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의 기반은 법과 제도보다 먼저 서로를 향한 ‘신뢰’와 ‘배려’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일상의 축소판인 도로 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신뢰의 토대가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여실히 깨닫게 된다. 권리는 주장하되 책임은 외면하고, 타인에겐 엄격하면서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한 이중잣대가 꼬리를 무는 풍경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공동체 의식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행자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음에도 뒤늦게 도로로 뛰어드는 한 보행자의 모습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릿하게 걷는 그에게 파란불을 받고 출발하려던 운전자가 경적을 울린다. 그러자 보행자는 발걸음을 재촉하기는커녕 되레 운전자를 매섭게 쏘아본다. 명백히 교통 법규를 어기고 타인의 정당한 주행 권리를 침해했음에도 ‘나는 약자’라는 이유로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다. 권리를 방종으로 착각하고 배려를 상실한 이기주의의 첫 번째 민낯이다.
그렇다면 보행자의 무책임함에 분통을 터뜨리던 그 운전자는 어떨까.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전혀 다른 가해자로 돌변한다. 편의점에 들르겠다며 어린이 보호구역 횡단보도 모퉁이에 버젓이 차량을 정차한다. 이 불법 주정차로 인해 우회전 차량들의 흐름은 꽉 막히고, 길을 건너려는 아이들의 시야가 차단돼 심각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진다.
사람들의 항의가 이어지지만 그는 뉘우치기는커녕 미간을 찌푸리며 적반하장이다. “5분도 안 걸리는데 사람 참 팍팍하게 구네.” 타인의 무례함엔 그토록 엄격했던 그가 자신의 명백한 불법 앞에서는 ‘작은 융통성’이라며 스스로 면죄부를 준다. 타인의 생명과 안전이라는 중대한 가치를 자신의 5분 남짓한 편의와 가볍게 맞바꿔 버리는 치명적인 모순이다.
차도 한구석에서는 또 다른 위협이 잉태된다. 도로교통법상 전동 킥보드나 자전거, 오토바이는 모두 차도를 이용해야 하는 교통수단이다. 차도가 이들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공간임에도 현실의 도로는 이들에게 한없이 가혹하다. 많은 자동차 운전자들이 체급이 작고 느린 이륜차가 주행 흐름을 방해한다며 거친 적대감을 드러낸다. 꼬리를 물며 압박하고, 신경질적인 경적을 울리며, 노골적인 위협 운전을 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거대한 쇳덩어리들이 뿜어내는 폭력적인 주행에 차도에서 끔찍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킥보드 이용자는 결국 쫓기듯 인도로 방향을 튼다.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명분이다.
하지만 인도로 올라선 순간, 억울한 약자라던 변명은 설 자리를 잃고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 킥보드는 보호 장비 없이 걷고 있는 보행자들 사이를 고속으로 곡예 하듯 빠져나가며 흉기 같은 공포를 심어준다. 차도에서 자동차에게 당한 억울함과 위협을 피하기 위해 자신보다 취약한 보행자의 안전과 권리를 무참히 짓밟는 무책임한 책임 전가다. 자신이 약자일 때는 강력한 보호를 호소하면서, 강자의 위치에 서면 여지없이 타인을 위협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반복되고 있다.
빨간불에 도로로 뛰어든 보행자, 어린이 보호구역에 불법 주정차를 한 운전자, 인도로 돌진한 킥보드 이용자. 각기 다른 주체들의 갈등 같지만 그 본질은 무서울 정도로 맞닿아 있다. 모두가 상황에 따라 자신을 선량한 피해자로 포장하며, 타인에게 주는 피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가볍게 합리화한다. 이 꼬리를 무는 이기주의의 릴레이 속에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신뢰와 연대는 점차 무너지고 있다. 공동체의 책임감은 사라지고 오직 개인의 이익과 편의만 좇는 ‘각자도생’의 그림자가 도로 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도로 위의 규칙은 서로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우리 사회가 합의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나의 작은 이기심이 언제든 타인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무겁게 인식해야 한다. 타인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나만의 구차한 핑계와 합리화부터 멈춰야 한다. 내 걸음이 타인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지, 내 차가 아이들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지 성찰하는 ‘마음의 브레이크’가 절실하다.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의 굴레를 버리고 타인을 향한 존중과 배려의 파란불을 켤 때, 비로소 이 위험한 먹이사슬을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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