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답사기] 꽃과 돌담이 먼저 말해준 장소성

@김혜진 입력 2026.04.27. 15:32
‘나무심는 건축인’ 2026 답사-양평 메덩골정원
나무심는건축인 답사 참가자들이 메덩골정원 입구의 메꽃 형상 조형물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메덩골정원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다. 마치 고향길 어귀에서 오래 기다렸다는 듯 길을 따라 우리를 반겨주는 모습이었다. 그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 장소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건축의 형태나 재료, 공간 구성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갑고 단단한 건축적 요소를 만나기 전에, 생명 있는 꽃 한 송이가 먼저 그곳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었다.

지난 24일 나무심는건축인 답사에 함께해 양평 메덩골정원을 찾았다. 이른 아침 광주에서 출발해 긴 시간을 이동한 끝에 도착한 그곳은 단순히 잘 조성된 정원이 아니었다. 자연과 건축, 정원과 사람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조용히 관계 맺고 있는 장소였다. 건축은 풍경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고, 정원은 건축의 배경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둘은 함께 놓이며 하나의 깊은 경험을 만들고 있었다.

‘메덩골’이라는 이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메덩골은 메꽃이 많이 피던 골짜기라는 뜻을 담은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흉년이 들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메꽃을 따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름 하나에도 그 땅을 살아낸 사람들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화려하게 꾸며진 장식적 정원이라기보다, 삶을 견뎌낸 땅의 기억을 품은 장소로 다가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길가의 진달래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단순히 봄을 알리는 꽃이 아니라, 이 땅이 오래 품어온 기억을 먼저 건네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건축보다 먼저 꽃이 장소를 말하고 있었고, 정원보다 먼저 땅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왔다. 장소성은 때로 거창한 설명보다 작은 꽃 한 송이, 오래된 이름 하나에서 더 선명하게 전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덩골정원으로 향하는 길가에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다. 꽃이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며 고향길 같은 정서를 전한다.

메덩골정원에서 오래 마음에 남았던 또 하나의 장면은 남도 돌담길이었다. 고향의 내음이 느껴지는 그 돌담길은 얼핏 보면 투박하게 막 쌓은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투박함 때문에 오래된 마을 길의 정겨움이 살아난다. 안내를 통해 들은 바로는, 처음 돌담길을 만들었을 때는 돌을 너무 반듯하고 정교하게 쌓아 본래 의도했던 고향의 정취와는 다른 이미지였다고 한다. 결국 잘 쌓은 돌담을 다시 허물고, 오래전 남도의 마을 길에서 보았을 법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쌓아 지금의 돌담길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건축과 공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우리는 때때로 완성도를 정교함이나 새로움에서만 찾으려 한다. 그러나 어떤 장소에서는 너무 잘 만든 것이 오히려 본래의 감각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남도 돌담길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형태보다, 시간의 흔적과 사람의 손맛이 느껴지는 투박함이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잘 만든 것보다 어울리게 만드는 것, 새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보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느껴지게 하는 것. 그것이 지역성과 장소성을 다루는 중요한 태도일 것이다.

건축인은 늘 건물을 통해 장소를 말하려 한다. 대지의 조건을 읽고, 기능을 배치하고, 구조와 재료를 검토하며 공간을 만든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 먼저 다가온 것은 건축적 설명이 아니라 길가에 핀 꽃의 감각이었고, 투박한 돌담이 전해주는 고향의 정서였다. 좋은 건축은 장소의 기억을 새롭게 덮어쓰는 일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있던 자연과 시간, 사람의 감정을 더 잘 느끼게 해주는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덩골정원의 남도돌담길. 투박하게 쌓은 돌담은 오래된 마을 길의 정겨움과 고향의 내음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광주와 전남의 지역 건축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이번 답사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건물을 지어왔다. 공공청사, 문화시설, 체육시설, 관광시설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 건물들이 시민에게 얼마나 따뜻한 쉼을 주고 있는지, 지역의 풍경과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는지는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건물의 규모나 형태만으로 좋은 공간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다시 찾고 싶어 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때 비로소 공간은 장소가 된다.

이번 메덩골정원 답사도 그런 마음의 연장선에 있었다. 메덩골정원으로 향하던 길가의 진달래는 내게 건축보다 먼저 장소를 알려주었고, 남도 돌담길은 정교함보다 정겨움이 더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좋은 건축은 바로 그런 감각을 지우지 않고, 더 깊이 머물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건축은 건물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땅을 바라보고, 사람을 맞이하는 태도로 공간을 만들 때, 건축은 비로소 도시와 삶을 따뜻하게 바꾸는 힘이 된다.

한편, 나무심는건축인은 1999년 생활 속 지속 가능한 공간을 꿈꾸는 건축인들이 참여해 출발한 단체이다. 지난 2021년 가을 남구 노대동 분적산에서 배롱나무 50그루를 식수하며 4기(상임대표 박홍근)가 출범했다.

살아 숨 쉬는 터전을 만들기 위해 작지만 소중한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나무를 심는 마음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슬로건 아래 환경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사람 사는 인본주의 건축을 지향하며 주민과 행정,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최병민 이담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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