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에서 의병으로··· 숱한 민중이 스러져 간 피의 격전지

입력 2023.11.14. 18:42 김현주 기자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
⑪삼도~본량
전주서 나주로 가는 길목이자
혁명의 불꽃 되살리려 한 곳
향반 가문서 태어난 오권선과
수많은 농민군 생명 내던져져
구한말 호남의병 함성 메아리도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9월 마지막주 어느날 용진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용진정사'를 답사하였다. '선비는 의리와 도리에 맞지 않으면 한가지도 남에게 받지 않는데 어찌 원수의 돈을 받겠는가'하고, 일왕(日王)의 은사금을 거부한 기개있는 선비 후석(後石)오준선(吳駿善)선생이 1917년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던 유서 깊은 강당이다. 선선한 가을바람속에 강당의 정취는 예스러운데 오준선선생의 초상화를 모시는 영당 마루에 앉아 바깥풍경을 보니 저만치서 후석선생께서 다가오신 듯 하여 옷깃이 여미어진다. 그림=정암 김집중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 ⑪삼도~본량?

'7월 삭1일 적의 괴수 최경선이 일당 수천 명을 거느리고 짓밟으며 본 고을에 직접 쳐들어왔다. 오권선은 괴수의 우두머리가 되어 군중들을 통솔하고 와서 금안동에 진을 치고 수삼일 동안 침략을 가하면서 금성산으로 개미떼가 붙듯이 올랐고, 삭 5일 어두울 무렵에 산 정상으로부터 물밀듯이 내려와 서성문을 공격하였다.…관군들은 지휘명령을 받은 즉시 대완포와 장대포를 연발로 쏘아대니 화염이 붉게 솟아오르고 그 소리는 산악을 울렸다.'

나주 유생 이병수가 관변의 시각으로 기록한 '금성정의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때는 바야흐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동학은 갑오년 1월 농민군의 고부관아 점령을 시작으로, 3월 반봉건 투쟁인 1차 봉기, 9월 반외세 투쟁인 2차 봉기를 거쳐,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12월 전봉준이 순창에서 붙잡혀 이듬해 3월 숨지기까지 1년 남짓 전개된 민중의 무장투쟁이자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위 기록에서 괴수의 우두머리로 언급된 오권선(1861~?)은 광산 삼도태생으로 자가 중문이다.

지주이자 선비 집안의 외아들로 유복하게 자랐다.

나주에서는 갑오년 당시부터 "잘 났다, 오중문. 글 잘한다, 오중문. 쌈 잘한다, 오중문"이라는 말이 돌았고, 지금까지 구전되어 온다고 한다. 그가 언제 동학접주가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동도 괴수 오권선은 평소 부량배로 오염된 지 오래된 자로, 옛 동학의 대접주'라는 이병수의 기록에 따라 '백산기포' 이전에 동학지도자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백산기포는 갑오년 3월26일 부안 백산에서 호남일대 동학교도가 총집결한 출정식이자 혁명의 서막이다. 오권선은 장성 황룡촌 전투와 전주 점령 때 크게 활약한 이후 집강소 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나주대접주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삼도와 본량은 광주 서쪽 끝의 너른 들이고, 전주에서 나주로 가는 길목이다.

나주성은 인적 물적 자원의 전략적 요충지로, 혁명의 성패를 좌우할 중요한 거점이었다. 전봉준은 나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등에 찔린 가시 같고, 눈에 박힌 바늘과 같다"면서 전투를 독려했고, 직접 와서 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7월 서성문 전투를 시작으로 11월 남산촌 전투까지 나주 광산 일대에서 일곱 차례에 걸쳐 전개된다.

그러나 나주성은 견고했다.

나주는 본래 양반과 유림세력이 강한 곳인데다 목사 민종렬이 이끄는 수성군의 화력과 전략이 월등했기 때문에 농민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역사학자 이이화의 책 '파랑새는 산을 넘고'에는 노안면 서답바위 일대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장면이 나온다.

'농민군이 길을 막고 있을 적에 큰 상여가 나왔다. 농민군은 출출한 김에 상가의 술잔이라도 얻어 마시려 했는지 상여를 멈추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여가 넘어지면서 수성군들이 쏟아져 나와 농민군을 기습했다. 농민군은 혼비백산해 흩어졌다.'

이어 이병수의 기록.

'시체가 들판에 가득히 널려 있었고 흐르는 피가 똘(도랑)을 이루었다. 권선은 겨우 나귀를 타고 멀리 도망쳤다. 부대가 남산을 넘어 추격해 하존의 뒤에 이르러서는 권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수 없었으니, 까맣게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장성 황룡강에서 나주성에 이르기까지, 본량과 삼도와 동곡의 침산과 노안면 일대가 혁명의 마지막 불꽃을 되살리기 위한 격전지였다.

농민군이 나주성을 점령하여 전략적 거점을 확보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까?

광산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동학의 꿈이 무너진 피의 현장이다. '광산구사'는 '그가 남부럽지 않은 유력한 향반 가문에서 태어나 왜 동학에 가담했는지 이유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반봉건 반외세를 내세우며 농민층을 대변하려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오권선을 존경하고 따르는 광산지역의 수많은 농민군이 전투에 나서 생명을 던졌다. 오늘날 오권선으로 대표하는 농민군의 전설적인 활동이 민중들의 입을 통해 아스라이 전해지고 있다'고 쓰고 있다.

용진산(토봉에서 바라본 석봉)

어등산에서 서북쪽으로 황룡강을 건너면 본량의 진산 용진산이 있다.

멀리서 보면 쌍봉이다. 날카로운 서편이 석봉(石峰), 동편이 토봉(土峰 349m)이다.

두 봉 사이 고개는 배가 넘어간다 해서 '배넘이재'라 부른다.

고개에 배가 넘어갈 까닭이 없어 고개를 갸웃할 듯하지만, 이곳은 아득한 옛날 바다였다고 한다. 삼도와 본량을 가르는 평림천 주위로 '배매' '배문이'이라는 마을 이름이, '염바다들' '소금쟁이들'이라는 들녘 이름이, '해등(海燈)'이라는 등대 지명이 남아 전하는 것을 보면 밀물 썰물이 들락거렸던 옛 흔적을 뒷받침 한다. 겹겹이 솟은 봉우리들의 풍광을 일러 '용진층만(聳珍層巒)'이라 하며, 광산8경의 하나다. 들판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솟돌뫼'라 불리는 산, 너른 들녘과 황룡강을 굽어보며 장성과 영광과 광주의 동편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이 용진산은 구한말 일제에 저항하며 호남의병의 함성이 메아리 쳤던 유서 깊은 곳이다.

왕동저수지에서 용진산으로 가는 들머리에 '용진정사(湧珍精舍)'가 있다. 한말 학자 후석(後石) 오준선(1851~1931)이 지은 아담한 강당이다.

원래 용진사가 있던 절터였는데, 조선 개국의 주역인 정도전이 전국을 두루 살피면서 며칠 묵어갔던 곳이기도 하며, 송시열 등 많은 문인들이 다녀가면서 시문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오준선은 어려서 사서와 근사록을 공부했고, 17세에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 공부했다.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건 노사학파가 한말의병의 정신적 산실이 되었듯이 그는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등이 창의의 뜻을 모을 때 함께했다. 1917년 건립된 용진정사는 오준선이 15년간 머무르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글을 쓰고, 후학들에게 항일정신을 가르친 곳이다.

문집 '문인록'에 기록된 그의 제자가 634명에 달한다. 그 중 오상렬 이기손 오성술 전수용 등은 무장투쟁을 전개한 의병장들이다. 그는 또 기삼연 고광순 전수용 기재 오계수 심남일 등의 행적을 수집하여 용진정사에서 '의병전'을 저술했다. 1910년 일제는 호남의 사표(師表)로 이름이 높았던 그에게 일왕의 은사금을 수령하도록 회유 협박했지만 끝내 받지 않았던 일화가 전해온다.

이듬해 은사금 수령거부 죄목으로 일본헌병에 체포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9년 고종이 숨졌을 때 그가 제자들과 함께 통곡했던 정사 앞 바위를 '읍궁암(泣弓岩)'이라 부른다.

용진영당 대문밖 풍경

"나라의 변란에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는 백립(白笠)을 벗을 수 없다"하여 평생 백립을 쓰고 살았으며, 자기 명정에 '조선유민'이라 쓰도록 유언했다. 별세 이후 문인들이 정사 동쪽에 용진영당을 세우고, 1924년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용진산 동쪽으로 내려오면 풍광이 빼어나 소금강이라 불렸던 산자락의 벼랑 위에 마애불이 앉아 있다.

둥근 얼굴에 소박한 웃음을 머금었다. 코는 뭉툭하고 입술은 꼭 다물었다. 대좌와 광배도 없고 왼쪽 어깨에 가사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결과부좌를 틀고 선정에 든 모습, 양손을 둥그렇게 모아 맞대고 있는 모양이 아미타여래불인 듯하다. 먼 훗날 서방정토로 이끌 부처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지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민중의 모습이다. 조선 후기, 백성의 염원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전주에서 나주로 가는 광산의 이 길목에서 동학으로 의병으로,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죽어나갔을까. 삼도와 본량을 무대로 활동했던 동학의 접주 오권선과 노사학파의 오준선. 나라가 망하여 세상이 격랑 속으로 휩쓸리던 동시대를 지나오면서 권선은 민중의 편에 서서 '반봉건 반외세'라는 혁명적 삶을 살았고, 준선은 나라의 입장에 서서 '친봉건 반외세라'는 선비의 정신을 지켰다.

그 시대가 그랬듯이 삼도에서 낳고 자란 씨족형제인 두 오씨는 이렇게 같은 듯 다른 길을 걸었다. 갑오년 동학은 미완의 혁명이었으되 을미년 의병으로 이어지고, 기미년 3·1운동을 촉발시켰으며,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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