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과 고려인을 품은 어등산 아랫마을

입력 2023.10.03. 18:34 고은주 기자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
⑩광산 월곡동
<월곡동 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 2004년 2월 개소한 '고려인종합지원센터'는 광주이주 고려인들의 국내정착을 위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취업,산재,체류,법률, 의료 등 상담은 물론 자녀보육,한국어교육 등을 위한 원스톱 체제를 갖추고 있다. 또한 사회통합프로그램, 조기적응지원센터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지원의 손길을 펼치고 있다. 이주 고려인들은 고국이나 고향이 그리울때 '아리랑'을 즐겨 부른다. 이들이 부르는 아리랑 속에는 이들의 삶과 애환이 깃들어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그림=정암 김집중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⑩광산 월곡동

'달(達)'은 '산(山)'의 옛 말이다. 높은 곳이어서 달(月)이 잘 보이는 곳, 달동네는 산동네라는 뜻이다.

달은 산이고, 곡은 골짜기이니 '월곡(月谷)동'은 반달처럼 생긴 '산골짜기 동네'다. 동으로 극락강이 흐르고 서편 멀리 어등산이 솟은 골짜기 마을.

월곡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어등의 일몰은 장관이었다. 저물녘 산정공원에 오르면 붉게 물든 들의 작은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고, 소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의 느린 발걸음, 나락이 여무는 여름을 지나 가을이면 과수원의 능금이 익어가던 곳, 그 전원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이제는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됐다.

월곡동은 1987년 택지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월곡 호동 사상 등 대부분의 전통마을들이 사라졌다. 지금은 가까이 하남공단 금호타이어 평동공단 소촌공단 같은 공단이 줄줄이 들어섰고, 월곡동을 가르는 사암로와 접경을 지나는 산정로가 고속도로와 연결되는 도심교통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이곳 산정공원 바로 아래 '고려인마을'이 있다.

'까레이스키'라는 낯선 이름의 사람들, 그들은 왜 조국을 떠나 유랑을 시작했으며, 얼마나 긴 시간을 지나보내고, 또 얼마나 먼 거리를 돌아 그리운 조국이자 이국땅인 광주 월곡동에 정착하게 됐을까?

고려인이 연해주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863년. 함경도 북쪽에 살던 몇몇 농가가 연해주 지신허 강변에 들어가 집 짓고 농사를 시작한 것이 시초다. 당시 조선은 소수의 양반들이 토지를 독점했고, 백성들은 기근과 학정에 시달리는, 망국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인민은 먹고 살기 위해 조국을 등지고 유랑 길에 오른다.

한편은 헐벗은 농민들로 청나라 동북지방인 만주로 이주해 조선족이 됐다. 다른 한편은 농부와 상인들, 그리고 이어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압력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면서 고려인이 된다.

월곡동 고려인 중심거리(산정공원로 일원)

조선족과 고려인은 비슷한 듯 다르다. 초기 이주민들은 원시시대처럼 움막을 짓고 조 기장 귀리 콩 옥수수 같은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다가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만 인근 평지를 개척해 마을을 이룬다. '개척리', '신한촌'이라 불린 이 마을에 일제에 쫓긴 지식인들이 모여든다. 신한촌은 고려인들의 중심지로 떠올라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다. 당시 고려인 수가 크게 늘어 연해주 전체인구의 20%를 차지했고, 비공식인구까지 합치면 10만에 육박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부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1937년까지 일제강점기 30여 년 동안 그들의 항일운동은 들불처럼 타올랐다.

항일은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변화한다. 1920년 6월 홍범도 최진동 장군의 독립군 부대가 유인작전을 펼쳐 일본군 300여명을 사살한 봉오동 전투, 그 해 10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해 서울의 5배 면적인 두만강 북쪽 산중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 전투를 펼치면서 일본군 1천200여명을 사살한 청산리 대첩이 그 무렵이다.

KBS가 2020년 제작한 '봉오동 청산리 승리 100주년, 민족영웅 홍범도' 특집방송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시 북로군정서 소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던 이우석 노병의 육성이다.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주린 배를 안고 싸우는데, 아랫마을 부인들이 밥을 보자기에, 행주치마에 싸가지고 와서 자꾸 던져줘요. 그걸 먹으면서 총을 쏘면서 고지에 올라갔어요.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도 여자들이 밥을 갖다 준 그것만은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 누가 그걸 생각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행주대첩에서 돌을 나른 조선의 여인들처럼,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주먹밥을 해서 던져준 사람들이 조선족이고 고려인들이었다.

홍범도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 1868년 태어날 때 어머니가 죽고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그 역시 머슴살이를 전전했다. 금강산 신계사에 출가했는데 비구니 이씨와 사랑에 빠져 환속했고 아들 둘을 낳았다. 1907년 장군이 의병 '산포대'를 창의해 일본군경 30여명을 사살하던 이듬해 아내는 일본군에 체포돼 옥사했다.

같은 해 6월 장남 양순은 함남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홍범도는 아들을 데리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했는데 차남 용환도 결핵으로 병사해, 결국 가족을 모두 잃었다.

1937년 고려인들은 다시 먼 길을 떠난다.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옮겨갔다. 9월9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열차는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키, 치타로, 이르쿠츠크,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나 카자흐스탄 우스또베에서 처음으로 멈췄다.

10월9일이었다. 뒤이은 열차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사람들을 부리고, 또 다른 열차는 카스피해 넘어 아스트라한까지, 끝없는 열차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고려인 17만2천명이 그렇게 떠났고 그 열차 안에 홍범도 장군도 있었다. '이주'가 아닌 '추방'이었다. 6천400㎞, 한 달이 넘는 그 길은 혹독했고, 새 삶터는 가혹했다.

당시 홍범도의 나이 70세. 그는 고려인들의 자부심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고려인들은 그곳에서 다시 뿌리내리고 '소련인'으로서의 새 삶을 일구었다. 홍범도 장군은 그곳,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 수직원(수위)으로 일하다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숨을 거두었다.

향년 75세.

88서울올림픽은 오랜 단절을 다시 잇는 전환점이었다. 고려인들은 서울 올림픽을 지켜보면서 잊었던 조국을 찾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된다.

그들에게 모국어 열풍이 불었고, 한국에 교사파견을 요청했다. 이 소식이 광주에 전해져 뜻있는 사람들이 모금에 나섰고, 1991년 고려인 마을에 최초의 민간 한글학교가 들어서게 된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와 알말릴크, 카자흐스탄의 알마틔와 우스또베, 그리고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광주 한글학교'가 세워졌다. 광주는 이듬해 교사들을 직접 파견했다. 그 씨앗이 외교부 문화부 등 정부기관으로 넘어가면서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그해 12월 페레스트로이카의 기치 아래 구소련이 붕괴되자 고려인들은 여러 민족국가의 소수민족으로 쪼개지면서 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1990년대 중반 고려인들은 한국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그들 일부가 광산구 월곡동과 산정동에 들어온 것이 2000년 무렵, 공단지대여서 일자리가 많고 월세가 비교적 싼 이곳에 모여든 것이다. 광주는 이들에게 따뜻한 품을 열어주었다.

고려인마을이 비영리사단법인으로 등록되면서 2012년 어린이집 개소를 시작으로 고려인 광주진료소, 새날학교, 협동농장, 월곡 고려인문화관 '결', 그리고 GBS고려방송이 개국하기에 이른다. 일상에 불편함이 없도록 행정지원이 이뤄져 지금은 약 7천여명이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고려인 문화관 '결'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2021년 문을 연 이 문화관은 각종 기록물과 사진, 생활유물 등 1만2천여 점이 전시된 세계유일의 고려인 역사유물 전시관으로, 160년 고려인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다. 김병학관장은 "광주의 고려인 마을은 다른 어느 국가나 지역의 '디아스포라(국외자)' 공동체에 비해 매우 모범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면서 "그것은 국가폭력의 아픔을 갖고 있는 5월 광주가 조국을 잃고 떠돌던 고려인의 슬픈 유랑을 깊이 공감해주면서 가슴 깊이 받아들여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범도장군 흉상(월곡동 다모아공원)

그리고 홍범도 장군이 돌아왔다. 2021년 광복절 저녁에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6대의 엄호비행을 받으며 그의 유해가 서울공항에 도착했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1921년 연해주 이주 뒤 100년 만이고, 서거 78년 만이었다. 그리고 꼭 1년이 지나 월곡동 다모아 어린이 공원에 홍장군의 흉상이 서고 추모공간이 조성됨으로써 고려인들과 홍범도 장군은 다시 만났다.

아름다운 전원마을에서 공단이 들어선 산업지대로, 그리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상생도시로, 월곡동이 바뀌고 있다. 160년의 세월 동안 3만리에 이르는 긴 유랑의 삶을 살았던 고려인들은 조국의 이곳 월곡동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고려인들은 홍범도 장군 흉상철거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광복절에 다모아 공원 그의 흉상 앞에 다시 모여 예를 올리고 그를 추모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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