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 청년, 청년. 어디에서나 청년이 호명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뿐만 아니라 지금 쓰고 있는 칼럼마저도 '청년' 칼럼이다.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중요한 키워드가 됐으며 그 대척점으로 기성세대에 대한 언급도 증가했다. 그들은 대체로 청년을 힘들게 하거나 청년의 것을 빼앗는 '청년의 적'으로 그려진다. 기성세대 내에서의 자책이나 비판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잘못된 세상을 만들었다느니, 기득권을 다 차지하고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느니 등등 말이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간의 이 제로섬(zero-sum) 게임은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처럼 보인다. 청년 입장에서는 매우 매혹적인 서사이기도 하다. 피해자로 위치한 채 정당하게 기성세대의 책임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언가 찜찜하다. 청년의 어려운 현실을 이렇게 세대 간의 피해-가해의 프레임으로 단순화해도 되는 것일까? 기성세대는 정말로 기득권을 손에 쥐고 청년들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존재인가? 청년층 혹은 중장년층 내에서의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그저 청년세대와 기성세대라는 덩어리로 묶어 서로를 대립시키는 것은 얼마나 타당한가? 우리가 세대 문제로 인식하고, 취급하는 것들은 과연 진정으로 세대 문제인가?
책 '그런 세대는 없다'의 저자 신진욱 교수는 우리가 세대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세대 간 관계를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로 '프레이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우리 사회 속에 세대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세대 간 불평등으로 바꿔치기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보자면, 청년세대와 기성세대가 차지하고 있는 부와 지위의 차이는 막대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기득권과 비기득권을 나누는 구분 선이 세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동일한 세대 내에서도 불평등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청년층의 입장에서 기득권이라 비판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은 사실 그 세대 내에서도 소수에 불과한 모습일 뿐이다. 기득권에 속하지 못한 다수의 중장년층은 현재 청년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청년세대 내에서도 기득권에 속한, 혹은 그 부모가 기득권에 속한 청년들의 삶은 현재 많은 청년들이 울부짖는 어려운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사실상 청년세대가 기성세대라 부르며 분노하는 자들의 실체는 위선적인 정치인들, 특권과 지위를 이용해 부당하게 자식에게 기득권을 물려주는 부모들, 자신들만의 자산가치를 위해 내 집 마련의 꿈을 짓밟는 부동산 이해관계자들, 열정 페이를 요구하는 기업과 클라이언트들, 권위적이고 꼰대 같은 사장님, 부장님들인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기성세대 내에서도 소수에 불과한 기득권층이다. 그들에게 '기성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일반화하는 것은, 기득권에 속하지 못한 나머지 중장년층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자, 소수 기득권의 책임과 잘못을 중장년 세대 전체에게 부당하게 분산시키는 것이다. 비판의 대상이 모호할수록 그 비판은 힘을 잃는다. 이제라도 비판은 구체적 실체와 대상에게 집중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많이들 언급하는 연금 개혁과 같은 문제는, 세대 간 타협과 조율이 필요한 만큼 세대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어느 문제에서나 청년과 기성세대를 불러내며, 세대 간 대립을 유도하는 프레이밍은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여러 관계에서 복잡하게 얽힌 불평등의 현실을 납작하게 만들 뿐이며, 청년 문제의 해결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청년의 적은 단순히 기성세대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대라는 허상의 벽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너머, 기성세대라는 단어로 뭉개져 버린 여러 문제들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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