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칼럼] 문학의 자리, 예술의 자리, 사람의 자리

@조덕진 입력 2024.11.13. 17:15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 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것일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게 아니라는 듯이."(한강 '소년이 온다' 중)

2024년의 '제 8 기후대'

한강의 노벨문학상 소식에 불현듯 2010년대 중반 광주비엔날레 전시장 1층 초입에 설치됐던, '태극기로 감싼 관'이 생각났다. '동호'의 의문을 형상화했던 듯해 수소문했다. 기억의 반란이란. 그 관은 독립작품이 아니고 도라 가르시아의 설치작품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Nokdu bookstore for the living and the dead)'의 일부였다.

녹두서점 사장, 김상윤 전 윤상원기념사업회이사장에게 연락했다. 그에게 다시 듣는 이야기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되묻게 했다. 바르셀로나를 거점으로 영상과 미디어, 설치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해온 가르시아는 2016년 광주비엔날레 작가로 선정되자 광주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어떤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가 논란이 되고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노래' 하나 부르지 못하게 하던 시절이다. 노래를 따라나선 가르시아는 5·18,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 녹두서점에 이르렀다. 광주, 5·18의 '알레프'를 고민하던 가르시아는 '녹두서점'으로 형상화했다. 보르헤스의 '알레프'. 무한한 세계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실체, 그 무엇.

'태극기로 감싼 관'은 '녹두서점'의 책장 앞에 놓였던 조연이었다. 그렇게 본체는 까마득히 가라앉고 '태극기' '관'이 기억 위로 강렬히 올라왔던 것이다. 마치 가르시아의 메인 작품이었던 냥. 심지어 2016년 당시 취재했던 내용이었다.

가르시아는 그해 광주비엔날레 '눈'상 본상을 수상했다. 당해 최고의 작품에 수여하는 영예로운 상이다. 그해 광주비엔날레 주제가 '제 8 기후대(예술은 무엇을 하는가?)'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질문들이 이어진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

질문의 연상을 따라나선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학살',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임철우의 '봄날', 최종운의 '오월의 사회과학', 수전손택의 '타인의 고통'...

'소년이 온다'. '무서운 침묵과 집중력'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한 강의 '지극함'에 숨이 멎을 듯하다, 가슴 먹먹하다. 그녀의 호명에 억울한 죽음들이, 그들의 고통이 해원 될 듯하다. 아니, 내가 보살핌을 받는다.

'타인의 고통'으로 관조하지 않는다. '그 일을 쓰기 위해, 거기 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고통'이었던 것 같아요. 압도적인 고통. 이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거의 매일 울었어요". 에필로그에서는 '가위에 눌려 깨거나, 너무 고통스러워서 소설을 쓸 수 없었다'고 전했다.

10년에 걸쳐 '봄날'을 펴냈던 임철우의 고통, 목숨을 건-조선대 김형중 교수는 그의 작업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목숨을 건 과정이었다고 평한다- 고통도 떠오른다.

그렇게 한 강은, 그들은, 약자들의 참상과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목소리가 전달된 이상, 상처받은 약자들-감히 말하자면 너무 고통스러워 안에서조차 외면하고 싶어하는 -은 더 이상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한 '품위'있는 존재로 지상에 자리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학살'. 피카소가 그 작품을 파리 만국박람회에 내건 순간, 세계는 스페인 작은 마을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백 명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살아났다. 한국전쟁에서 학살당한 이들도 피카소의 호명('한국에서의 학살')으로 존재를 확인한다.

동호라면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 나라는 일제강점기의 참혹함을,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인의 원혼을 증언-고발·위로-하는 미술작품 하나가 없을까.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을까, 있기는 했을까.

5·18기록관이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해외문화원과 전시행사를 논의했더니, 해당 문화원 왈 "우리는 정치적인 것은 하지 않는다"고 했단다.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배출한 나라의 해외 한국문화원 수준이 참사 지경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들, 수많은 '한국의 아이히만'들이 도처에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벨라루스가 아닌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지경이다.

한국의 알레프. 5·18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여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소년이 온다' 에필로그 중)

조덕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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