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가장 긴 여행

@신혜진 소설가 입력 2024.10.06. 19:29
신혜진 소설가

둥글게 배치한 책상 위에는 종이 명패가 붙어 있다. 아이사투, 파티마, 쏙 썽뚜이, 플로렌스, 술레만, 이아섹, 파투, 혜진, 마마두... 9월 새 학기를 맞아 새로 들어간 프랑스어교실의 학생은 아홉 명이다. 1년 동안 학생 숫자는 늘거나 줄어들 것이다. 학생들이 자기 이름이 적힌 책상을 찾아 앉는다. 히잡 쓴 여성이 세 명, 백인 남성 한 명, 동양인 두 명, 젊은 흑인 남성 세 명... 선생님도 학생들도 아직은 서로 어색하다. 가방에서 노트와 연필을 꺼내는데 소근소근 대화하던 흑인 청년 둘이 폭소를 떠뜨렸다가 쿡쿡 웃음을 참는다. 건너편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앉아있던 흑인 청년이 초조하게 다리를 달달 떨어댔다.

선생님은 알이 두툼한 안경을 올리더니 학생과 명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꽃무늬 스카프를 멋스럽게 늘어뜨린 노부인이다. 돌돌 말린 세계지도를 펼쳐 칠판에 붙이는 손가락이 희고 통통하다.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프랑스어교실은 회화는 가능하나 읽고 쓰기가 어려운 외국인들이 학생 대부분이다. 특히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인들은 속사포처럼 불어로 말하다 책만 펼치면 갑자기 더듬거린다. 문맹인 것이다. 나는 '한국인답게' 읽기, 쓰기, 듣기는 좀 되지만 말하기가 어려운 유일한 학생이다. 또박또박한 한국어 억양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서 프랑스인들이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

선생님이 세계지도 옆에 이름, 나이, 국적, 직업이라고 판서했다. 첫 날이라 자기소개를 하려나 보다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프랑스어를 궁굴리는데 선생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모니크입니다. 나는 약사로 일하다 은퇴했고 지금은 여러분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전화번호는... 여러분의 이름을 외워서 제대로 발음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예요. 미리 양해 부탁드려요."

Madame Monique: 06 09... 학생들이 저마다 공책에 선생님의 성함과 연락처를 적는데 다리를 떨던 청년은 책상 아래 양손을 늘어뜨린 채 칠판만 바라본다. 그의 앞 명패에는 마마두라고 적혀 있다. 나는 어쩐지 그 청년이 신경 쓰였다. 선생님이 그에게 A4 종이와 초록색 연필을 건넸지만 그는 연필을 들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윽고 자기소개가 시작됐다. 한 사람씩 소개가 끝나면 선생님은 세계지도에서 나라를 찾아 스티커를 붙인 후 발음이나 문법을 교정해 주기도 하고 간단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내 이름은 혜진입니다. 프랑스어에는 H 발음이 없으니까 그냥 예진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나는 작가입니다."

대한민국에도 동그란 스티커가 붙는다. 작가라는 직업에 흥미를 느꼈는지 프랑스에 왜 오게 됐느냐고 마담 모니크가 내게 물었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 정말이지 왜 프랑스에 오게 됐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설명은 자유지만 때로는 자유조차 번거로워 굳이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당신은 왜 사나요?' 앞에서처럼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튼 프랑스에서 사는 건 말하지 않아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라 가끔 왜 프랑스에 왔는지 질문을 받는데 그때마다 나는 쩔쩔맨다.

"설명하기 좀 복잡합니다."

마담 모니크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키며 다른 학생에게 눈길을 보냈다.

"내 이름은 마마두입니다. 나는 열다섯 살입니다."

다리를 떨던 청년은 단 두 마디로 자기소개를 끝내버렸다. 그럼에도 열다섯이라는 숫자에 다른 학생들이 탄성을 질렀다. 우리들 중 마마두가 가장 어렸다. 선생님은 그에 대해 미리 아는 게 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급우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특히 같은 흑인 청년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학교에 잠시 다녔고, 내전을 피해 가족들이 흩어져 고향을 떠났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교실이 소란해지지 않도록 프랑스어를 칠판에 적었다. 가장 먼, 가장 가까운, 가장 긴, 가장 짧은, 가장 좋은 등등... 최상급 표현이었다. 최상급 표현은 경쟁을 부르고, 경쟁은 집중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장치라는 걸 선생님은 잘 아는 듯했다. 그녀가 지도에 붙인 스티커들을 가리키며 파리에서 가장 먼 곳과 가장 가까운 곳을 물었다.

"그럼 누가 가장 긴 여행을 했나요? 혜진, 남한에서 파리는 가장 멀어요. 얼마나 걸렸어요?"

비행기로 열두 시간 걸렸다고 대답하자 쏙이 나섰다.

"캄보디아는 직항이 없어서 비행기로 16시간 걸려요. 그러니까 내가 가장 긴 여행을 했어요."

"나는 파리까지 24시간 동안이나 버스를 타고 왔어요. 그러니까 내가 가장 긴 여행을 했어요."

포르투갈 사람 이아섹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왔지만 자신이 가장 긴 여행을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십 넘은 아저씨가 급우들을 이기고 싶어 목청을 올리는 게 귀여워서 학생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선생님이 꼭 집어 마마두에게 파리까지 오는 데에 얼마나 걸렸는지 물었다.

"3개월."

"어디어디 거쳐서 왔어요?"

마마두는 아프리카 남쪽 고향에서 북쪽 튀니지 항구까지 대륙을 종단하며 거쳤던 나라 이름들을 천천히 발음했다. 그 다음 몰타해협을 건너 이태리로, 유럽에서 파리까지 구불구불 지나온 산맥과 나라들을 말했다. 아프리카 나라 이름들은 대부분 내가 모르는 곳들이었다. 마마두의 담담한 음성을 듣는데 왠지 마음이 아팠다. 3개월 루트를 모두 말한 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여행을 했어요."

그가 다음부터 프랑스어교실에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걸 물어봤고, 마마두는 너무 자세히 대답했다. 그는 아직 설명을 피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두려움 따위는 용기에게 던져주었으나 어디에도 여장을 풀지 못한 채 살아가는 청소년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석 달은 짧은 시간이지만 목숨 건 여정일 때는 얘기가 다르다. 파리에서 혈혈단신으로 살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에 열다섯 살 마마두에게 어쩌면 더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 중 가장 긴 여행을 견딘 그에게 책상 앞 벽에 붙여두고 내가 약해질 때 가끔 읽는 문장들을 건네주고 싶었다.

앞으로도 고개 숙이지 말라고, 다리를 떨면 네가 초조하다는 걸 누군가 알아챈다고, 그리고 삶을 사랑하라고...

고향을 그리워 말라.

어디서 왔는지 묻지 말며,

어디로 간들 두려워 말라.

항해가 곧 우리의 고향이니,

끝없이 가는 이 여행길을,

삶을 사랑하라.

- 니코스 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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