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무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살짝 부는 바람에서 가을이 오고 있음이 느껴지는 그런 저녁 밤, 광주 예술의전당 잔디광장에서 오페라 '박하사탕'이 콘서트오페라의 형식으로 광주시민들을 만났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오페라는 이창동 감독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오페라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다.
콘서트 오페라 형식이란 무대장치나 연기 없이 가수들의 노래와 음악만으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형식을 말한다. 제대로 된 오페라 무대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약간 있었으나, 무대장치를 바꾸고 배우들이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보니 오히려 음악이 속도감있게 진행돼 더 효과적이 면도 있었다. 게다가 큰 스크린에 LED 영상이 준비되었는데, 오페라 공연의 또다른 형식으로 생각해도 좋을 만큼 영상의 시각적 이미지들이 극의 이해에 도움을 줬다. 출연한 가수들의 연주도 훌륭했고 합창단(아르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카메라타전남)의 극을 끌어가는 힘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 오페라는 광주시민들과 만나기까지 꽤나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9년 시연회를 거쳐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2020년을 겨냥, 작곡가는 음악 출연자만 150명에 이르는 대규모 그랜드오페라를 완성했다. 그러나 코로나와 광주 문화예술회관의 공사로 서울 국립극장에서 초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 오페라사에 하나의 역사로 기록될 의미있는 작품이 탄생했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광주에서는 작품이 탄생된지 4년 만에 시민들과 마주한 셈이다.
왜 하필 오페라인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대중들의 선호도가 높은 뮤지컬이 낫지 않느냐 할 수 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장르인 뮤지컬로는 이미 5·18을 주제로 제작된 바 있다. 그런데 5·18 처럼 무거운 주제가 담고 있는 장엄함을 표현해 내기에는 내기에는 오페라만한 장르가 없다. 대규모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끌어내는 사운드는 우리의 근원적인 연민, 환희, 분노를 바닥부터 끌어올린다. 아침이슬이 나오는 시위대 장면이 그렇다. 시위대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은 없으나 가슴 속으로부터의 장엄함이, 시위대의 숭고함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 오페라만이 주는 힘이다.
20년전 영화 '박하사탕'은 주인공 김영호의 삶이 왜곡된 현대사에 끼여 무너지는 과정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원인의 끝에 광주가 있음을 보여줬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둡고 비참했다. 그러나 오페라로 각색되면서 작품은 김영호의 고통이 아니라 그 어둠과 공포를 가장 열정적으로 살아낸 이들, 순임, 미애, 영미엄마, 함지박아줌마, 박병장, 홍자, 명숙, 그리고 묘비명 장면에서 이름 불려진 모든 이들의 '삶을 지켜내는 힘'에 초점을 맞췄다.
작곡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참 추하고. 사는 게 비루하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그 비루함을 깨려는 노력들이 하찮게 취급 당할 땐 절망적이죠. 그럴 때마다 나는 '광주'를 떠올립니다. 그러면 힘이 나요. '그래, 맞아. 우리에게는 광주가 있었지'라고요."
선량함이, 올곧음이 짓밟혀 나가는게 현실인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의 최선을 다하며 살아내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 비록 지켜만 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폭발적인 에너지로 일어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가 그렇다. 광주 민주화항쟁은 그것이 '시민의식'이며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정신'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광주민주화항쟁의 정신이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에 당당하게 들어가야하는 이유다.
이 작품이 자주 연주돼 광주시의 자랑이자 광주시민의 자부심이 되면 좋겠다. 제 아무리 베를린 필의 연주가 뛰어나다 해도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은 러시아 연주자들의 거칠지만 깊은 음색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 오페라에 등장한 질퍽한 전라도 사투리처럼 "진하게 우러난 '박하사탕'의 연주는 광주시립오페라단의 연주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게 되길 희망한다.
이미경 전남대 음악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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