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절제된 표현으로 존재의 소멸을 응시하다

@김문홍 극작가 입력 2024.01.24. 16:26
푸른연극마을 연극 '더 파더'

'지금-여기서-인간답게'라는 기치를 내걸고 1993년에 창단된 광주 극단 '푸른연극마을'이 지난해 30주년을 맞이했다.

처음 가진 마음이란 극단의 연극적 신념과 작업 태도, 그리고 추구하는 레퍼토리에 언제나 반영될 수 있기 때문에 허투루 봐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지금-여기서'는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을 천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답게'는 연극적 신념이나 태도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단의 연극적 정체성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극단의 무게중심을 지탱하고 있는 두 사람은 오성완과 이당금 부부 연극인이다. 두 사람 모두 배우이며 연출, 그리고 극작을 겸하고 있다.

이번에 선택한 레퍼토리 역시 의미가 깊다. 오랜 세월 무대 위에서 또 다른 삶과 인생을 연기해 온 남편인 오성완 배우에게 역할의 무게중심을 두고, 그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아내 이당금에게 연출을 부여한 작품이 바로 '더 파더'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플로리앙 젤레르의 희곡으로, '가족 3부작' 중의 첫 번째 작품이다.

서울 공연에 뒤이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극단 푸른연극마을이 공연하는 '더 파더'(플로리앙 젤레르 작, 이당금 연출, 120min, 2023. 1.17~2.3, 씨어터연바람)는, 30주년을 보내고 다시 한번 극단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다잡는다는 뜻에서 의미 있는 작품으로 자리매김 된다.

'더 파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80대 아버지 앙드레(오성완 분)와 그의 딸 안느(이당금 분)가 벌이는 일종의 심리적 드라마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 앙드레의 시간에 대한 집착, 그리고 딸 안느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상적 사건과 갈등이 서사의 추동력이 되고 있다.

그래서 무대 연기가 내공이 없이는 소화하기가 불가능한 작품으로 연출의 주안점 역시 아버지 앙드레 역의 오성완 배우의 내공에 기대어, 명료하지 않고 불가지한 심리적 풍경을 그가 어떻게 가시적인 액션으로 만들어 내느냐에 초점 심도를 맞추고 있다.

안느를 제외한 사위 피에르(김영균 분), 간병인 로라(김현경 분), 간호사(오새희, 김도현 분) 등 주변 인물 역시 아버지 앙드레의 심리적 뒤엉킴으로 가시화되는 시간과 공간의 망상에 가까운 집착의 심리적 풍경을 흔들리지 않게, 결코 튀거나 가라앉지 않게 연기를 해야 하는 데에 연출의 세공력을 쏟아내게 하는 데에 요점을 두고 있다.

흔히 연극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서사의 본질적 속성과 주제의 암시적 은유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번 공연의 첫 장면은 약 3분 간의 시간 동안 아버지 앙드레가 무대 후면 중앙의 의자에 파묻힌 채 앉아 심리적 혼란으로 인한 마음의 뒤엉킴을 묘사하고 있다.

음악감독인 이상록이 작곡하고 무대에서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의 음률만이 앙드레의 마음 풍경을 묘사하는데 시간의 실타래가 꼬여 기억을 잃어가는 심리적 혼란을 강약의 높낮이와 완급의 리듬으로 형상화시키고 있어 아주 인상적이다.

마지막 장면 역시 간호사를 어머니의 모성으로 착각한 채 의지하며 안도하는 앙드레의 뒷모습, 모로 누운 뒷모습 위로 마치 시간의 소멸처럼 꺼져 가는 조명 속에서의 존재의 소멸로 인간 삶의 덧없음을 관객의 가슴에 방점을 찍듯 연민으로 마감하고 있어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연극에서 아버지 역은 그 자체가 바로 서사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40여 년의 연기 내공을 지닌 아버지 앙드레 역의 오성완은 흔들리는 대사의 억양과 초점을 잃은 표정과 시선 처리, 그리고 시간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마임으로 존재의 소멸을 극명하게 연기하고 있다.

연거푸 달싹이는 입술과 초점 잃은 시선 처리는 점점 쇠락해 가는 시간의 기억을 표현하는데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세공력은 연기력 못지 않게 도드라져 보인다.

우선 음악의 선택과 무대 디자인과 장치에 있어 그 장점이 드러난다.

집안 내부의 벽면과 가구의 기하학적인 배치와 흑백의 색조로 설정한 콘셉트가 인상적이다. 무대의 색조는 주인공의 시간에 대한 소멸에 걸맞게 흑백으로 양분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흰색이 단연 압도하고 있는데, 이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에 대한 소멸과 존재의 사라짐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표현처럼 흰색은 시간의 소멸에 따른 존재의 사라짐을 상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은유하는 생음악으로서의 피아노 반주는 인물의 심리적 풍경을 은유하고 있다. 피아노의 흑백 건반과 같은 무대 디자인은 존재의 형태로서의 흑과 소멸로서의 백을 상징하고, 사이 사이에 걸려 있는 색깔 있는 액자는 행복했던 기억으로서의 찬란했던 시간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극단 푸른연극마을의 '더 파더'는 절제된 표현으로 존재의 소멸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무릇 목숨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듯, 인간 역시 소멸을 감수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일종의 심리적 드라마로 배우의 연기 자체가 바로 서사의 추동력이 되고 있는데, 아버지 역의 오성완을 비롯한 모든 연기자들이 심리적 풍경을 절제된 연기로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권위적인 존재에서 시간과 기억의 소멸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심리적인 마임으로 연민을 자아내게 한 아버지 앙드레 역의 오성완은 연륜이 주는 내공으로 섬세하게 서사를 직조해 나가고 있다.

거의 2시간 가까이 되는 러닝 타임을, 그것도 연극적 액션이 별로 없는 서사를 절제되고 섬세한 심리적 연기로 명료한 서사로 거듭나게 한 모든 공을 연기자에게 돌려도 충분치 않은 작품이다.

시종일관 인물의 심리적 풍경과 분위기를 피아노 반주로 살려낸 음악감독, 기하학적 문양의 무대 디자인으로 시간의 뒤틀림이라는 주제를 명료하게 가시화한 무대 디자인과 장치, 그리고 이 모든 개성적인 분야를 주제라는 핵심에 접근하기 위해 절제로 조율한 연출의 세공력은 가히 도드라져 보인다.

극단 푸른연극마을은 앞으로의 또 30년을 맞이하기 위해 첫 마음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여정을 위한 결의를 다져야 할 때이다. 관객에게 재미를 주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찰을 잘 어우러지게 하는 작품을 빚어내야 할 것이다. 연극은 한 번 공연하고 나면 사라지는 일회성의 한계성을 지닌 공연예술이기에 더욱 더 가열찬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김문홍 극작가

슬퍼요
1
후속기사 원해요
1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