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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외 독립운동·연합군 국내 상륙 지원한 비밀결사

입력 2023.09.06. 18:05 양기생 기자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
⑥광복의 순간까지 이어진 학생운동의 불꽃, 무등독서회(상)
무등독서회 활동하다 고문 후유즘으로 순국한 곽이섭 묘비(국립 대전현충원).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 ⑥광복의 순간까지 이어진 학생운동의 불꽃, 무등독서회(상)

지난 8월29일 광복회 광주지부(지부장 고욱)가 주관한 '국치일(國恥日)' 기념행사가 광주 3·1운동 및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한 광주농업학교의 후신 학교인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에서 이정선 광주광역시 교육감 등 각급 기관장과 광복회 회원, 광주 자연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기념식이 끝난 후 필자의 '국치일과 광주농업학교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의 특강이 있었다. 광복회 광주광역시지부와 전라남도지부 모두 국치일의 국가기념일을 이야기하였다. 필자 또한 이에 동의하고 있는데, 국치일은 단순히 국가의 치욕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보다는, 이날을 통해 처절한 투쟁에 대한 각오를 다짐하는 날이었다. 곧 36년 가까운 항쟁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오늘은 일제 강점기 교원을 양성하는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인 '무등독서회'를 살펴보려 한다. 무등독서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연합군의 국내 상륙을 준비한 단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단체를 1938년에 광주고보의 후신학교인 광주서중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무등회'와 혼동하고 그 실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1943년 3월 광주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 중, 안동영·조규학·김상중 등 17명과 함께 무등독서회를 조직하여 매월 두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민족독립운동과 식민사관에 대항한 정통역사관 확립에 노력하였다. 또한 연합군의 한국 상륙시 행동대원으로 봉기하는 것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원으로 밀명을 실행하는 계획 등을 논의하다가 1945년 3월 붙잡혀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무등독서회를 조직한 대표 옥대호에 대한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1943년 제2차 학생독립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광주서중학교의 무등회 사건이 전국에 소용돌이칠 때, 교육을 통해 민족 독립의 길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광주사범학교에 진학한 젊은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가 전국 여러 지역 학교와 연합 결사체를 구축하며 거대한 항쟁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었다. '무등독서회'가 그것인데, 이들은 광복군 국내 침투조와 연결되어 연합군의 본토 상륙작전을 지원하는 행동 대원의 역할을 행동강령으로 내세우는 등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일본과의 본격적인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웃 전주사범학교 및 경북의 대구사범학교와 연계하는 계획을 수립할 정도로 치밀한 대일 항전을 준비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44년 10월 일본 경찰에 이들이 체포되어 무려 10개월 넘게 온갖 고문을 받으며 조사받았다. 이들을 바로 일본 경찰이 기소하지 않고 조사를 1년 가까이한 것은 그들의 조직이 워낙 광범위한 데다 배후에 임시정부가 있는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다.

무등독서회 조직을 주도한 옥대호의 육필원고에 의하면, '물고문, 불인두 고문, 장작 곤봉 난타' 등이 그들에게 가해졌다. 그리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가 무등독서회 회원들을 총살하려고 시도하였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은 이들은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 출옥하였다.

광주사범학교의 항일 비밀결사인 '무등독서회'를 결성한 옥대호를 비롯한 회원들은 그들의 공적을 내세우고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의 역사를 위해 그들의 활동 사실을 입증하려 하였으나 미결수 상태에서 조사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십수 년 끈질긴 노력 끝에 1995년 겨우 '대통령표창'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의 빛나는 공적을 평가하였다. 1944년 10월에 체포되어 거의 10개월이 훨씬 넘게 미결수로서 온갖 고문받은 사실을 1945년 3월에 체포되었다고 축소 평가함으로써 당사자들의 가슴에 한을 심어 놓았다. 회장인 옥대호 선생은 이를 바로 잡으려 동분서주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고 곽수민이 증언한다.

무등독서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옥대호의 육필 자료에 의하면, 비밀결사 조직 단체인 무등독서회는 그 뿌리는 관립 광주사범학교 무안향우회다. 당시 무등독서회원의 상당수가 무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옥대호의 얘기가 설득력이 있다. 무등독서회 결성을 주도한 옥대호는 무안 몽탄 출신인데 1984년 11월 필자가 대학원 졸업 후 무안 청계중에서 교직을 시작할 때 교감선생이었다. 필자에게 그가 모은 여러 자료를 보여주며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확인하려 하였다. 필자가 2년 반 근무하다 광주로 직장을 옮기면서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가 1996년 무렵 유공자 서훈으로 되었고, 2003년 경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에 대한 부채 의식을 느끼면서 옥대호 선생과 무등독서회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같은 무등독서회원 곽이섭의 아들 수민을 만났다. 곽이섭은 그의 부친이 그가 3세 되던 어린 나이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한 후 갖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누구보다 부친의 독립운동 사실을 찾고 기념하려 하였다. 이때 만난 곽수민은 옥대호 선생이 필자에게 보여주었던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곧 옥대호 선생이 동지의 아들에게 자료를 맡긴 것이다. 그 자료가 30년이 훨씬 지나 필자에게 다시 온 것은 역사란 '우연'인가, '필연'인가의 명제의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학생독립운동 기념비(광주교대)

무안향우회 조직 시기에 약간의 혼선이 있는데 옥대호의 육필 원고에는 1941년 2월에 조직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옥대호 등 심상과 4회 입학생의 입학 시기는 1941년 4월이다. 만약 옥대호가 무안향우회를 결성하였다면 1941년 4월 이후여야 한다. 실제 의령 옥씨 가문에서 소개하는 자료에는 무안향우회가 1941년 9월에 조직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 자료도 결국 옥대호의 진술에 의지하였을 가능성이 크므로 옥대호가 직접 작성한 육필 원고의 1941년 2월에 작성했다는 것은 1941년 9월을 본인이 착오하여 잘못 기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곧 무안향우회는 1941년 9월에 조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무안향우회 회원들은 위친계 유의조항을 만들고 책을 돌려 보는 등 독서 활동을 하였다. 이들이 향우회를 만든 것은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사전 단계였다. 이들이 1학년 말이 되는 1942년 2월 무안향우회를 무등독서회로 개칭하면서 회원들을 확대하였다.

동시에 다른 지역 학교와 연대를 꾀하고 있었다. 이 일을 전북 순창 출신 홍완표가 하였는데, 1942년 4월 광주사범학교, 전주사범학교, 순창농림학교, 전주북중학교와 연합학도대를 편성하는 등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4년 10월 일본 고등계 형사계에 의해 검속되어 1년 가까이 미결수 상태로 전북경찰부, 전남경찰부, 장성경찰서, 광주경찰서 등 여러 유치장에 갇혀 조사를 받다가 해방을 맞아 풀려났다. 이들이 비밀조직 활동 기간 포함하여 3년 7개월, 구속된 기간 11개월이었다.

해방 직전의 유치장 생활을 하던 무등독서회 대표를 맡은 옥대호(전 무안청계중 교감)의 생전의 육필 일기다.

"1945년 4월 전세가 기울어진 일제 말 관립 광주사범 무등독서회 학생 독립운동 사건 분산 취조에서 통합 취조 차, 전남 경찰부 고등계에 계류된 사상범들이 광주경찰서로 이송되었을 때 한국인 문 경부가 절도, 강간, 경제범, 여성범은 제외하고 사상범만 광주경찰서 방공호에 수감하였다.

수감 사유는 같이 방공호에 수감된 일본 중앙대생인 김준모 동지(당시 임정 연락원)에게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일제가 패전의 기미를 느끼고 광주 치안유지가 불가능할 때는 다른 잡범은 석방하고 사상범은 총살하라는 조선 총독이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6월에서 7월에 걸쳐 사상범 총살 관련 언급이 두 차례 있었으며 옥중 생활 중 물고문, 불인두 고문, 장작 곤봉 난타 등 고문으로 인하여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며 전 동지들의 건강이 쇠잔해질 때로 쇠잔해졌다.

이토록 혹심한 고문과 장기간의 옥중 생활이 지속되는 가운데 김준모 동지의 정보로 8월 중에 해방이 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며 8·15해방일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 하오 7시에 석방되었다. 저녁에 광주 중앙여관 모의가 있었다. 익일 광주 치안 임무에 참가 1주일 후에 모든 동지는 귀향길에 올랐다."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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