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 붓질' 단단해뵈는 이 남자··· 못말리는 애처가

입력 2022.02.10. 18:21 김봉일 기자
[곡성 폐교 리노베이션 갤러리… 화가 김갑진]
그림 속에 우주의 본질을 캐고 있는 화가 김갑진. 그는 “한마디로 존재론이다. 인간 존재와 우주 만물에 대한 물음과 성찰, 인간내면의 위안과 평안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고 했다.

한적하고 인적이 드문 후미진 곡성의 한 폐교를 리노베이션한 미술관, 김갑진 갤러리다. 을씨년스런 겨울바람이 화가의 작업실을 가른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사이로 찬바람이 송송 올라온다. 두건을 쓰고 승복 같은 옷차림의 화가가 참 인상적이다. 외투는 걸쳤지만 실내공기가 너무 냉랭하다. 전기난로도, 따뜻한 커피 한잔도 차가운 공기에는 역부족이다.?

미처 작업을 끝내지 못한 크고 작은 캔버스도 있고, 이미 완성된 듯 보이는 맑은 오션블루(Ocean Blue) 빛깔의 특별한 그림도 눈에 띈다. 특별해 보이는 그 그림, 그것은 깊은 바다 같았다. 우주 같았다. 별빛정원이 밤하늘을 수놓고, 언제인가 모를 만남을 몹시도 그리워하는 파란 달빛이 하늘공원에 윙크하고 있는 듯했다. 울트라마린 블루(Ultramarine Blue)라 했다. 찬찬히 응시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느낌이랄까. 우주 생성의 본질을 캐고 있다는 작품이 눈을 호강시킨다. 김갑진(57) 작가의 추상화, 신비의 세계였다. 천지의 조화가 하모니를 이루며 빛선과 소리선으로 사정없이 화폭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우주의 씨앗인 빛과 소리가 그의 캔버스 위에서 만나 오묘하게 뿌려지고 작품으로 영글고 있었다.

'만다라 Blue'라는 개인전 작품. 명상과 힐링효과를 4차원 세계로 구현했다.?

◆ 만다라 블루… 인간·우주존재론 표현

"울트라마린 블루는 저 너머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신비의 색입니다. 그 색을 칠하고, 선을 긋고, 다시 덧입혀 또 선을 긋고 나면 비로소 현(玄)의 세계로 스미게 됩니다. 끝없이 깊고 그윽한 세계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붓날을 칼날처럼 세워 작은 선들을 그어야합니다. 세워진 붓 날을 캔버스 면에 긋는 행위는 황하의 모래알 하나를 추려 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행위의 반복은 끝없는 무한의 영역 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깊은 현의 세계에 맴도는 것입니다. 가느다란 붓끝 하나로 존재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정의 길에 서 있습니다." 그는 "'만다라(Mandala)-블루(Blue)'라는 작품이 인간 존재와 우주 만물의 존재에 대한 명상과 사유, 성찰과 물음을 담아 명상적이고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며 "거시적인 시각이 아닌 미시적으로 바라보고 감상해야만 작품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전업작가의 길을 택한 그는 끊임없는 독서와 명상을 통해 구도자적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는듯하다. 전시 타이틀도 자기실현으로 가는 이정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정표의 키워드가 초창기에는 '벽(碧) 현(玄) 황(黃)' 등의 깊이있는 색채를 탐구하다 까마귀를 통해 신화를 들려주기도 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 방황했다. 급기야 그는 규정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사고의 카오스(Chaos)에 빠져 들어 침류(沈流)나 회닉(晦匿)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다 물지정(物之情)을 모색하며 사물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더니 최근에는 '만다라 블루'라는 새로운 화두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그는 어쩌면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철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화가인지 모른다.

◆대학 갈 바엔 독학으로 미술학 숙달

미술과의 인연은 지난 1983년 고3때 시작됐다. 그림 그리기가 너무 좋았다. 미술반 문턱을 기웃거렸다. 무턱대고 미술반에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미술교사가 다른 학교로 전근됐다. 지도교사가 없으니 미술반은 곧바로 폐쇄됐다. 청천벽력 같은 마음에 교장선생님께 구구절절 간절한 편지를 썼다. 궁즉통이라 했던가. 가까스로 미술반은 개설됐다. 그 때부터 독학이었고, 순천에 있는 전문 미술학원을 오갈 뿐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미술공부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대학입시는 사실 의욕만 앞섰다. 미술공부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하지만 학원비가 너무 비쌌고, 사글세를 전전하며 또다시 독학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 출판사에서 그래픽디자이너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하고 응시했다. 운 좋게 취업의 길이 열렸다. 1년 남짓, 책표지 도안하는 데만 열중했다. 이런 가운데 군대 영장이 나왔다.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미술을 향한 그의 꿈은 계속됐다. 그는 자신을 추스르며 대학에 갈 정성과 용기가 있다면 독학으로 마스터하자고 다짐했다.

1989년 제대 후 지인의 소개로 곧장 제주도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고교동창생을 만났다. 인연이란 게 정말 묘했다. 경양식집 주방장이었던 동창의 도움으로 경양식 요리를 배웠다.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이것저것 가릴 수 없었다. 밤에는 보조요리사로, 낮에는 미술학원에서 그림그리기에 열중했다. 서양 미술사를 비롯한 미술사를 꿰차고 미술용어들도 달달 외웠다. 오로지 살아가는 이유가 '미술'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회사생활 중에도 10년간 국전 출품

조감도와 투시도를 그리는 투시도사무소에 다니던 미술학원 강사가 그의 그림이 좋다고 칭찬했다. 날아갈 듯이 기뻤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건축회사에 입사했다. 날밤을 새면서 조감도와 투시도 그리는 법을 익혔다. 당시는 상업미술이 상종가를 치던 시절이라 또다시 상경을 꿈꾸며 무조건 서울로 입성했다. 투시도가 필요한 회사 전화번호를 무턱대고 돌렸다. 홍대인근의 투시도사무소에 취직했다. 회사 대표는 어디서 이런 보배가 들어왔느냐며 입버릇처럼 말했을 정도였다. 밤낮으로 조감도와 투시도를 그렸다. 그가 보이기에 만족할만한 수준에 도달했건만 건강에는 적신호가 켜졌다.

하는 수 없이 순천으로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가다간 그림 그리기는커녕 투시도사무소 일도 못할 형편이었다. 1992년 아버님의 도움으로 순천에 그림공간이자 디자인사무소를 차렸다. 몇 년 동안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초등학교 동창생인 아내 성수빈(55)씨를 만나 결혼도 했다. 꿈같은 시간이 흐르던 1995년 말 사무실 건물이 통째로 넘어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전세 보증금을 모두 날리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재판에서 승소판결을 받았지만 변호사비와 각종 경비를 제외하고 보니 빈손이었다.

이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꾸준히 10년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노크했다. 상당히 큰 원작을 화물차로 보내야하는 고충을 마다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미술에의 집념을 불살랐다. 돌아오는 건 낙선의 쓰라린 상처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한번은 화물차 운전자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도대체 해마다 출품해도 화답하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포기할텐데 또 보내고 싶냐"며 "보내봐야 소용없는 일을 왜 반복하느냐"고 미술협회를 성토했다는 것이다.


◆1999년 처녀작 '까마귀'로 미술계 입문

그렇게 10년이라는 무상한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미술대전에 '몰빵'하고 있을 즈음인 1999년 7월 미술계를 주름잡던 한 잡지사에서 공모전을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온전한 작품원본을 번거롭게 제출하는 게 아니라 슬라이드 필름만 우편접수하면 된다고 했다. 뭔가 느낌이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까마귀'라는 타이틀로 공모, 입선의 기쁨을 처음 느꼈다. 이게 바로 세상에 나온 그의 처녀작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도 열렸다. 수많은 화가들과의 만남도 그 때 이뤄졌다. 생계를 위한 지난한 노력, 그래도 붓을 꺾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온 모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유지향(烏有之鄕)' 이라는 주제로 춤을 추고, 노래하고, 슬퍼하고, 생각하는 까마귀를 표현한 작품.??

슬픔과 외로움, 고독과 아픔, 고통과 절규를 넘어 유희를 찾아 떠나는 까마귀의 신화를 표현한 '금오도(金烏圖)'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라는 타이틀로 '꺾이어 버린 나무의 변주'를 그려낸 작품.?

"대부분 까마귀는 죽음을 상징하고 흉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신화에서는 태양의 정기가 세 발 달린 삼족오(三足烏)로 형상화되고, 고분벽화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합니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까마귀는 인간의 기도를 하늘의 신에게 전달하는 신성한 전령사로 지혜를 상징하는 길조로 여깁니다. 우리들의 편견과 관념이 아닌 현묘한 광채를 발산하는 까마귀를 순백의 마음으로 자유롭게 스케치하고 싶어서 연구하게 됐습니다."

그는 화순 동복들판과 광양 백운산, 고흥 팔영산, 경북 봉화군, 강원 태백 등 까마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전국 각지를 헤매고 다녔다. 유난히 그의 작품 속에서 무채색의 모노톤을 가로지르는 까마귀의 검은 형상이 많이 등장한다. 어지러운 세상의 질서로부터 사색하고 침잠하려는 그의 성격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명상갤러리 개관이 꿈… 아내 향한 연가도

평탄하지 않은 삶을 대변해주기라도 하듯 그의 작품 속에는 번민과 고독, 방황과 좌절, 슬픔과 설움, 아픔과 상처, 헛됨과 덧없음, 연민과 그리움, 허무와 혼돈의 세계가 숨어있다. 그러나 작품 속에 투영된 얽히고설킨 감정의 기복일지라도 내면세계의 순수와 자유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절제된 마음으로 승화시키는 결단력도 갖추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작가 특유의 긍정을 향한 역설적 가치관과 인생관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사실도 함께 느끼면서….

"제 작품은 한마디로 존재론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인간 존재와 우주 만물에 대한 물음과 성찰, 인간내면의 위안과 평안, 그리고 삶에 관한 깨달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그림을 그리는 이유입니다."

여태껏 가난을 장식품처럼 달고 살아왔다는 김갑진 작가. 살면서 그가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건 묵묵히 곁에서 자신을 응원해주고 희망을 잃지 않게 용기를 북돋아준 아내라 했다. 그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죽는 날까지 작품 활동과 개인전·단체전·초대전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꿈이 하나 있다면 명상갤러리를 만드는 일이다. 소망대로 명상갤러리 그곳에서 그의 모든 작품이 영구 전시 보관되고, 아내를 위한 애뜻한 연가를 목 놓아 부를 수 있는 그 날이 빨리 오기를 희망한다.

김봉일기자 amazingreporter@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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