로 보임됐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도군수에 이순신, 선거이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연이어 보임된 것은 진도가 왜구의 주된 공격 루트였던 것과 관계 깊다. 이순신과 선거이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유성룡이 무과 급제 후 인사차 들른 선거이에게 “전날 이순신을 보고, 또 오늘 그대를 보니 범장(范張)이 다시 나타난 것과 같다”고 했다.범장은 범식(范式)과 장소(張邵)을 가리키는 말로 깊은 우정을 빗댈 때 하는 고사이다. 서애가 이들의 관계를 범장에 비유할 정도로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려준다.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던 이순신이 여진족의 공격으로 그 지역이 커다란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이순신이 책임을 지고 투옥됐을 때 같이 근무하던 선거이가 옥을 방문해 위로한 적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진도군수로 전라우수영의 관할에 속했던 선거이는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수군과 함께 경상우수영을 지원하는 합동작전에 참전했다. 선거이가 한산도 해전에 참전했던 기록이 선조실록에 있다.김응남이 말했다.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 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했다. …”정곤수는 말했다. “정운이 ‘장수가 만일 가지 않는다면 전라도는 필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가서 격파했다 한다.”전쟁 발발 초기 경상도 수군의 요청을 받아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대다수 전라도 장수들은 머뭇거렸다. 앞서 진무성 장군을 다룰 때 언급했지만, 이순신의 휘했던 송희립, 정운 등이 참전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선거이도 전쟁 초기부터 적극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선거이는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음에서 알 수 있다.호남·영암 수군이 견내량에 모여 왜적의 큰 배 중 10척, 중·소선 70여 척을 발견하고 접전했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을 쏘았으나 전혀 깨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 큰 바다로 퇴진해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군수 선거이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난중잡록1, 임진년 7월한산도 해전에 참여한 선거이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로 선거이가 한산대첩 승리의 주역임을 알려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한산도 해전에서 선거이 역할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은 당시 수군 편제상 선거이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전라도 수군과 공동작전을 펼치고 있던 선거이는 전라감사 이광의 지원 명령을 받고 수원으로 이동했다. 전라병사 최원과 의병장 김천일이 수원에서 인천으로 진을 옮기면서 이광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광은 진도군수 선거이에게 김천일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후 전라병사로 승진한 선거이는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직접 참전하지는 않고 외곽에 포진해 있었다. 행주대첩에는 간접적으로 참여한 셈이다. 하지만 선거이 부대가 요로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이 행주산성을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산도 해전, 행주산성 전투에서의 조선군 승리는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전투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선거이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1595년 충청수사에 임명된 선거이는, 그해 5월에서 9월까지 약 115일 동안 한산도의 통제영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작전을 논의했다. 이 시기에 무려 31일 이상 만났음이 난중일기에 기록되고 있다. 1595년 9월 14일 선거이와 이별할 때 이순신은 다음의 시를 지어 석별을 아쉬워했다.북쪽에 갔을 때 함께 고생했고남쪽으로 와서는 생사를 같이 했네.오늘 달 밝은 밤에 술 한 잔 같이 하면내일은 이별의 감정을 느끼겠구려.한산도 이순신 장군 집무실에 해당하는 제승당.이순신은 선거이와 북의 여진족, 남의 일본과의 전투에서 생사를 함께 한 정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1596년 9월 24일 이순신이 공무로 보성에 갈 일이 있자 선거이의 집을 방문했다. 거기서 이순신은 선거이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안타까워했다.한편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선거이는 성을 비우라는 명군과 권율 등 조선군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진주성을 나와 외곽 방어를 했다. 김천일 등은 진주성이 함락되면 호남이 위태롭다는 판단에 따라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했다. 유성룡은 진주성 함락은 공성 작전을 따르지 않았던 김천일의 실책이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성룡이 남인, 김천일이 서인으로 당색이 다른 것도 이러한 평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조정의 명령에 따라 공성 작전을 수행한 선거이에게 진주성 함락 책임을 물었다. 임진왜란 공신 책록에서 선무공신 아래 등급인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됐다. 이순신과 3차례나 연합해전을 전개하고 육전에서는 일본군과 끈질긴 전투를 하고 마침내 전투의 선봉에서 지휘하다 장렬한 전사를 한 영웅에 대한 온당한 처사는 아니었다. 고향인 보성에 선거이 등 보성 선씨 5인의 영정을 봉안한 ‘오충사’가 있다. 한경국기자 hkk4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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