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광복의 순간까지 이어진 학생운동의 불꽃, 무등독서회(상)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 ⑥광복의 순간까지 이어진 학생운동의 불꽃, 무등독서회(상)
지난 8월29일 광복회 광주지부(지부장 고욱)가 주관한 '국치일(國恥日)' 기념행사가 광주 3·1운동 및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한 광주농업학교의 후신 학교인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에서 이정선 광주광역시 교육감 등 각급 기관장과 광복회 회원, 광주 자연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기념식이 끝난 후 필자의 '국치일과 광주농업학교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의 특강이 있었다. 광복회 광주광역시지부와 전라남도지부 모두 국치일의 국가기념일을 이야기하였다. 필자 또한 이에 동의하고 있는데, 국치일은 단순히 국가의 치욕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보다는, 이날을 통해 처절한 투쟁에 대한 각오를 다짐하는 날이었다. 곧 36년 가까운 항쟁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오늘은 일제 강점기 교원을 양성하는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인 '무등독서회'를 살펴보려 한다. 무등독서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연합군의 국내 상륙을 준비한 단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단체를 1938년에 광주고보의 후신학교인 광주서중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무등회'와 혼동하고 그 실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1943년 3월 광주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 중, 안동영·조규학·김상중 등 17명과 함께 무등독서회를 조직하여 매월 두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민족독립운동과 식민사관에 대항한 정통역사관 확립에 노력하였다. 또한 연합군의 한국 상륙시 행동대원으로 봉기하는 것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원으로 밀명을 실행하는 계획 등을 논의하다가 1945년 3월 붙잡혀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무등독서회를 조직한 대표 옥대호에 대한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1943년 제2차 학생독립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광주서중학교의 무등회 사건이 전국에 소용돌이칠 때, 교육을 통해 민족 독립의 길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광주사범학교에 진학한 젊은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가 전국 여러 지역 학교와 연합 결사체를 구축하며 거대한 항쟁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었다. '무등독서회'가 그것인데, 이들은 광복군 국내 침투조와 연결되어 연합군의 본토 상륙작전을 지원하는 행동 대원의 역할을 행동강령으로 내세우는 등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일본과의 본격적인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웃 전주사범학교 및 경북의 대구사범학교와 연계하는 계획을 수립할 정도로 치밀한 대일 항전을 준비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44년 10월 일본 경찰에 이들이 체포되어 무려 10개월 넘게 온갖 고문을 받으며 조사받았다. 이들을 바로 일본 경찰이 기소하지 않고 조사를 1년 가까이한 것은 그들의 조직이 워낙 광범위한 데다 배후에 임시정부가 있는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다.
무등독서회 조직을 주도한 옥대호의 육필원고에 의하면, '물고문, 불인두 고문, 장작 곤봉 난타' 등이 그들에게 가해졌다. 그리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가 무등독서회 회원들을 총살하려고 시도하였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은 이들은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 출옥하였다.
광주사범학교의 항일 비밀결사인 '무등독서회'를 결성한 옥대호를 비롯한 회원들은 그들의 공적을 내세우고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의 역사를 위해 그들의 활동 사실을 입증하려 하였으나 미결수 상태에서 조사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십수 년 끈질긴 노력 끝에 1995년 겨우 '대통령표창'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의 빛나는 공적을 평가하였다. 1944년 10월에 체포되어 거의 10개월이 훨씬 넘게 미결수로서 온갖 고문받은 사실을 1945년 3월에 체포되었다고 축소 평가함으로써 당사자들의 가슴에 한을 심어 놓았다. 회장인 옥대호 선생은 이를 바로 잡으려 동분서주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고 곽수민이 증언한다.
무등독서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옥대호의 육필 자료에 의하면, 비밀결사 조직 단체인 무등독서회는 그 뿌리는 관립 광주사범학교 무안향우회다. 당시 무등독서회원의 상당수가 무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옥대호의 얘기가 설득력이 있다. 무등독서회 결성을 주도한 옥대호는 무안 몽탄 출신인데 1984년 11월 필자가 대학원 졸업 후 무안 청계중에서 교직을 시작할 때 교감선생이었다. 필자에게 그가 모은 여러 자료를 보여주며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확인하려 하였다. 필자가 2년 반 근무하다 광주로 직장을 옮기면서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가 1996년 무렵 유공자 서훈으로 되었고, 2003년 경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에 대한 부채 의식을 느끼면서 옥대호 선생과 무등독서회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같은 무등독서회원 곽이섭의 아들 수민을 만났다. 곽이섭은 그의 부친이 그가 3세 되던 어린 나이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한 후 갖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누구보다 부친의 독립운동 사실을 찾고 기념하려 하였다. 이때 만난 곽수민은 옥대호 선생이 필자에게 보여주었던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곧 옥대호 선생이 동지의 아들에게 자료를 맡긴 것이다. 그 자료가 30년이 훨씬 지나 필자에게 다시 온 것은 역사란 '우연'인가, '필연'인가의 명제의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무안향우회 조직 시기에 약간의 혼선이 있는데 옥대호의 육필 원고에는 1941년 2월에 조직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옥대호 등 심상과 4회 입학생의 입학 시기는 1941년 4월이다. 만약 옥대호가 무안향우회를 결성하였다면 1941년 4월 이후여야 한다. 실제 의령 옥씨 가문에서 소개하는 자료에는 무안향우회가 1941년 9월에 조직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 자료도 결국 옥대호의 진술에 의지하였을 가능성이 크므로 옥대호가 직접 작성한 육필 원고의 1941년 2월에 작성했다는 것은 1941년 9월을 본인이 착오하여 잘못 기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곧 무안향우회는 1941년 9월에 조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무안향우회 회원들은 위친계 유의조항을 만들고 책을 돌려 보는 등 독서 활동을 하였다. 이들이 향우회를 만든 것은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사전 단계였다. 이들이 1학년 말이 되는 1942년 2월 무안향우회를 무등독서회로 개칭하면서 회원들을 확대하였다.
동시에 다른 지역 학교와 연대를 꾀하고 있었다. 이 일을 전북 순창 출신 홍완표가 하였는데, 1942년 4월 광주사범학교, 전주사범학교, 순창농림학교, 전주북중학교와 연합학도대를 편성하는 등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4년 10월 일본 고등계 형사계에 의해 검속되어 1년 가까이 미결수 상태로 전북경찰부, 전남경찰부, 장성경찰서, 광주경찰서 등 여러 유치장에 갇혀 조사를 받다가 해방을 맞아 풀려났다. 이들이 비밀조직 활동 기간 포함하여 3년 7개월, 구속된 기간 11개월이었다.
해방 직전의 유치장 생활을 하던 무등독서회 대표를 맡은 옥대호(전 무안청계중 교감)의 생전의 육필 일기다.
"1945년 4월 전세가 기울어진 일제 말 관립 광주사범 무등독서회 학생 독립운동 사건 분산 취조에서 통합 취조 차, 전남 경찰부 고등계에 계류된 사상범들이 광주경찰서로 이송되었을 때 한국인 문 경부가 절도, 강간, 경제범, 여성범은 제외하고 사상범만 광주경찰서 방공호에 수감하였다.
수감 사유는 같이 방공호에 수감된 일본 중앙대생인 김준모 동지(당시 임정 연락원)에게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일제가 패전의 기미를 느끼고 광주 치안유지가 불가능할 때는 다른 잡범은 석방하고 사상범은 총살하라는 조선 총독이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6월에서 7월에 걸쳐 사상범 총살 관련 언급이 두 차례 있었으며 옥중 생활 중 물고문, 불인두 고문, 장작 곤봉 난타 등 고문으로 인하여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며 전 동지들의 건강이 쇠잔해질 때로 쇠잔해졌다.
이토록 혹심한 고문과 장기간의 옥중 생활이 지속되는 가운데 김준모 동지의 정보로 8월 중에 해방이 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며 8·15해방일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 하오 7시에 석방되었다. 저녁에 광주 중앙여관 모의가 있었다. 익일 광주 치안 임무에 참가 1주일 후에 모든 동지는 귀향길에 올랐다."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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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비밀결사 조직··· 독립운동·역사관 확립에 기여 곽이섭 아들 곽수민(왼쪽)과 옥대호 교감이 연재의 마지막을 옥대호(玉大鎬·1925~2008) 선생으로 삼았던 것은 그에 대한 한없는 필자의 미안함 때문이다. 필자가 대학원 졸업 후 발령받고 근무했던 학교의 교감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옥대호 선생은 필자에게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설명했다. 그가 무려 10개월 가까이 투옥생활을 했지만 미결수 상태였기 때문에 수형 기록 등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불과 2년 같이 근무하다 학교를 떠나며 선생과의 인연은 끊어졌다.필자가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의 클라이막스를 이룬 '무등독서회'라는 비밀결사를 공부하다 그가 핵심 인물임을 알았다. 무등독서회의 존재를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광주서중학생들이 조직한 '무등회'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서당훈장으로 한약방을 한 옥치원의 5남 중 4남으로,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에서 태어났다.옥치원이 함평에서 한약방을 운영함에 따라 소학교를 함평에서 다녔다. 대화심상소학교를 다닐 때 통솔력이 뛰어나 6년간 급장을 한 옥대호는, 성적도 1위를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서예, 미술, 글짓기, 동요, 동시 등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소학교 교지에 그의 글이 게재되기도 했다.이렇게 똑똑한 그가 말도 어눌하고 뭔가 부자연스러웠던 것이 8개월 계속되는 고문 때문이었다.1941년 3월 25일 대화심상소학교 6년 과정을 마친 그는 다음 달인 4월 8일, 1938년 4월 공립학교로 새로 문을 연 광주사범학교에 심상과 4회로 입학했다.광주사범학교 학적부에 보면 그는 체련(體鍊)이 우수하다고 돼 있다. 사범학교 시절 유도부를 했다. 교련, 체육, 무도 과목에서 '우(優)', 서도(書圖) 교과는 '수(秀)' 평가를 받았다. 예체능에서 탁월한 소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사실임을 말해준다. 체력장도 상급(上級)이었다.3학년 때와 4학년 때 학적부의 성행평가에 각각 '과묵, 음울(陰鬱), 표리가 있음'이라고 돼 있다.3, 4학년 때는 1943년, 1944년 시기로 임시정부와 연결된 비밀 결사체 무등독서회를 결성해 조직을 강화하고 항일 운동을 펼치던 시기였다. 그가 결전의 순간을 준비하며 일체 표정을 숨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사범학교 담임 교유(敎諭)가 작성한 성행평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결전의 시기를 준비하던 독립운동가의 담담한 모습을 느끼게 한다.그는 4학년 때 '사고로 구인됐다'라고 학적부에 나와 있다. 그가 4학년 때인 1944년 10월 무등독서회 사건으로 연행돼 구속됐다고 하는 것을 학적부는 말하고 있다. 이때 그의 사고 결석일수가 109일로 나와 있다. 3학년 때 질병 결석 1일과 비교해도 사고 결석일수와 구인이 관계가 있음을 알려준다.그는 1946년 1월 14일 졸업했다. 정상적으로 보면 1945년 3월에 해야 옳다. 그럼에도 1년 늦게 졸업한 것은 1944년 10월부터 이듬해인 1945년 8월 16일까지 투옥된 것과 관련이 있다.이제 옥대호 등이 조직한 무등독서회 결성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무안 출신인 곽이섭, 함평 출신 허종철과 함께 자취했던 그는 무안향우회를 결성해 결사의 토대를 구축하려 했다.1941년 9월 옥대호는 무안 출신 곽이섭, 이경채, 정병광, 여기에 함평 출신인 허종철까지 포함해 광주 누문동 정병광 하숙집에 모여 '무안향우회'라는 위친계를 조직하고, 문서를 작성했다.심상과 4회, 5회까지 뜻이 같은 동지들을 규합하기로 했다.무안향우회원들은 서석동 42번지 안동영 학우 집에 모여 임시정부 밀명을 받고 들어온 나주 출신 김준모(당시 일본 중앙대학 재학)로부터 정보를 들었다.옥대호 등 무안향우회원들은 이 조직을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비밀결사로 전환하기로 하고 뜻 있는 동지를 규합했다. 마침내 1942년 2월 무안향우회를 계승한 '무등독서회'가 탄생했다.무등독서회 창립 당시에 는 옥대호를 비롯해 이경채, 안동영, 정광영, 허종철 등 무등향우회 전원과 전북 순창이 고향인 홍완표를 포함한 10명이었다. 이들은 첫 모임에서 '무등독서회'로 결정하고, 매달 2회 만나자고 결의했다. 홍완표에게 전주사범, 순천농림, 광주사범 연합조직을 편성하는 문제를 일임했다.1942년 4월 무등독서회 2차 모임을 갖고 행동강령을 작성해 미군 상륙과 같이 행동대원 봉기토록 학도대 편성을 결의하고 "군국주의는 멸망한다. 일본은 물러간다"라는 삐라와 벽보를 명치정(현 금남로) 일대와 일본인 집 곳곳에 부착했다. 이와 동시에 곽이섭이 제작한 태극기를 나누어 가졌다.이들은 무안 사창 일대, 이웃 몽탄, 그리고 허종철의 동네인 영흥리 일대에서 초저녁 동각 사랑방에서 연합군 승전 소식과 임시정부 정황을 소개했다. 그리고 옥대호는 그의 외가가 있는 무안 일로 도장포의 주민들에게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홍보했다.이들은 공출 결사 반대, 징용, 징병 반대 결의 등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얻어냈다.이 무렵 이경채, 조규학, 안동영, 노동훈 등은 학교에서 전남 경찰부 고등계 형사들에게, 홍완표 등 3명은 전북 경찰부 고등계 형사들에게 체포됐다. 죄목은 '비밀결사 결성죄', '치안유지법 위반죄'였다. 홍완표의 친형 홍완식(목포 척식회사 행원)은 목포에서 체포돼 전북 경찰부로 압송됐다.옥대호는 전남 경찰부에서 전북 경찰부로 이송됐는데, 그곳에는 이미 체포돼 온 허종철, 곽이섭, 정병광이 고문을 받고 있었다. 1945년 3월 9일 여러 경찰서에 분산돼 조사받던 회원들이 광주경찰서로 통합 이감시켜 조사했다.이들을 통합 수감한 이유는 광주경찰서에는 사상범만 모두 수감한다는 조치 때문이었다.국가보훈부에는 이들 공훈 사실이 1945년 3월 투옥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자료에 근거한 것 같다. 실제는 이보다 훨씬 이른 1944년 10월이었다. 한편 패망이 다가오자 이들에 대한 총살 지령이 6월, 7월 두 차례 있었다. 물고문, 불인두 고문, 장작 곤봉, 난타 등의 고문이 이어졌다. 전 회원들이 모두 뼈다귀 유령의 몰골이 됐다.옥대호 등은 1945년 8월 16일 오후 7시 석방되고, 1주일 동안 광주 치안 임무를 수행하고 8월 22일 귀향길에 올랐다. 옥대호는 함평 학교역까지 실려 갔고, 20리 길을 숙부 등에 엎혀 고향 사창 집에 왔다.곽이섭 광주사범 졸업증서1945년 9월 옥대호 등은 광주사범학교에 복학해 이듬해 1월, 5회와 함께 졸업했다.교사 자격증을 얻었지만,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등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등 체육과에 입학해 1949년 7월 졸업했다.9월부터 제2의 고향인 함평 학다리중 고등학교를 시작으로 목포사범학교, 목포중학교, 목포중앙여자중학교에서 1973년 8월까지 체육 교사로 전남의 중등교육 발전에 공헌했다.1971년 교감 자격증을 취득한 옥대호는 1973년 9월부터 1991년 정년 때까지 영암도포중학교, 나주문평중학교, 무안청계중학교, 일로여자중학교 교감을 역임했다. 그는 독립운동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했다. 말도 어눌하고 부자연스러웠다.강건했던 젊은이가 감옥에서의 혹독한 고문 때문에 평생 그 고통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갔다.그럼에도 그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교사로서, 관리자로서 책임을 다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이 오롯이 전남교육의 사표로 남아 오늘날 '의향'의 전통이 살아 있는 전남교육의 등불이 됐다.옥대호는 동료들의 공적을 밝히는 것을 비밀결사를 결성한 자신의 책무로 인식했다. 그는 앞장서 자료를 모으는 등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대통령표창(1995)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들의 왜곡된 공적 사실을 바로 잡으려고 하다가 2008년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광주교육대학교에는 1928~29년의 학생운동과 무등독서회의 항일 투쟁을 기억하는 학생독립운동탑이 우뚝 솟아 있다.그러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는 '무등독서회'는 없고, 주역인 옥대호 선생 사진도 없다. 후손이 똑똑하면 없는 역사도 만들지만, 후손이 그러하지 못하면 있는 역사도 남의 역사가 된다.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두 눈 부릅떠야 할 때이다.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 대를 이은 항일투쟁, 교육에 녹아들었다
- · 열악한 처우에도 학생들 민족의식 일깨웠다
- · 임시정부와 궤를 같이하며 조직적 독립활동 전개
- · 판결문 기록 한 줄뿐이지만 일평생 독립운동·민족교육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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