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삼도~본량
전주서 나주로 가는 길목이자
혁명의 불꽃 되살리려 한 곳
향반 가문서 태어난 오권선과
수많은 농민군 생명 내던져져
구한말 호남의병 함성 메아리도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 ⑪삼도~본량?
'7월 삭1일 적의 괴수 최경선이 일당 수천 명을 거느리고 짓밟으며 본 고을에 직접 쳐들어왔다. 오권선은 괴수의 우두머리가 되어 군중들을 통솔하고 와서 금안동에 진을 치고 수삼일 동안 침략을 가하면서 금성산으로 개미떼가 붙듯이 올랐고, 삭 5일 어두울 무렵에 산 정상으로부터 물밀듯이 내려와 서성문을 공격하였다.…관군들은 지휘명령을 받은 즉시 대완포와 장대포를 연발로 쏘아대니 화염이 붉게 솟아오르고 그 소리는 산악을 울렸다.'
나주 유생 이병수가 관변의 시각으로 기록한 '금성정의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때는 바야흐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동학은 갑오년 1월 농민군의 고부관아 점령을 시작으로, 3월 반봉건 투쟁인 1차 봉기, 9월 반외세 투쟁인 2차 봉기를 거쳐,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12월 전봉준이 순창에서 붙잡혀 이듬해 3월 숨지기까지 1년 남짓 전개된 민중의 무장투쟁이자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위 기록에서 괴수의 우두머리로 언급된 오권선(1861~?)은 광산 삼도태생으로 자가 중문이다.
지주이자 선비 집안의 외아들로 유복하게 자랐다.
나주에서는 갑오년 당시부터 "잘 났다, 오중문. 글 잘한다, 오중문. 쌈 잘한다, 오중문"이라는 말이 돌았고, 지금까지 구전되어 온다고 한다. 그가 언제 동학접주가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동도 괴수 오권선은 평소 부량배로 오염된 지 오래된 자로, 옛 동학의 대접주'라는 이병수의 기록에 따라 '백산기포' 이전에 동학지도자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백산기포는 갑오년 3월26일 부안 백산에서 호남일대 동학교도가 총집결한 출정식이자 혁명의 서막이다. 오권선은 장성 황룡촌 전투와 전주 점령 때 크게 활약한 이후 집강소 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나주대접주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삼도와 본량은 광주 서쪽 끝의 너른 들이고, 전주에서 나주로 가는 길목이다.
나주성은 인적 물적 자원의 전략적 요충지로, 혁명의 성패를 좌우할 중요한 거점이었다. 전봉준은 나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등에 찔린 가시 같고, 눈에 박힌 바늘과 같다"면서 전투를 독려했고, 직접 와서 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7월 서성문 전투를 시작으로 11월 남산촌 전투까지 나주 광산 일대에서 일곱 차례에 걸쳐 전개된다.
그러나 나주성은 견고했다.
나주는 본래 양반과 유림세력이 강한 곳인데다 목사 민종렬이 이끄는 수성군의 화력과 전략이 월등했기 때문에 농민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역사학자 이이화의 책 '파랑새는 산을 넘고'에는 노안면 서답바위 일대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장면이 나온다.
'농민군이 길을 막고 있을 적에 큰 상여가 나왔다. 농민군은 출출한 김에 상가의 술잔이라도 얻어 마시려 했는지 상여를 멈추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여가 넘어지면서 수성군들이 쏟아져 나와 농민군을 기습했다. 농민군은 혼비백산해 흩어졌다.'
이어 이병수의 기록.
'시체가 들판에 가득히 널려 있었고 흐르는 피가 똘(도랑)을 이루었다. 권선은 겨우 나귀를 타고 멀리 도망쳤다. 부대가 남산을 넘어 추격해 하존의 뒤에 이르러서는 권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수 없었으니, 까맣게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장성 황룡강에서 나주성에 이르기까지, 본량과 삼도와 동곡의 침산과 노안면 일대가 혁명의 마지막 불꽃을 되살리기 위한 격전지였다.
농민군이 나주성을 점령하여 전략적 거점을 확보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까?
광산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동학의 꿈이 무너진 피의 현장이다. '광산구사'는 '그가 남부럽지 않은 유력한 향반 가문에서 태어나 왜 동학에 가담했는지 이유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반봉건 반외세를 내세우며 농민층을 대변하려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오권선을 존경하고 따르는 광산지역의 수많은 농민군이 전투에 나서 생명을 던졌다. 오늘날 오권선으로 대표하는 농민군의 전설적인 활동이 민중들의 입을 통해 아스라이 전해지고 있다'고 쓰고 있다.
어등산에서 서북쪽으로 황룡강을 건너면 본량의 진산 용진산이 있다.
멀리서 보면 쌍봉이다. 날카로운 서편이 석봉(石峰), 동편이 토봉(土峰 349m)이다.
두 봉 사이 고개는 배가 넘어간다 해서 '배넘이재'라 부른다.
고개에 배가 넘어갈 까닭이 없어 고개를 갸웃할 듯하지만, 이곳은 아득한 옛날 바다였다고 한다. 삼도와 본량을 가르는 평림천 주위로 '배매' '배문이'이라는 마을 이름이, '염바다들' '소금쟁이들'이라는 들녘 이름이, '해등(海燈)'이라는 등대 지명이 남아 전하는 것을 보면 밀물 썰물이 들락거렸던 옛 흔적을 뒷받침 한다. 겹겹이 솟은 봉우리들의 풍광을 일러 '용진층만(聳珍層巒)'이라 하며, 광산8경의 하나다. 들판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솟돌뫼'라 불리는 산, 너른 들녘과 황룡강을 굽어보며 장성과 영광과 광주의 동편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이 용진산은 구한말 일제에 저항하며 호남의병의 함성이 메아리 쳤던 유서 깊은 곳이다.
왕동저수지에서 용진산으로 가는 들머리에 '용진정사(湧珍精舍)'가 있다. 한말 학자 후석(後石) 오준선(1851~1931)이 지은 아담한 강당이다.
원래 용진사가 있던 절터였는데, 조선 개국의 주역인 정도전이 전국을 두루 살피면서 며칠 묵어갔던 곳이기도 하며, 송시열 등 많은 문인들이 다녀가면서 시문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오준선은 어려서 사서와 근사록을 공부했고, 17세에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 공부했다.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건 노사학파가 한말의병의 정신적 산실이 되었듯이 그는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등이 창의의 뜻을 모을 때 함께했다. 1917년 건립된 용진정사는 오준선이 15년간 머무르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글을 쓰고, 후학들에게 항일정신을 가르친 곳이다.
문집 '문인록'에 기록된 그의 제자가 634명에 달한다. 그 중 오상렬 이기손 오성술 전수용 등은 무장투쟁을 전개한 의병장들이다. 그는 또 기삼연 고광순 전수용 기재 오계수 심남일 등의 행적을 수집하여 용진정사에서 '의병전'을 저술했다. 1910년 일제는 호남의 사표(師表)로 이름이 높았던 그에게 일왕의 은사금을 수령하도록 회유 협박했지만 끝내 받지 않았던 일화가 전해온다.
이듬해 은사금 수령거부 죄목으로 일본헌병에 체포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9년 고종이 숨졌을 때 그가 제자들과 함께 통곡했던 정사 앞 바위를 '읍궁암(泣弓岩)'이라 부른다.
"나라의 변란에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는 백립(白笠)을 벗을 수 없다"하여 평생 백립을 쓰고 살았으며, 자기 명정에 '조선유민'이라 쓰도록 유언했다. 별세 이후 문인들이 정사 동쪽에 용진영당을 세우고, 1924년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용진산 동쪽으로 내려오면 풍광이 빼어나 소금강이라 불렸던 산자락의 벼랑 위에 마애불이 앉아 있다.
둥근 얼굴에 소박한 웃음을 머금었다. 코는 뭉툭하고 입술은 꼭 다물었다. 대좌와 광배도 없고 왼쪽 어깨에 가사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결과부좌를 틀고 선정에 든 모습, 양손을 둥그렇게 모아 맞대고 있는 모양이 아미타여래불인 듯하다. 먼 훗날 서방정토로 이끌 부처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지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민중의 모습이다. 조선 후기, 백성의 염원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전주에서 나주로 가는 광산의 이 길목에서 동학으로 의병으로,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죽어나갔을까. 삼도와 본량을 무대로 활동했던 동학의 접주 오권선과 노사학파의 오준선. 나라가 망하여 세상이 격랑 속으로 휩쓸리던 동시대를 지나오면서 권선은 민중의 편에 서서 '반봉건 반외세'라는 혁명적 삶을 살았고, 준선은 나라의 입장에 서서 '친봉건 반외세라'는 선비의 정신을 지켰다.
그 시대가 그랬듯이 삼도에서 낳고 자란 씨족형제인 두 오씨는 이렇게 같은 듯 다른 길을 걸었다. 갑오년 동학은 미완의 혁명이었으되 을미년 의병으로 이어지고, 기미년 3·1운동을 촉발시켰으며,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이광이 객원기자
- 500년을 넘어, 왜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몰려들까? 월봉서원은 광산구 임곡동, 이름도 정겨운 '너브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광곡(廣谷)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너브실'이다. 마을 동구 밖에는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노송숲이 있고, 그 숲 사이에 조그마한 모정이 있어 어릴적 고향에 돌아온 듯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너브실의 배산이 되는 백우산 자락에 우거진 소나무 숲을 뒤로하고 아늑하게 들어앉은 월봉서원으로 고봉 기대승 (高峰 奇大升)선생을 찾아간다. 은행나무는 샛노랗게 물이 들었고, 지나가는 답사객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비'를 맞으며 돌담길을 걷는다.그림=정암 김집중[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⑫끝·임곡 월봉서원달이 떠서 걷기에 좋은 밤, 깊어가는 가을밤. 마을을 지나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들어간다. 멀리서 누런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골목 끝에 이르자 앞이 탁 트이고 가로로 늘어선 맞배지붕의 옛 재실(齋室) 같은 학당이 있다. 달빛 가득한 마당에는 풀숲 사이로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댓돌 위에 가지런한 신발들, 그리고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들려온다.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학창의 같은 한복을 입은 한 사람 좌정하고, 그 앞에 장삼이사,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여럿이 모여 앉아 큰 소리로 글을 읽고 있다. '책을 읽으며 옛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거듭거듭 읽어 깊은 뜻에 도달해야 하네/ 보고 얻음이 마음에 와 몸에 새겨져야/ 말에 떨어지지 않고 뜻에 이를 수 있네' 고봉 시 '독서(讀書)' 첫눈이 내릴 즈음의 늦가을 저녁, 월봉서원의 풍경이다. 이 서원의 모습은 16세기인가, 21세기인가?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본다.그 전에도 단성의 도천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등이 있었다. 그런데 백운동 이전에는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祠堂) 역할에 그쳤다. 백운동서원은 고려 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그의 유배지에 세워졌다.마을이름을 따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다가,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명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향의 공간이면서 선비의 자제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공간을 겸해 '최초'라는 이름을 얻었다.소수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墓)'의 구조다. 앞에 학당이 있고 뒤에 사당이 자리한다. 향교에 가면 앞에 명륜당, 뒤에 대성전이 있는 것과 같다.지세와 풍향에 따라 전묘후학이나 좌학우묘의 다른 배치도 있지만 대체로 전학후묘 구조다. 요즘으로 치면 향교는 국립이고 서원은 사립대학이다. 15세기 후반 평민이 군역을 피해 향교로 몰려들었다. 사족들은 이를 꺼려했고, 이 때문에 관학은 후퇴하기 시작했다.조정은 사액서원에 땅과 노비를 하사했고, 면세 면역의 특혜까지 베풀며 장려했다. 오늘날 공교육을 보완하는 많은 사립학교들이 국비지원금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서원은 우후죽순 늘어났다. 관직에서 은퇴한 유학자, 사화를 피해 낙향한 선비, 재야의 양반계급들이 향촌에 서원을 세웠으며 그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다. 선학배향과 후학양성의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에 군역과 조세의 도피처로 악용되는 폐해도 컸다.186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에 따라 서원은 철퇴를 맞는다. 대원군은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했다. 이듬해 만동묘 폐쇄를 시작으로 전국의 서원 사우 1천여 곳이 헐리고 남은 것은 47개소뿐이었다.너브실 돌담길현재 전국에 향교는 234개소, 서원은 약 700여 개소가 있다. 그동안 문중들이 재건하거나, 정부와 지자체 등의 지원으로 복원·복설을 거쳐 많은 서원 향교들이 새로운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서원의 경우 강학기능은 쇠퇴하고 제향기능만 강화된 채 쇠락하여 여전히 박제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드웨어는 복원하였으되 그것을 받쳐줄 소프트웨어는 빈약하니 대중은 찾지 않고 문중, 그들만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고봉 기대승(1527~1572), 광주 출신으로 16세기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다. 자는 명언, 호는 고봉, 관향은 행주다. 고봉은 학행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600여 수의 시를 남긴 감성 짙은 문학가이자 '사칠논변'에서 보여주듯 조선 성리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철학자이며, 중앙정계에 나아가 절의와 도의에 적합한 직론·직강을 펼쳤던 곧은 정치가였다.1578년 향촌의 사림들이 고봉의 학덕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낙암에 '망천사'를 건립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소실돼 산월동 동천 위로 이건했고, 1654년 효종의 사액을 받아 '월봉서원'이 건립된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1938년 빙월당 중건에 이어 고봉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덕사와 내삼문, 장판각을 증설했다. 1991년 동재와 서재, 외삼문을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지금 월봉서원은 문화유산의 활용 측면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다. 광산구는 2017년 전담팀을 구성하고, 퇴계의 도산서원에 필적할 수 있는 고봉의 월봉서원을 만들기 위해 많은 예산과 노력을 쏟아부었다.'선비의 하루, 꼬마철학자 상상학교, 살롱 드 월봉, 월봉로맨스, 조선 브로맨스…' 월봉서원 프로그램은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시민들, 즉 수요자의 요구와 눈높이에 맞춰 구성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많은 시민들의 발길을 서원으로 향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마을주민과 함께하는 '월봉유랑' 축제, 중장년층 대상의 '기세등등 여유', '서원아카데미' 등이 대표적인 월봉서원의 브랜드들이다.그 결과 문화재청의 평가에서 '명예의 전당상'을 수상했고,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비밀의 서원, 월봉'으로 지역문화브랜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문화재와 마을, 문화재와 학교, 문화재와 문화재를 연계해 월봉에서 무양으로, 월봉에서 필암으로, 월봉에서 도산으로 서원을 연결하고, 외국 서원과의 교류도 추진하고 있다. 또 영역을 넓혀 용아생가, 김봉호가옥, 장덕동 근대한옥, 풍영정, 호가정 등 광산구의 옛 다락집과 누정을 접목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문화유산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월봉서원 전경이 '월봉서원 르네상스' 사업은 지난해 고봉 기대승 서세(逝世) 450주년을 계기로 그의 생애와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영역까지 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대중강연과 심포지엄 등이 열리면서 핵심으로 다뤄진 내용은 조선 철학사상사의 백미를 장식한 '퇴고논쟁(退高論爭)'.조선 중기 사상계의 큰 별 이황과 26살 연하인 기대승의 장장 8년에 걸친 철학토론, '세기의 편지'라 불리는 퇴고논쟁이다.먼저 퇴계의 주장. '사단의 발은 순정한 이(純理)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이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기이원론이다.이어지는 고봉의 반론. '대체로 이는 기의 주재(主宰)이고 기는 이의 재료입니다.이 둘은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로 존재할 때는 진실로 혼합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단과 칠정은 애초부터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일원론이다. 두 논쟁은 '이기(理氣)는 섞일 수 없다(퇴계)'와 '이기(理氣)는 분리할 수 없다(고봉)'로 요약된다.논리를 비약하면, 퇴고논쟁은 이 세상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한 사람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퇴계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은 다른 것이라 선인과 악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고, 고봉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이 다르지 않으므로 선인과 악인을 나눌 수 없게 된다. 고봉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면 미워할 악인이 없게 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의 뿌리 같다. 더 나가면 사형제도의 찬반 같은 의제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이념의 논쟁에 닿을 듯하다.우리는 고봉의 사유 속에서 비로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똘레랑스와 연대(連帶)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길의 시작이 공동체 정신이고, 그 길의 목적지는 '함께 사는 세상'일 것이다.다시 비약하자면, 고봉의 사유 속에서 '동아시아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저 어등산을 무대로 일어났던 16세기 의병들, 갑오년의 동학, 구한말의 창의군들,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80년 5월까지 도도하게 흐르는 전라도, 광주정신의 단초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늦가을 월봉서원의 학당에서 500년의 시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있다. 21세기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바둑의 다음 수를, 논문의 구성을, 선악의 문제를 AI가 가르쳐주는 이러한 시대에, 저 이끼 낀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16세기 고봉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것은 그저 어느 강학소의 풍경 같지만, 서원에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이어지고, 우리의 문화유산이 빗장을 열고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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