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근 전남교육청 지원으로 '독립운동가 교사가 되다'라는 책을 집필한 적이 있다. 필자가 본서를 집필하려 한 까닭이 있었다. 필자는 '판결문으로 본 광주 전남 3·1운동'과 '판결문으로 본 광주, 전남 학생운동'을 연이어 번역 출간하면서 3·1운동, 학생운동 전개 과정에서 교사들이 학생에 끼친 영향이 컸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살필 수 있었다. 특히 1942년 광주서중 학생들이 조직한 '무등회'와 1942년에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무등독서회'에 가담한 학생들이 1910년 이후에 출생하여 악랄한 식민지 교육을 받았음에도 독립운동에 나선 원동력에는 민족 교육을 한 교사들이 있었음을 알았다.
1919년 3월 영광 3·1운동을 이끈 영광보통학교 교사 이병영은 학생들에게 "조선인이 현재 그 행동을 속박당하고 있음이 유감이다. 너희들은 속히 이 구속을 면하기 위해서는 조선독립을 노력해야 한다."라고 하며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하다 구속되었다. 고흥 과역보통학교 장종국 선생은 수업 중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노래를 가르치다 구속되어 징역형을 받았다. 해방 후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김용근은 1937년 개량 서당에서 임시교사로 있을 때 "조선이 일본을 극복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황국신민화 정책에 맞서 강인한 민족정신을 가질 것을 강조하다 투옥되었다.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은 학생들의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무등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남정준의 판결문 일부이다.
"(남정준은) 언문(조선어) 통제, 국어(일본어) 상용, 창씨 제도, 지원병 제도 등은 조선 민족을 멸하고 내지인(일본인)의 세력 신장을 꾀하는 기만정책이라고 판단하고, 조선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열등하지 않은 기질을 소유하고 있으나 일한 병합 이후 중심을 잃고 겉으로는 제국의 압박에 굴복해 있다고 해도 자세히 이를 보면 조선인 사이에는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의식은 쌓여 있고, 때가 이르면 폭발하여 독립의 실현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23년 출생인 남정준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독립의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학교나 사회에서 철저한 식민지 동화교육을 받았음에도 이러한 민족의식을 가졌다는 것은 선배들로부터 이어진 항일운동의 전통 및 교사들의 민족 교육의 영향 때문이라 하겠다. 필자는 이처럼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교사,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 주역으로 섰음을 확인하고 이들의 행적을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필자의 마음을 늘 아프게 한 옥대호 무안 청계중 교감도 오버랩되었다. 필자가 1984년 대학원 졸업 후 교직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잠시 만난 옥대호 교감은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고자 각종 자료를 보여 주며 도움을 요청하였었다. 그때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헤어진 마음의 부채가 30년 넘도록 필자에게 있었다. 특히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는 우연히 본 신문기사는 더욱 필자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늘 말도 어눌한 그였지만, 이번에 확인한 그는 정말 훌륭한 전남의 수재요, 인재였다. 그러한 인물이 엄청난 고문으로 그러한 모습으로 수십 년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필자는 기회 있는 대로 옥대호 교감 선생의 항일운동 사실을 추적하고 있었다. 옥대호 선생 등 광주사범학교 심상과 4회 출신이 주축이 된 임시정부와 연결된 비밀 결사체인 무등독서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연합군이 국내 상륙하면 길을 안내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은밀히 조직을 강화하다 1944년 10월 체포되어 10개월 동안 미결수 상태로 상상을 초월한 일제의 악랄한 고문을 겪었다. 이를 이기지 못한 이들은 요절하기도 하였다. 사실상 옥중 순국한 것과 다름없다. 예컨대 광주사범학교 시절 검도부로 신체 강건한 곽이섭은 무려 10개월 이상 미결수로 갇혀 있으면서 몽둥이 구타, 고춧가루 섞은 물을 코에 붓는 물고문, 전기고문, 불인두 지지기 등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후 5년 만에, 태어난 지 만 2년이 채 되지 않은 아들 하나를 둔 채 부임한 학교에 한 달도 안 되어 순국하였다. 1950년 4월 중순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도 광주경찰서 유치장에서 맞이하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교직에 뛰어들어 신생국가의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처럼 무등회와 함께 1940년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무등독서회의 조직 결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역사는 우연과 우연의 연속이다. 필자가 무등독서회 후손을 찾는 과정에 만난 곽이섭의 아들 수민을 만났다. 그는 태어난 지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부친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는 부친의 친구인 옥대호 교감이 필자에게 보여 준 39년 전 육필원고를 보관하고 있었다. 40년 가까이 필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 원고를 토대로 '무등독서회'를 역사에 내 놓을 수 있었다. 무등독서회 회원 가운데 광주사범 심상과 5회 홍창기가 있다. 그는 현재 미서훈이다. 그의 아들은 필자에게 부친이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기를 바라고 있다.
현재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는 1층 추모관, 2층 전시실이 있다. 그런데 추모관에는 무등독서회 주역 옥대호 선생의 사진이 없다. 2층 전시실에는 무등회만 있고 무등독서회는 없다. 사람들은 무등독서회가 무등회의 오기(誤記)로 생각한다. 필자는 무등회, 무등독서회를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독립운동에 앞장선 교사들의 얘기를 엮어 민족 교육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박해현(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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