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효는 진채선을 제자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였다. 더욱 진채선이
낙성연에 가던 해 세 번째 부인마저
죽고 신재효는 홀로 살았다.
진채선도 신재효를 스승 이상으로
사랑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진채선은 조선 최초의 여류명창이다.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판소리계에 여성 소리꾼이 혜성과 같이 나타난 것이다.
1847년 진채선은 고창군 심원면 검당포 어촌의 여양(驪洋) 진씨(陳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선대는 이웃면인 무장면에서 살았는데 할아버지 대에 생활이 어려워지자 포구인 검당포로 왔고 과부였던 단골 김씨와 뿌리를 내렸다.
진채선의 어머니 역시 가업을 이어 받은 단골이었는데, 음률에 뛰어나 굿보다 소리를 좋아하였고 이곳저곳으로 배우러 다녔다 한다. 전라도 지역의 단골은 뛰어난 가창력과 연희를 통해 영혼을 위로하는 역할을 하였기에, 이들의 서사무가는 판소리와 유사한 예능에 가까웠다. 따라서 진채선의 소리는 천부적이고, 태생적인 이어받음이었을 것이다.
1862년, 15세에 이르러 진채선은 계례를 치르고 고창현의 관기가 되었으며, 기녀로서 갖추어야할 학습과정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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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소위 양반 사대부들은 각종 연회에 소리꾼들을 집으로 불러 사랑방에서 소규모 공연을 즐겼다. 그러자 몇몇 뛰어난 소리꾼들은 '명창'으로 대접을 받게 되었고, 전문 예술인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듯 판소리의 위상이 높아지자, 기녀나 세습무 출신 여성들도 판소리에 뛰어들었다. 금기시 되었던 기녀의 판소리 연창도 허용되었다. 이전에 기녀들은 음률과 가무에는 능했으나, 잡가와 판소리는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절의 변화와 함께 판소리를 배우게 되고 명창에 버금가는 인물도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신재효(1812~1884)는 판소리의 이론을 정립하고 '동리정사'를 세워 판소리를 가르친 소리의 대가이며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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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효는 또 고창현의 아전으로 만년에 호장의 직임도 맡았는데, 이때에 80여 명의 기녀들에게 소리꾼 김세종과 함께 판소리를 가르쳤다. 호장은 아전의 우두머리로서 관청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나 연회에 소리꾼들이나 기녀를 동원하는 직분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긴 줄거리와 독특한 기교 때문에 단기간에 익히기가 불가능한 기예다. 판소리 한 마당 완창에 길게는 여덟 시간이 걸리며,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부채 하나만으로 무대를 채워야 한다. 더욱 기나긴 사설을 일정한 계보에 맞춰 정확히 새겨야하므로 보통 남성의 체력으로도 어렵다.
그러함에도 신재효는 진채선을 가르치며, 여성 소리꾼도 남성 소리꾼 못지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869년 진채선이 스물두 살이 되던 해다. 마침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맞춰 전국의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낙성연을 열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판소리 애호가였다. 자신이 사는 운현궁에 박유전, 박만순, 정춘풍 등 당대의 명창들을 불러들여 판소리 공연과 보급에 일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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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선이 네가 고창 대표로 가거라."
신재효는 애제자 진채선에게 손수 지은 '명당축원가', '성조가', '춘향가'를 부르도록 했다. 갓 쓰고 도포자락을 날리는 남자의 복장으로 진채선은 자신의 실력을 한껏 뽐내며 만장의 좌중을 휘어잡았다. 흥선대원군은 진채선의 빼어난 소리에 놀라고, 또 그 소리꾼이 여성임을 알고 더 크게 놀랐다.
"성음이 웅장하고 기량이 대단하구나. 너는 궁에 남거라."
낙성연을 마치고 진채선은 고창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대원군은 놓아주지 않았다. 즉시 진채선을 운현궁의 여악을 담당하는 궁녀로 임명했다. 경회루 낙성연회에서 명성을 떨치며 명창으로 우뚝 선 것이다.
이제나저제나 진채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신재효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대신 크게 낙담하였다.
신재효와 진채선은 서른다섯 살의 나이 차가 있었다. 그러나 신재효는 진채선을 제자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였다. 더욱 진채선이 낙성연에 가던 해 세 번째 부인마저 죽고 신재효는 홀로 살았다.
진채선도 신재효를 스승 이상으로 사랑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정해진 자신의 운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진채선은 그렇게 고종이 친정 선언을 할 때까지, 대원군 곁에서 6년여를 살아야 했다. 진채선에게는 생이별의 가혹한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공신화는 숱한 여성 연예인들이 판소리계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수의 여류 명창들이 배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판소리에 담긴 음란하고 비속한 사설이 사라졌다. 그 대신 여성의 세련되고 우아한 발림을 통하여 판소리는 예술성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창극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니, 바로 혜성처럼 등장한 진채선이 이루어놓은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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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진채선이 운현궁에 3년째 머물던 해 복사꽃, 오얏꽃이 만발한 봄이었다. 진채선이 모처럼 운현궁을 나와 남쪽지방에 내려왔다. 소식을 들은 신재효는 득달같이 달려갔으나,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야했다.
진채선의 나이 스물넷, 여성으로써 아름다움이 무르익은 나이였다. 하지만 신재효는 쉰아홉의 노인이었다. 신재효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진채선의 화려하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우면서 고운 몸짓을 보며 한숨만 내쉬어야 했다.
이날 이후 상사병처럼 앓던 신재효가 칠월 칠석에 진채선에게 지어 보낸 노래가 바로 '도리화가'다. 노래 말미에 신재효는 한글로 '증 선낭'이라 썼다. 곧 '채선 낭자에게 준다.'는 뜻이니, 두 사람의 관계가 사제가 아닌 남녀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세월이 흘러 1873년이다. 고종은 친정선언을 했고, 흥선대원군은 실각하여 양주로 내려가 칩거하였다. 진채선도 운현궁을 나와 전북 김제로 내려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1898년 대원군이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른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을 모신 궁녀로서 더 이상 소리꾼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 추측만 할 뿐이다.
진채선은 최초의 여류명창이요 최고의 소리꾼이었다. 또 도리화가의 화사하나 애달픈 비련의 주인공이었다. 더욱 말년의 생애마저 신비로우니, 그녀는 갔으나 세인들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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