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부는 소년'에서 '순교자'로 30년 살다 떠난 5·18의 십자가

입력 2023.06.20. 17:39 박지경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④임곡동 윤상원 생가
<임곡동 천동마을 윤상원생가> '천동(泉洞)'은 1480년경 맥반석에서 용출된다고 전해오는 우물이 발견된 이후 그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한다.마을어귀에 들어서면 '퉁소부는 윤상원'열사의 상징물이 방문객을 맞이하고,마을 담장에는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이 벽화와 함께 쓰여 있어서 이 곳이 열사의 마을임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마을 앞으로 누렇게 익어가는 너른 밀밭이 농촌정취를 더하고 있다.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④임곡동 윤상원 생가

우리 집 마당 옆 살구나무와 앵두나무는 새하얀 꽃이 피어 있고 산에는 나리가 가득 피어있었다.(60.3.22) 온 동네는 살구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세상이 되고 있다.(60.4.7) 오늘부터 축사 당번이다. 닭 기르는 일을 맡았다. 닭과 벗을 삼아 먹이를 주고 풀을 썰어주니 닭이 나를 따르게 되었다. 가축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 닭이라 해서 천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같이 대우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에서 깨달았다.(62.8.5) 아이들 중에는 수학여행을 못가는 사람도 있었다. 돈이 없어 못 가는 형편, 그야말로 눈물겨운 생활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돈 한 푼이 없어 수학여행을 못 간다니 그 얼마나 쓰라린 일인가.(62.10.22) 수학여행을 못가는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가서 사정을 하였다. 왜 그렇게 부탁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 반의 기분이며 다 같이 즐기기 위해서다.(62.10.25)

윤상원 생가

윤상원의 어릴 때 일기다. 1950년 광산 임곡 천동마을에서 태어나 11세,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일기를 썼다. 살구꽃이 핀 아름다운 세상과 닭이라 해서 천대해서는 안 된다는 일기 속에 해맑은 소년이 있다. 6학년이 돼서는 수학여행 못 가는 친구 집을 찾아 함께 가도록 해달라고 사정하며 돌아다니는, 어느새 부쩍 커서 곧 청년이 되려 하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단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사람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사람이 참다운 사람이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값어치 있는 일이다.(63.1.21) 집에서 퉁소만 배운다고 아버지께서 꾸중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퉁소를 기어이 배우고 말겠다.(64.2.24) 사람이란 무엇을 바라고 사는 것인가?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허덕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닐까?(65.11.2) 하나님은 인간에게 제각기 지고 갈만한 십자가를 주셨다. 내가 지고 갈 십자가도 지고 갈만하도록 지워주셨을 것이다. 버리고 가는 건 인간의 자유다. 아! 나는 내 십자가를 버리지 않았느냐? 내가 지고 갈 내 십자가를 내가 버리면 아무 누구도 대신 지고 가지 못할게다. 나는 꼭 지고 가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지고 걷자. 그래 하나님께서 주신 내 의무를 다 마치자.(68.9)

마을벽화

윤상원은 광주북중학교를 거쳐 사레지오고교를 나왔다. 고교 때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퉁소를 불던 중학생이 내 삶에 주어진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해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의무를 마치자는 대목이 마치 훗날을 얘기하는 것 같아 애절하다. 1971년 삼수 끝에 전남대 정외과에 입학했다. 연극반에 들어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대왕'의 예언자 배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듬해 군에 갔고 1975년 복학했다. 그 때 김상윤을 만난다. 민청학련 사건 전남대 총책으로 구속되어 12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출소한 김상윤. 뜻이 같으면 인생의 어느 골목에선가 꼭 만난다하더니, 둘은 운명처럼 만났다.


몇 년 만에 다시 일기를 써본다. 28년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과 자책을 느낀다.(77.5.26) 좋은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자신에 대해 명확히 엄격할 수 있어야 되겠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일차적으로 중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는 어떻게 실천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것이다.(77.5.26) 불초소생 부모님의 뜻을 저버리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를 길러주시고 뒷바라지 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평생을 다 바쳐 노력해도 부족합니다만,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현실을 좌시할 수 없어 그만두려 하니 부모님 양해해 주십시오.(78.7, 편지)


윤상원은 1978년 1월 주택은행 시험에 합격했다. 2월 졸업과 동시에 봉천동 지점에 출근했다. 7월 교육지표 시위로 수배중인 조봉훈, 김윤기, 김선출, 박몽구가 찾아온다. 그는 사표를 던지고 광주 녹두서점으로 돌아온다. 10월 플라스틱 공장에 취직해 광천 시민아파트에 방을 한 칸 얻고는 들불야학에서 강학을 시작했다. 12월 야학의 횃불을 들었던 박기순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 없이 눈을 감고 있는가?'라고 썼다.

광주 광산구 천동마을 우물터

1960년부터 쓴 일기는 1979년 4월에 끝난다. '윤상원 일기'의 원본은 방대하다. 68년까지가 9권, 그 이후가 1권으로 모두 10권이다. 책 3권 분량이다. 아들이 떠난 뒤에는 아버지가 일기를 썼다. 88년부터 07년까지 2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썼다. 일기장은 20권이고 책으로 8권 분량이다.

"왔다고 인사를 하냐, 간다고 인사를 하냐, 이 자슥아" 하던 아버지가 "상원이는 죽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인식이 바뀌어 가는 시간들이 그 안에 들어있다. 아들이 앞에서 20년, 아버지가 뒤에서 20년씩 일기를 쓴 일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작가 황광우가 이 부자, 40년 일기를 다 읽고 간추려서 '윤상원 일기(1960~1979)' '윤석동 일기(1988~2007)'라는 2권으로 책으로 엮어 2021년 펴냈다.

'윤상원 일기'의 말미에 부록으로 '열흘의 자취(80.5.18~5.27)가 실려 있다.

9시경 윤상원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남대 정문 앞인데요. 군인들과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공수특전단이라고 하는데, 완전히 무장하고 사정 없이 학생들을 때리고 있어요.'(18일·정현애 기록)

광천동 야학 공동방에는 서대석 동근식 정재호 김경국 이영주 등 강학들이 모여 추후 야학운영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상원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19일 임낙평 기록)

날이 밝아오자 서점은 사람들의 집결장소가 되었다. 윤상원과 서대석이 광천동에서 작성한 1호를 가져왔다.(21일 정현애 기록)

윤상원이 진지하게 논의를 이끌었다. '이제 투쟁의 중심은 시민군이 되었습니다.…지금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 있습니다. 비록 군부의 진압작전에 의해 패한다 하더라도…' 3만여 장의 5호는 그날 밤을 새워 만들어졌다.(22일 임낙평 기록)

YMCA에 집결한 청년 백여명을 이끌고 전남도청 입성계획을 상원은 결행하고 만다. 드디어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했다. 위원장은 김종배가 맡았다.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는 계엄군에게 결사항전으로 맞설 항쟁지도부가 탄생한 것이다.(25일 드라마 '시민군 윤상원' 기록)

'보잘 것 없이 무장한 학생 투사들은 저항하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항복할 겁니까?(브레들리 마틴)'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탱크를 동원해 진압하겠다면 우리는 어차피 질 수밖에 없겠죠.…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윤상원)(26일 기자회견·브레들리 마틴 기록)

'윤상원씨 이렇게 만나서 서로 즐거웠습니다. 저승에 가서도 좋은 친구가 됩시다. 그쪽도 요렇게 불평등한 사회면은 거기 가서도 학생운동을 헙시다…희미하게 동이 터오는데 탕! 하는 소리가 나더만 "아이고~" 배를 잡고 쓰러지더만, 정신을 놓아 불더라고. 차디찬 바닥에서 그냥 눈을 감으면 불편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푹신한 이불을 깔아서 그 안에 요렇게 누워주면 천당으로 갈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듭디다.(27일 새벽에 대한 이양현의 2008년 구술)

도청을 접수한 계엄군은 윤상원의 주검을 신원확인도 하지 않고 이틀간 방치했다. 29일 청소차에 실린 그의 시신은 망월동 묘역에 버려졌다. 가매장지 앞에는 '관 번호 57'이라고 쓰인 푯말만 남았다.

밀밭풍경

마을 앞에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고 남으로 어등산이, 그리고 서편으로 멀리 용진산이 우뚝 솟아있다. 그 사이로 황룡강이 흐르는 천동마을. 동구에 들어서면 피리 부는 윤상원이 앉아 있다. 그가 태어나 자란 집이다. 담벼락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백석의 시처럼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다 간 향년 30세, 그리고 그날 이후로 죽어서 43년. '어느 먼 산 뒷 옆 바위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그는 떠나지 않고 우리 가슴 속에 갈매나무로 살아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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