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학교에서 한라산 백록담 종주하고 왔어요!” “선생님, 이번엔 학교에서 자전거 일주하고 왔어요!”
봉사 활동에서 만나 6년째 인연을 이어온 고등학생이 보내온 문자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문장마다 묻어난다. 대견하다며 한껏 치켜세워 주었다. 그 아이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특급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요즘은 우스갯소리로 “너무 철들어서 재미없다”고 할 정도다.
여기서 잠깐. 독자들은 이 학생이 일반고에 다닌다고 생각하시는가. 짐작하셨듯 아니다. 공립 대안학교 학생이다. 이 학교는 ‘담대한 도전’, ‘상상 그 이상의 상상’ 같은 활동을 내건다. 학생 저마다가 자신의 미래를 창조적으로 설계하고, 자기 삶과 정면으로 부딪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늘 조금 아프다. 정작 필자가 서 있는 일반고 교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학생들의 과목 선택을 도와왔다. 진로·학업 설계 상담을 하다 보면 매년 같은 질문을 받는다. “선생님, 전 뭘 해야 할까요?” 되묻는다. 너는 무엇을 좋아하냐고. 그러면 대개 잠깐 말이 없다. 하고 싶은 것을 묻는 질문에 답을 준비해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열일곱 해를 살면서 그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2025학년도부터 고교학점제가 모든 고등학교에 전면 시행됐다.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여 3년간 192학점을 이수하는 제도다. 네 삶을 스스로 설계하라는 뜻이다. 방향은 옳다. 다만 우리는 선택지를 늘려 주었을 뿐, 선택하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다. 좋아하는 것을 한 번도 묻지 않은 채, 열일곱에게 3년 치를 설계하라고 한다.
3년여 전, 국외 교육연수로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을 다녀왔다. 그곳이 무엇이 다른지 직접 보고 듣고 싶었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화려한 시설도 예산도 아니었다. 덴마크 학생 상당수는 열일곱 무렵 에프터스콜레에서 1년을 보낸다. 우리로 치면 자유학기제와 대안학교를 한데 합쳐 1년으로 늘려 놓은 셈이다. 성적을 올리러 가는 곳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러 가는 곳이다. 덴마크의 교육사상가 그룬트비의 철학을 이어받아 소통하고 실천하는 ‘삶을 위한 학교’다. 우리가 열일곱에게 “대입에 유리한 과목”을 묻게 하는 동안, 그들은 열일곱에게 “너는 누구냐”를 묻고 1년을 내어 준다.
덴마크의 수업 철학은 이렇게 요약된다. 진도를 나가기 전에 ‘왜’를 묻는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 상위 10퍼센트에 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학생에게 스스로 선택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시킨다. 교실은 입시 전쟁터가 아니라 생활공동체이며,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의 현장이어야 한다.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 말을 실행할 시간이 그곳에는 있었고, 우리에게는 없었다.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서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그림 앞에 둘러앉아 있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초등학생에게 뭉크가 이해될 리 없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진짜 앞에 데려다 놓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그런 질문을 자꾸 미룬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대학 가서 하라고.
스웨덴에서 아이를 키우는 한 기업 대표는, 공부를 지나치게 잘하는 것을 오히려 문제로 여기는 그곳 문화를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우리는 정반대다. 99점을 받은 학생이 100점을 받으려 애쓴다. 그사이 아이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몰리고, 우리 청소년의 삶의 만족도는 OECD 최하위권을 맴돈다.
물론 이런 이야기에는 늘 반론이 따른다. 북유럽은 대학 서열이 촘촘하지 않고 등록금 부담도 다르며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도 우리만큼 크지 않다. 교육철학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차이 아니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학교만 바뀌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순서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회가 다 바뀐 다음에 학교를 바꾸겠다는 말은, 영영 바꾸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학교의 제도는 이미 바뀌어 있다. 남은 것은 그 그릇을 무엇으로 채우느냐다.
존 홀트는 ‘The Underachieving School’에서 학교 교육이 놓치는 것들을 열거했다. 자기주도성, 학습 흥미, 하고 싶은 것, 개성, 자유시간, 진로, 창의력, 자기 정체성. 그런데 놀랍게도 이 단어들은 지금 학교 현장에 내려오는 공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 있다. 다 적혀 있는데도 현장에는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삶을 영위하는 교육 실천의 부재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견디고, 그 견딤을 남과 나눌 줄 아는 힘을 기르는 교육. 지(知)·덕(德)·체(體)를 말하던 전인교육의 오래된 목표도 결국 이것이었다.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에도 ‘전인적 성장’은 분명히 적혀 있다. 그 어디에도 ‘대입을 위한 교육’이나 ‘상위 20%를 위한 교육’이라는 말은 쓰여 있지 않다.
지금 국가교육위원회는 내신과 수능을 서·논술형 평가 체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놓고 국민 의견을 모으고 있다. 광주에서도 현장토론회가 열린다. 채점의 공정성은 어떻게 담보할 것인지, 글쓰기가 또 하나의 사교육 시장을 만들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크다. 마땅히 따져야 할 물음이다. 다만 그 논의가 딛고 선 출발점만은 분명하다. 고르는 능력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묻겠다는 것이다. 평가가 바뀌면 수업이 바뀌고, 수업이 바뀌면 비로소 아이들에게 물을 시간이 생긴다.
한라산을 종주하고 자전거로 길을 달린 그 학생은 무엇을 배웠을까. 등수가 아니라 제 다리로 걷는 법을 배웠다. 경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감을 배웠다. 그 아이만 누릴 일이 아니다. 우리 교실의 아이들에게도 돌려주어야 할 것, 삶을 영위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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