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으로 곧게 뻗는 거대한 미래도시를 자율주행 자동차와 드론이 질주하고 도시에는 햇빛 대신 어둠과 안개가 짙게 깔려 네온사인만이 휘황찬란 빛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기동대'를 떠올리게 하는 사이버 펑크 분위기의 가상세계가 27분가량의 다채널 영상과 설치 작품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8월 30일 개막을 시작으로 내년 2월 16일까지 진행되는 ACC의 대형 전시 프로젝트 '딜리버리 댄서의 선 : 인버스'다. 게임엔진과 생성형 AI를 활용해 독특하면서도 정교하게 구현한 미래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가상의 세계인 '노바리아'를 배경으로 딜리버리 댄서 앱에 소속된 배달 라이더 '에른스트 모'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작품은 오랜만에 온 감각을 다해 몰입하며 빠져드는 관람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현대 미술가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김아영 작가는 이번 작품으로 ACC(국립아시아문화전당)가 '혁신적인 미래 가치와 가능성을 확장시킨 창조적 예술 언어 생산자를 발굴하고자 만든' 첫 번째 ACC 미래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관련한 전시 대담 프로그램이 지난 9일 토요일에 열려 다녀왔다.
작가는 이 작품을 코로나19로 팬데믹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업실에서 매일 같이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는데, 모든 것이 멈춘 세상을 비현실적으로 질주하는 배달 라이더들을 보며 시공간이 왜곡되는 듯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라이더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있지만 그들의 눈은 배달 플랫폼의 배차 안내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항상 스마트폰을 향해 있었다. 한 번의 경로에 다건의 배달을 수행할수록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 AI가 배차해 준 경로를 빙글빙글 돌며 전달 업무를 계속하는 라이더들의 모습은 작품 속 딜리버리 댄서 앱에 소속되고 한편으론 구속된 라이더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미 인간은 넓은 의미에서는 AI에게 구속당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라이더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김아영 작가는 이번 작품을 구현할 때 50% 정도는 미드저니(Midjourney) 같은 생성형 AI 프로그램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디자이너,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등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해 AI와 계속해서 소통했고 작가의 상상 속에 있는 이미지들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일 처리 속도와 무관하게 AI가 생성한 방대한 데이터 자료가 무방비 상태로 쌓이게 되었다. 생성된 수많은 자료 중 사용할 것과 사용하지 않을 것을 인간이 직접 선택해야 했으므로 꽤 고된 '선택의 노동'이었으며 작가는 이것을 'AI를 관리하기 위한 돌봄 노동'이라고 칭했다.
개인적으로도 통상 SF 장르로 구분되는 창작물들을 즐겨보고 특히 사이버 펑크류를 좋아하는데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근미래를 향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엿보는 재미도 있으나,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는 때문이기도 하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다 고유한 인격을 갖게 된 AI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스토리는 지금껏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전시 대담에 함께 참여한 김해주 싱가포르 아트뮤지엄 선임큐레이터는 AI가 만든 창작물을 볼 때 감탄과 별개로 느끼게 되는 특유의 서늘함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신체를 가진 관람자의 입장으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에 대한 것에 대한 두려움' 일지 모른다는 그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광범위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비교할 수 없는 연산속도를 보여주는 AI에게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이 결국 이들이 만드는 창작품에 대한 이질감과 불쾌함을 만드는 것이다.
이토록 속도감 높은 기술 발전의 전쟁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기에 김아영 작가가 '인간의 인준 없이 AI가 만든 창작품은 가치를 갖지 못하며 AI를 관리하기 위한 돌봄 노동은 당분간 계속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 점이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도록 만들어진 AI는 우리의 일을 완벽하게 대신하기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AI의 돌봄을 받기 위해 일단은 AI를 돌봄 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정교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대화를 교정하고, 더 많은 이미지를 업로드하는 등 새로운 자료를 학습시킨다. 사용자들은 행위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으나 현대인은 시도 때도 없이 인공지능들을 위한 돌봄을 기꺼이 수행하고 있다. 과연 이 돌봄의 노력이 인간에게 자유를 찾아줄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벌써 통신 3사에서 앞다투어 인공지능 비서를 출시했고, 내년부터는 국내에서도 카카오의 카나나, 네이버의 클로바X 등 생성형 AI들이 본격적인 출사표를 던지며 시장에도 커다란 대격돌이 시작될 것 같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찌릿찌릿한 예술적 영감으로 채워보고 싶다면 이번 전시 '딜리버리 댄서의 선 : 인버스'를 두 손 모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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