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시대' 갈등 심화
우수인력 의대쏠림은 문제
정부 인력양성 대책 세워야
개업의부터 자연스레 '나눔'
환자 돈으로 생각하지 않아
대화·협상·양보·인정 '중요'
여유 가져야 세상 편안해져

④허정 에덴병원 원장(전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회장)
약력/ ▲북구장학회 이사장(현) ▲광주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전남사회복지 공동모금회장 ▲광주전남발전연구원 이사장 ▲전남 국립의과대학 유치범도민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광주에덴병원을 이끌고 있는 허정 원장(전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회장·74)은 '능력주의'가 판을 치는 타락한 세상에 적극적 사회참여와 나눔, 봉사로 울림을 주고 있다. 장성군 진원면 정미소집 아들 허정은 명석한 두뇌로 당시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 당대 최고의 수재들이 간다는 서울공대 진학을 앞두고 아버님의 갑작스런 비보로 '아쉽지만' 전남대 의대로 방향을 틀었다. 전남대 의대에서도 수위를 달려, 당시 우수인재들이 선택하던 산부인과를 당당히 선택, 일찍 개원의로 나섰다.
당대 우수인재들의 전형을 밟아왔고, 산부인과로 전국 최고의 이름을 알린 허정 원장의 발걸음은 '환자'와 '사회적 약자'들과 한 평생을 함께 했다. 현대의 '능력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소위 '능력'을 과시하며 사회에 군림하려드는 것과 궤를 달리한다. 허정 원장의 삶의 행보엔 능력주의시대, 아귀처럼 자신들의 이익과 잇속만 챙기는 타락한 사회에 귀한 울림이 담겨있다.

-그간 수많은 사회활동을 하시며 '언제나 사회로부터 혜택을 입고 자랐다'는 말씀을 해오셨는데 요즘 같은 타락한 능력주의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 세대는 전쟁 때 태어났다. 아주 어려운 시절이었다. 장성 진원면이 고향인데 우리 초등학교 동창생 60명 중 중학교 가는 수는 채 20명도 안됐다. 머리좋은 친구들도 많았지만 고등학교를 못갔다. 그런 시절에 고등학교, 의과대학을 다닌 것은 사회의 혜택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물론 나도 한순간도 노력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나보다 우수한 친구들도 형편 때문에 학교를 그만둬야했던 시대에 학업을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로부터 혜택을 입은 덕이다.
-요즘 세태는 자신의 성공이 오롯이 자신이 잘나서, 능력있어서, 열심히 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소위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프레임에 멸시를 당합니다. 요즘 청년들의 좌절과 갑질의 근간인데요.
▲우리나라가 짧은 시간에 급속히 성장하면서 나타난 문제라고 본다. 물질적으로 달려오면서 정신적인, 인성적인 교육, 인문학적 교육 등이 등한시된 결과라고 본다. 그러다보니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참 안타깝다. 기성세대들의 자녀 교육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너무 힘들게 산 세대이다 보니 자녀를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키운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같은 사회적 풍토가 계속 될 때 사회의 앞날이 우려됩니다.
▲우리나라가 발전하는데 상당한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미 우리나라 경제는 연 1% 혹은 마이너스 성장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철강, 석유 등 모든 제품이 국제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극단적 저출산으로 국가의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젊은 인력은 없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이 약화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인데, 능력주의 시대가 되고 갈등이 계속해서 심화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우려 밖에 남지 않는다. 중국은 벌써 AI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앞서 가는 수준을 이루지 않았나. 안타까울 따름이다.
-소위 공부 좀 하는 학생들이 모조리 의과대학에 진학하는 사회적 풍토도 정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의 국가경쟁력 약화와 맥이 닿아 보입니다.
▲동의한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이과의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공과대학에 진학했다. IMF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사회 각 분야에 우수 인력이 골고루 진출했으나 IMF로 명문대 출신도 낙엽처럼 잘리자 면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우수한 인력이 사회 각 분야에 골고루 진출해 사회를 이끌어 가야하는데 그 이후 30여년 동안 우수 인력이 모두 의대로 몰렸다. 챗GPT나 딥시크 이런 것을 만들어내는 인재가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됐다.
-사회도 학생들도 모두 피해를 보는 길입니다.
▲선진국들은 우수 인력을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잘 형성돼있다. 임금 차이가 크지 않지만 권위로 보장해주는 식이다. 호주는 기능공이나 학교 선생님, 의사의 월급차가 매우 크지 않지만 사회적 기여에 따라 예우는 충분히 해준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뭘해도 돈만 잘 벌면 최고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지금까지의 말씀에 사회적 기여,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 등이 많이 언급됩니다. 오랜 시간 사회적으로 많은 나눔을 펼쳐온 회장님의 인생 전반의 맥락, 나눔 철학과 맥을 함께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나눔의 계기가 있었을까요
▲특별한 계기랄 것은 없었다. 어머니가 서방시장에서 쌀집을 하실 때 주변 사람들을 많이 돕고 챙기셨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같다. 개업의를 시작할 때부터 이웃을 살피는 일은 자연스럽게 같이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초까지 정읍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했는데 그때도 이웃에 어려운 일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지원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제왕절개율이 40%가 넘어설 정도로 제왕절개가 붐을 이뤘고, 또 병원 운영면에서도 제왕절개가 매우 중요할 텐데 일찍부터 자연분만을 고집하셔 전국적 관심을 받으셨습니다. 당시만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대학 지도교수님의 가르침에 기반한 일로 그 역시 내겐 당연한 일이었다. 은사님은 독일계 병원에서 수련을 하셨는데 독일병원의 공공성, 사람 중심 이런 것들이 몸에 배 기준이 엄격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분만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철학이었다.
-병원 수익을 생각하면 이같은 문화를 선도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환자를 돈으로 생각 해본 적이 없다. 의학적으로 수술이 필요지, 검사 하나도 해야할 것인지 등을 엄격히 판단했을 뿐이다. 그 원칙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많은 의료인들이 그것을 벗어나 잘못 가고 있다. 의료계가, 우리 사회 전체가 그렇게 병들어가고 있다. 돈 되는 과로 가고, 돈 버는 수술을 환자들에게 권한다. 인간의 신체를 능가하는 의료기술은 세상에 없다. 조물주 섭리를 높이 평가해야한다는 생각이다.

-최근의 시국은 터무니없고 가슴 아픕니다. 국민들의 의식은 깨어있고 현실은 참담한데 이럴 때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가 돼야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대화와 협상, 양보, 인정이 중요하다. 오늘날 대화와 포용의 정치를 못하는 것 같다. 통합의 정치가 되어야한다. 군사 독재하가 아니라 민주주의 정치라면 대화와 통합이 필요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제일 잘한 것이 그것이다. 군사 독재 아래 그 많은 핍박을 받은 인물로 과거 원한을 생각하면 통합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시키고 야당 인물을 등용하는 등 대통합을 이뤄냈다. 그런데 윤석열은 0.73% 포인트 차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제왕적으로 군림했나. 다른 사람을 물에 빠뜨리면 자기도 같이 빠진다.
-국가 지도자의 퇴행에, 참사에 국민들이 맘 둘 곳이 없습니다. 특히 광주시민들은 5·18 트라우마에, 제주항공 참사로 심각한 심리적 상처가 큰 데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이 사회를 살아가야할까요.
▲더 나아가야한다, 용서와 관용의 태도가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이 사회가 그래야만 정상적으로 갈 수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면 안된다. 사람마다 다 장단점을 갖고 있다. 장점만 보고 장점만 발전시키면 사회가 발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점을 너무 많이 본다. 조그만 문제만 있으면 끝까지 파고 들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상이 됐다. 여유 있는 태도가 정말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이 세상이, 우리가 편안해질 것이다.
대담=조덕진주필 mdeung@mdilbo.com
정리=김혜진기자 hj@mdilbo.com
사진=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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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어른 김장하' 입소문 타고 인기몰이 영화 '어른 김장하' 스틸컷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의 명신고 이사장 퇴임사 중)시대의 '어른'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진정한 어른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묻는 다큐멘터리가 다시금 화제가 되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광주독립영화관은 오는 17일부터 영화 '어른 김장하'를 재개봉해 관객들을 맞이한다.영화 '어른 김장하' 스틸컷지난 2023년 개봉한 김현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한약방 대표이자 교육인, 시민활동가로서 일평생을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해온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1944년 경남 사천군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열아홉 살 최연소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 진주시 동성동에 '남성당한약방'을 열고 60여 년간 운영했다. 그는 한약방을 운영해 번 수익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며 나눔을 실천했다.김 선생은 1984년 100억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진주 명신고를 설립하고, 10여 년간 이사장으로 지내며 학교시설을 완비한 뒤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했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1천여 명 이상에게 장학금을 주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외에도 교육·문화·여성·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건 없는 나눔을 실천하며 지역 사회 곳곳에 따뜻한 손길을 건네왔다. 김 선생은 2022년 은퇴해 한약방 문을 닫고 현재 평범한 할아버지의 일상으로 돌아갔다.영화 '어른 김장하' 스틸컷최근에는 김 선생과 문형배 헌법재판관과의 인연이 재조명되며 영화 '어른 김장하'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문 재판관은 지난 2019년 4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김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판사가 못 됐을 것"이라며 김 선생에 대한 감사함을 전하기도 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문 재판관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김 선생을 만나 대학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간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광주독립영화관을 비롯해 이달부터 전국 영화관 곳곳에서 영화가 재개봉해 다시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넷플릭스에서도 '역주행'을 거듭해 '오늘 대한민국의 TOP 10 시리즈' 순위권에 오르기도 했다.광주독립영화관은 오는 21일 오후 7시 영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GV)도 진행할 예정이다. 행사에는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기자, 이국언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등이 참석한다. 자신의 선행을 언론에 알리기를 기피했던 김 선생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다큐멘터리에 담아낸 김 기자의 취재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시간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광주독립영화관 누리집을 통해 예매할 수 있으며, 상영시간과 자세한 정보도 누리집에서 확인 가능하다.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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