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광산 월곡동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⑩광산 월곡동
'달(達)'은 '산(山)'의 옛 말이다. 높은 곳이어서 달(月)이 잘 보이는 곳, 달동네는 산동네라는 뜻이다.
달은 산이고, 곡은 골짜기이니 '월곡(月谷)동'은 반달처럼 생긴 '산골짜기 동네'다. 동으로 극락강이 흐르고 서편 멀리 어등산이 솟은 골짜기 마을.
월곡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어등의 일몰은 장관이었다. 저물녘 산정공원에 오르면 붉게 물든 들의 작은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고, 소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의 느린 발걸음, 나락이 여무는 여름을 지나 가을이면 과수원의 능금이 익어가던 곳, 그 전원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이제는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됐다.
월곡동은 1987년 택지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월곡 호동 사상 등 대부분의 전통마을들이 사라졌다. 지금은 가까이 하남공단 금호타이어 평동공단 소촌공단 같은 공단이 줄줄이 들어섰고, 월곡동을 가르는 사암로와 접경을 지나는 산정로가 고속도로와 연결되는 도심교통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이곳 산정공원 바로 아래 '고려인마을'이 있다.
'까레이스키'라는 낯선 이름의 사람들, 그들은 왜 조국을 떠나 유랑을 시작했으며, 얼마나 긴 시간을 지나보내고, 또 얼마나 먼 거리를 돌아 그리운 조국이자 이국땅인 광주 월곡동에 정착하게 됐을까?
고려인이 연해주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863년. 함경도 북쪽에 살던 몇몇 농가가 연해주 지신허 강변에 들어가 집 짓고 농사를 시작한 것이 시초다. 당시 조선은 소수의 양반들이 토지를 독점했고, 백성들은 기근과 학정에 시달리는, 망국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인민은 먹고 살기 위해 조국을 등지고 유랑 길에 오른다.
한편은 헐벗은 농민들로 청나라 동북지방인 만주로 이주해 조선족이 됐다. 다른 한편은 농부와 상인들, 그리고 이어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압력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면서 고려인이 된다.
조선족과 고려인은 비슷한 듯 다르다. 초기 이주민들은 원시시대처럼 움막을 짓고 조 기장 귀리 콩 옥수수 같은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다가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만 인근 평지를 개척해 마을을 이룬다. '개척리', '신한촌'이라 불린 이 마을에 일제에 쫓긴 지식인들이 모여든다. 신한촌은 고려인들의 중심지로 떠올라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다. 당시 고려인 수가 크게 늘어 연해주 전체인구의 20%를 차지했고, 비공식인구까지 합치면 10만에 육박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부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1937년까지 일제강점기 30여 년 동안 그들의 항일운동은 들불처럼 타올랐다.
항일은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변화한다. 1920년 6월 홍범도 최진동 장군의 독립군 부대가 유인작전을 펼쳐 일본군 300여명을 사살한 봉오동 전투, 그 해 10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해 서울의 5배 면적인 두만강 북쪽 산중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 전투를 펼치면서 일본군 1천200여명을 사살한 청산리 대첩이 그 무렵이다.
KBS가 2020년 제작한 '봉오동 청산리 승리 100주년, 민족영웅 홍범도' 특집방송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시 북로군정서 소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던 이우석 노병의 육성이다.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주린 배를 안고 싸우는데, 아랫마을 부인들이 밥을 보자기에, 행주치마에 싸가지고 와서 자꾸 던져줘요. 그걸 먹으면서 총을 쏘면서 고지에 올라갔어요.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도 여자들이 밥을 갖다 준 그것만은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 누가 그걸 생각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행주대첩에서 돌을 나른 조선의 여인들처럼,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주먹밥을 해서 던져준 사람들이 조선족이고 고려인들이었다.
홍범도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 1868년 태어날 때 어머니가 죽고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그 역시 머슴살이를 전전했다. 금강산 신계사에 출가했는데 비구니 이씨와 사랑에 빠져 환속했고 아들 둘을 낳았다. 1907년 장군이 의병 '산포대'를 창의해 일본군경 30여명을 사살하던 이듬해 아내는 일본군에 체포돼 옥사했다.
같은 해 6월 장남 양순은 함남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홍범도는 아들을 데리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했는데 차남 용환도 결핵으로 병사해, 결국 가족을 모두 잃었다.
1937년 고려인들은 다시 먼 길을 떠난다.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옮겨갔다. 9월9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열차는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키, 치타로, 이르쿠츠크,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나 카자흐스탄 우스또베에서 처음으로 멈췄다.
10월9일이었다. 뒤이은 열차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사람들을 부리고, 또 다른 열차는 카스피해 넘어 아스트라한까지, 끝없는 열차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고려인 17만2천명이 그렇게 떠났고 그 열차 안에 홍범도 장군도 있었다. '이주'가 아닌 '추방'이었다. 6천400㎞, 한 달이 넘는 그 길은 혹독했고, 새 삶터는 가혹했다.
당시 홍범도의 나이 70세. 그는 고려인들의 자부심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고려인들은 그곳에서 다시 뿌리내리고 '소련인'으로서의 새 삶을 일구었다. 홍범도 장군은 그곳,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 수직원(수위)으로 일하다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숨을 거두었다.
향년 75세.
88서울올림픽은 오랜 단절을 다시 잇는 전환점이었다. 고려인들은 서울 올림픽을 지켜보면서 잊었던 조국을 찾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된다.
그들에게 모국어 열풍이 불었고, 한국에 교사파견을 요청했다. 이 소식이 광주에 전해져 뜻있는 사람들이 모금에 나섰고, 1991년 고려인 마을에 최초의 민간 한글학교가 들어서게 된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와 알말릴크, 카자흐스탄의 알마틔와 우스또베, 그리고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광주 한글학교'가 세워졌다. 광주는 이듬해 교사들을 직접 파견했다. 그 씨앗이 외교부 문화부 등 정부기관으로 넘어가면서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그해 12월 페레스트로이카의 기치 아래 구소련이 붕괴되자 고려인들은 여러 민족국가의 소수민족으로 쪼개지면서 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1990년대 중반 고려인들은 한국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그들 일부가 광산구 월곡동과 산정동에 들어온 것이 2000년 무렵, 공단지대여서 일자리가 많고 월세가 비교적 싼 이곳에 모여든 것이다. 광주는 이들에게 따뜻한 품을 열어주었다.
고려인마을이 비영리사단법인으로 등록되면서 2012년 어린이집 개소를 시작으로 고려인 광주진료소, 새날학교, 협동농장, 월곡 고려인문화관 '결', 그리고 GBS고려방송이 개국하기에 이른다. 일상에 불편함이 없도록 행정지원이 이뤄져 지금은 약 7천여명이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고려인 문화관 '결'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2021년 문을 연 이 문화관은 각종 기록물과 사진, 생활유물 등 1만2천여 점이 전시된 세계유일의 고려인 역사유물 전시관으로, 160년 고려인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다. 김병학관장은 "광주의 고려인 마을은 다른 어느 국가나 지역의 '디아스포라(국외자)' 공동체에 비해 매우 모범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면서 "그것은 국가폭력의 아픔을 갖고 있는 5월 광주가 조국을 잃고 떠돌던 고려인의 슬픈 유랑을 깊이 공감해주면서 가슴 깊이 받아들여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이 돌아왔다. 2021년 광복절 저녁에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6대의 엄호비행을 받으며 그의 유해가 서울공항에 도착했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1921년 연해주 이주 뒤 100년 만이고, 서거 78년 만이었다. 그리고 꼭 1년이 지나 월곡동 다모아 어린이 공원에 홍장군의 흉상이 서고 추모공간이 조성됨으로써 고려인들과 홍범도 장군은 다시 만났다.
아름다운 전원마을에서 공단이 들어선 산업지대로, 그리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상생도시로, 월곡동이 바뀌고 있다. 160년의 세월 동안 3만리에 이르는 긴 유랑의 삶을 살았던 고려인들은 조국의 이곳 월곡동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고려인들은 홍범도 장군 흉상철거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광복절에 다모아 공원 그의 흉상 앞에 다시 모여 예를 올리고 그를 추모했다.
이광이 객원기자
- 500년을 넘어, 왜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몰려들까? 월봉서원은 광산구 임곡동, 이름도 정겨운 '너브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광곡(廣谷)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너브실'이다. 마을 동구 밖에는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노송숲이 있고, 그 숲 사이에 조그마한 모정이 있어 어릴적 고향에 돌아온 듯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너브실의 배산이 되는 백우산 자락에 우거진 소나무 숲을 뒤로하고 아늑하게 들어앉은 월봉서원으로 고봉 기대승 (高峰 奇大升)선생을 찾아간다. 은행나무는 샛노랗게 물이 들었고, 지나가는 답사객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비'를 맞으며 돌담길을 걷는다.그림=정암 김집중[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⑫끝·임곡 월봉서원달이 떠서 걷기에 좋은 밤, 깊어가는 가을밤. 마을을 지나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들어간다. 멀리서 누런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골목 끝에 이르자 앞이 탁 트이고 가로로 늘어선 맞배지붕의 옛 재실(齋室) 같은 학당이 있다. 달빛 가득한 마당에는 풀숲 사이로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댓돌 위에 가지런한 신발들, 그리고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들려온다.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학창의 같은 한복을 입은 한 사람 좌정하고, 그 앞에 장삼이사,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여럿이 모여 앉아 큰 소리로 글을 읽고 있다. '책을 읽으며 옛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거듭거듭 읽어 깊은 뜻에 도달해야 하네/ 보고 얻음이 마음에 와 몸에 새겨져야/ 말에 떨어지지 않고 뜻에 이를 수 있네' 고봉 시 '독서(讀書)' 첫눈이 내릴 즈음의 늦가을 저녁, 월봉서원의 풍경이다. 이 서원의 모습은 16세기인가, 21세기인가?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본다.그 전에도 단성의 도천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등이 있었다. 그런데 백운동 이전에는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祠堂) 역할에 그쳤다. 백운동서원은 고려 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그의 유배지에 세워졌다.마을이름을 따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다가,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명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향의 공간이면서 선비의 자제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공간을 겸해 '최초'라는 이름을 얻었다.소수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墓)'의 구조다. 앞에 학당이 있고 뒤에 사당이 자리한다. 향교에 가면 앞에 명륜당, 뒤에 대성전이 있는 것과 같다.지세와 풍향에 따라 전묘후학이나 좌학우묘의 다른 배치도 있지만 대체로 전학후묘 구조다. 요즘으로 치면 향교는 국립이고 서원은 사립대학이다. 15세기 후반 평민이 군역을 피해 향교로 몰려들었다. 사족들은 이를 꺼려했고, 이 때문에 관학은 후퇴하기 시작했다.조정은 사액서원에 땅과 노비를 하사했고, 면세 면역의 특혜까지 베풀며 장려했다. 오늘날 공교육을 보완하는 많은 사립학교들이 국비지원금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서원은 우후죽순 늘어났다. 관직에서 은퇴한 유학자, 사화를 피해 낙향한 선비, 재야의 양반계급들이 향촌에 서원을 세웠으며 그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다. 선학배향과 후학양성의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에 군역과 조세의 도피처로 악용되는 폐해도 컸다.186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에 따라 서원은 철퇴를 맞는다. 대원군은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했다. 이듬해 만동묘 폐쇄를 시작으로 전국의 서원 사우 1천여 곳이 헐리고 남은 것은 47개소뿐이었다.너브실 돌담길현재 전국에 향교는 234개소, 서원은 약 700여 개소가 있다. 그동안 문중들이 재건하거나, 정부와 지자체 등의 지원으로 복원·복설을 거쳐 많은 서원 향교들이 새로운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서원의 경우 강학기능은 쇠퇴하고 제향기능만 강화된 채 쇠락하여 여전히 박제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드웨어는 복원하였으되 그것을 받쳐줄 소프트웨어는 빈약하니 대중은 찾지 않고 문중, 그들만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고봉 기대승(1527~1572), 광주 출신으로 16세기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다. 자는 명언, 호는 고봉, 관향은 행주다. 고봉은 학행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600여 수의 시를 남긴 감성 짙은 문학가이자 '사칠논변'에서 보여주듯 조선 성리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철학자이며, 중앙정계에 나아가 절의와 도의에 적합한 직론·직강을 펼쳤던 곧은 정치가였다.1578년 향촌의 사림들이 고봉의 학덕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낙암에 '망천사'를 건립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소실돼 산월동 동천 위로 이건했고, 1654년 효종의 사액을 받아 '월봉서원'이 건립된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1938년 빙월당 중건에 이어 고봉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덕사와 내삼문, 장판각을 증설했다. 1991년 동재와 서재, 외삼문을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지금 월봉서원은 문화유산의 활용 측면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다. 광산구는 2017년 전담팀을 구성하고, 퇴계의 도산서원에 필적할 수 있는 고봉의 월봉서원을 만들기 위해 많은 예산과 노력을 쏟아부었다.'선비의 하루, 꼬마철학자 상상학교, 살롱 드 월봉, 월봉로맨스, 조선 브로맨스…' 월봉서원 프로그램은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시민들, 즉 수요자의 요구와 눈높이에 맞춰 구성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많은 시민들의 발길을 서원으로 향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마을주민과 함께하는 '월봉유랑' 축제, 중장년층 대상의 '기세등등 여유', '서원아카데미' 등이 대표적인 월봉서원의 브랜드들이다.그 결과 문화재청의 평가에서 '명예의 전당상'을 수상했고,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비밀의 서원, 월봉'으로 지역문화브랜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문화재와 마을, 문화재와 학교, 문화재와 문화재를 연계해 월봉에서 무양으로, 월봉에서 필암으로, 월봉에서 도산으로 서원을 연결하고, 외국 서원과의 교류도 추진하고 있다. 또 영역을 넓혀 용아생가, 김봉호가옥, 장덕동 근대한옥, 풍영정, 호가정 등 광산구의 옛 다락집과 누정을 접목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문화유산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월봉서원 전경이 '월봉서원 르네상스' 사업은 지난해 고봉 기대승 서세(逝世) 450주년을 계기로 그의 생애와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영역까지 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대중강연과 심포지엄 등이 열리면서 핵심으로 다뤄진 내용은 조선 철학사상사의 백미를 장식한 '퇴고논쟁(退高論爭)'.조선 중기 사상계의 큰 별 이황과 26살 연하인 기대승의 장장 8년에 걸친 철학토론, '세기의 편지'라 불리는 퇴고논쟁이다.먼저 퇴계의 주장. '사단의 발은 순정한 이(純理)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이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기이원론이다.이어지는 고봉의 반론. '대체로 이는 기의 주재(主宰)이고 기는 이의 재료입니다.이 둘은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로 존재할 때는 진실로 혼합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단과 칠정은 애초부터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일원론이다. 두 논쟁은 '이기(理氣)는 섞일 수 없다(퇴계)'와 '이기(理氣)는 분리할 수 없다(고봉)'로 요약된다.논리를 비약하면, 퇴고논쟁은 이 세상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한 사람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퇴계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은 다른 것이라 선인과 악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고, 고봉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이 다르지 않으므로 선인과 악인을 나눌 수 없게 된다. 고봉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면 미워할 악인이 없게 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의 뿌리 같다. 더 나가면 사형제도의 찬반 같은 의제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이념의 논쟁에 닿을 듯하다.우리는 고봉의 사유 속에서 비로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똘레랑스와 연대(連帶)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길의 시작이 공동체 정신이고, 그 길의 목적지는 '함께 사는 세상'일 것이다.다시 비약하자면, 고봉의 사유 속에서 '동아시아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저 어등산을 무대로 일어났던 16세기 의병들, 갑오년의 동학, 구한말의 창의군들,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80년 5월까지 도도하게 흐르는 전라도, 광주정신의 단초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늦가을 월봉서원의 학당에서 500년의 시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있다. 21세기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바둑의 다음 수를, 논문의 구성을, 선악의 문제를 AI가 가르쳐주는 이러한 시대에, 저 이끼 낀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16세기 고봉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것은 그저 어느 강학소의 풍경 같지만, 서원에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이어지고, 우리의 문화유산이 빗장을 열고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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