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광산구 송정동 도산동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⑧광산구 송정동 도산동
지명에는 대개 옛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그 땅의 지세와 형세와 물산에 따라 이름 지어지기도 하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재미나고 전설 같은 사연들이 지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지명은, 전에는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바로 드러나 보였지만 많은 세월이 흘러 풍속이 바뀌면서, 동구 밖 당산나무의 나이테처럼 선대의 입으로 전해오는 아득한 옛 이야기를 안으로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바다를 메워 광양제철소를 세운 그 뒤편 마을의 옛 이름이 ‘쇳골’이었다거나, 충북 청주에 ‘비상리(飛上里)’와 ‘비하리(飛下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영락없이 청주공항이 들어서더라는 이야기들. 비상리에서 이륙하고 비하리에서 착륙하더라는, 어찌 그리 방향까지 내다보고 이름 지었을까 하며 선현들의 예지에 감탄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 여기에 비상의 ‘비’가 원래 ‘날비(飛)’가 아니고 비석을 가리키는 ‘돌기둥비(碑)’였으며, 비석 윗마을, 비석 아랫마을에서 유래했다는 반론도 따라붙고, 그런데 그 비석을 아직까지 못 찾는 것을 보면 원래 ‘날 비(飛)’가 맞다는 재반론도 이어지고. 이야기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질긴 생명력이 있다. 의미 전달이 끝나자마자 그 효과가 소멸되어 암기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는 지식이나 정보와는 달리, 시베리아 동토(凍土)에서 발견한 씨앗에서 1만년 전의 패랭이꽃이 피었다는 이야기처럼, 그것은 안개처럼 아득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이야기가 또 이야기를 낳는 무궁동(無窮動) 속으로 우리를 당기는 힘이 있다.?
광산구 1번지 송정동. '송정'은 우리나라 여러 고을에 흔히 붙은 이름이다. 대개 소나무 숲에 정자가 있어 '송정(松亭)'이라 불렸던 마을들.
부여의 소정이, 경주의 소징이, 정읍의 쇠정이, 포천의 쇠쟁이, 인제의 솔정지, 다들 그 유래가 같다. 이것이 한자로 바뀌면서 '송정'이 됐고, '소정이'는 '우정(牛亭)동'이 되기도 했다. 광산의 송정(松汀)은 한자가 다르다.
'정자정(亭)'이 아니라 '물가정(汀)'을 쓴다. 그런데 이 '송정(松汀)'이 1879년 '조선후기 지방지도'에는 '송정(松亭)'이라 표기됐고,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 명칭일람'이라는 책의 광주군조에는 '송정(松亭)면 송정(松汀)리'라고 기록돼 있다. '송정(松亭)'은 소나무 숲에 정자가 앉아 있는 곳이지만 '송정(松汀)'은 거기에 하나 더, 연못이나 하천이 흐르는 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일대가 서북에서 내려온 황룡강과 동북에서 흘러든 극락강이 만나 영산강으로 합쳐지면서 나주평야를 관통하는 Y자형 두물머리인 것을 보면 '정(亭)' 보다는 '정(汀)'이 더 잘 어울린다.
조선후기 문신 오횡묵의 '지도총쇄록'에 그가 지도군수로 부임하며 이 일대를 지나는 감상을 적은 대목이 나온다.
'백마산 서남쪽 끝에 극락원(極樂院)이 있는데 원 주변에 방죽이 있고 연꽃이 피어 향기가 그윽하다. 멀리 바라보이는 갈대숲에 띄엄띄엄 마을이 보이고 고총(古塚·옛 무덤) 주변에 소나무가 둘러져 해오라기가 노닌다'고 기록돼 있다.
류복현 전 광산문화원장은 '이 극락원 주변이 극락강 건너 야촌 도호 도산 용보 고내상 마을 등 송정동과 도산동 일대로 보인다'면서 '너른 습지 군데군데 돌무덤과 둔치가 있어 철새들의 도래지가 됐을 것이고, 강이 샛강이 되고 잡초가 우거진 강가에 사람들이 논밭을 개간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됐을 것'이라고 '광산구사'에 쓰고 있다.
광산구청 소재지인 송정동은 동으로 신흥동, 서로 평동과 이웃하고, 남쪽에 도산동과 동곡동, 북쪽에 어룡동과 마주한다.
좁게는 법정동 송정동만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옛 송정시 일원(도산, 어룡, 우산, 신흥)을, 더 넓게는 송정권 지역 전체(동곡, 평동, 삼도, 본량)까지도 송정이라고 불린다.
광주에서 나주평야를 지나 목포항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송정은 예부터 사통팔달의 요충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기지였다.
전라도 각 지역에서 나는 곡식과 특산품 같은 물산들이 대형 미곡창고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져, 일본 열도로 가거나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실어 나르는 전초기지였다.
1913년 양곡창고가 있던 이곳에 목포까지의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역이 들어선다. 아직 광주역이 생기기 전이어서 광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작은 정거장에 불과했던 송정리역은 1920년 즈음 일본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활기를 띠게 됐고, 해방 이후 1세기 넘도록 교통의 요충으로 기능해 왔다.
1988년 역사 신축과 2004년 증개축을 거쳐 2009년 광주송정역으로 개명됐다.
2015년 호남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광주역을 밀어내고 남도의 핵심 정거장으로 자리 잡았다. 어느 지역이나 역과 장은 뗄 수 없는 공간이듯이 역이 생기던 그해 자연스레 역 앞에 장이 섰다. '매일송정역전시장', 2016년 '1913송정역시장'이란 이름으로 부활한 바로 그 시장이다. 지역문화를 토대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길거리 공연 중심의 볼거리를 만들었고, 야시장 등 다채로운 이벤트를 전통시장에 접목해 '문화체험형 시장'으로 변화를 꾀했다.
건물의 옛 모습을 그대로 살리고, 또 추억이 살아나는 간판도 옛것을 바꾸지 않고, 시장바닥 곳곳에 가게건물이 완공된 연도 표석을 새겨 넣는 등 100년의 시간여행을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단장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핫한 관광명소로 떠오르는 곳이다.
상설시장인 '송정매일시장', '송정5일시장'과 더불어 송정리 3대 시장으로 불린다.
송정5일장은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는데, 3·8일 장날 전라도 소들이 다 모였다고 할 만큼 큰 우시장이 섰고, 열차 곡물수송이 편리해 대규모의 미곡시장이 열렸으며, 더불어 가마니장으로도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던 전통시장이다. 지금 시장 주차장 자리가 옛 우시장이 섰던 곳이다.
2003년 광주시가 '미향(味鄕)'의 멋을 살려 대표음식으로 '5미(味)'를 선정했는데 '광주 한정식', '광주 오리탕', '무등산 보리밥', '광주 김치'와 더불어 '송정 떡갈비'가 들어간다. 광산구청 주변에 이 떡갈비집들이 밀집돼 '송정리 향토 떡갈비거리'가 조성됐다.
'광산구사'에 따르면 1950년대 최처자 할머니가 그 원조다. 당시 최할머니가 길거리에서 탁자와 의자만 놓고 떡갈비와 비빔밥을 팔기 시작한 것이 유래가 됐다.
오일장 옆이어서 우시장과 푸줏간에서 나오는 자투리 고기들이 흔했다. 발라낸 갈빗살에 양념해 숯불에 구워낸 떡갈비와 고추장에 버무린 비빔밥은 소 팔러 나온 사람, 장보러 나온 사람들을 상대로 짧은 시간에 허기를 달래는 장바닥 음식으로 그만이었다. 떡갈비는 인절미를 치듯이 네모난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살점이 붙은 돼지 뼈를 무 양파 마늘 생강과 함께 푹 삶아낸 뼛국도 별미다.
송정을 이야기하면서 '용보(用洑)'를 빼놓을 수 없다. 송정1동, 조선 초기 전라병마도절제사의 병영이 있던 터다.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이 병영을 태종 17년(1417년) 강진으로 옮기는데 그곳이 지금의 강진군 병영면이다. 용보는 남쪽에 사는 해오라기가 많이 찾아와 '회오리방죽'이라 불리던 옛날 '고내성(古內城, 또는 古內廂)', 지금은 공항이 돼버린 인근 마을이다.
황룡강에서 송정들녘으로 흐르는 '봇도랑'이 마을을 관통한다고 해서 나루터를 뜻하는 '용보'가 되었다고 한다. 1964년 광주공항이 들어서기 전까지 남평으로 가는 큰 길가의 촌락으로 '한새골(황새골)'이 있던 너른 들녘이었다.
이곳에 공군전투비행단이 창설되면서 미군들이 주둔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기지촌'이 들어섰다. 1968년 외국인 전용 유흥술집 '보난자'를 시작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식당 세탁소 잡화점 미장원 등 40여개의 상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어느 날은 하루에 500여명의 미군이 쏟아져 나와 용보촌 상가는 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지역경기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30여호 용보촌 원주민들은 대부분 셋방을 놓아 생계를 유지했다.
한창 경기 좋을 때 '용보촌은 동네 개들도 입에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미군과 아가씨들이 어울려 다니는 송정시가지는 이국적인 풍경에 젖어 들기도 했다.
전국에서 상업지역이 아닌 주거지역에 기지촌이 들어선 것은 용보가 유일했다. 1990년대 미군 감축이 시작되면서 많은 상가가 폐업하고 그 흥청거리던 네온사인의 거리는 빛을 잃었다.
지금은 마을 도랑 길을 따라 기지를 둘러친 긴 벽과 주변의 아파트들 사이에 몇 안 되는 원주민들의 집이 남아 있다.
광산구는 조선시대 병영으로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기 근대도시로 성장한 이 일대에 '역사문화 산책길'을 조성해 놓았다. 광산의 명동이라 불리던 '광산로'를 시작으로, '송정 오일장'과 '1913 송정역시장', 그리고 송정역 건너편의 '미곡시장'을 거쳐 주택단지 속의 푸른 공간인 '도시 속 논밭'을 지나는 길이다.
이 길의 끝인 송정2동과 도산동 사이 사거리 한편에 옛날 여기가 강이었음을 알려주는 '도산교(道山橋) 표지석'이 서 있다. 이광이 객원기자
- 500년을 넘어, 왜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몰려들까? 월봉서원은 광산구 임곡동, 이름도 정겨운 '너브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광곡(廣谷)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너브실'이다. 마을 동구 밖에는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노송숲이 있고, 그 숲 사이에 조그마한 모정이 있어 어릴적 고향에 돌아온 듯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너브실의 배산이 되는 백우산 자락에 우거진 소나무 숲을 뒤로하고 아늑하게 들어앉은 월봉서원으로 고봉 기대승 (高峰 奇大升)선생을 찾아간다. 은행나무는 샛노랗게 물이 들었고, 지나가는 답사객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비'를 맞으며 돌담길을 걷는다.그림=정암 김집중[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⑫끝·임곡 월봉서원달이 떠서 걷기에 좋은 밤, 깊어가는 가을밤. 마을을 지나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들어간다. 멀리서 누런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골목 끝에 이르자 앞이 탁 트이고 가로로 늘어선 맞배지붕의 옛 재실(齋室) 같은 학당이 있다. 달빛 가득한 마당에는 풀숲 사이로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댓돌 위에 가지런한 신발들, 그리고 글 읽는 소리 낭랑하게 들려온다.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학창의 같은 한복을 입은 한 사람 좌정하고, 그 앞에 장삼이사,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여럿이 모여 앉아 큰 소리로 글을 읽고 있다. '책을 읽으며 옛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거듭거듭 읽어 깊은 뜻에 도달해야 하네/ 보고 얻음이 마음에 와 몸에 새겨져야/ 말에 떨어지지 않고 뜻에 이를 수 있네' 고봉 시 '독서(讀書)' 첫눈이 내릴 즈음의 늦가을 저녁, 월봉서원의 풍경이다. 이 서원의 모습은 16세기인가, 21세기인가?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본다.그 전에도 단성의 도천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등이 있었다. 그런데 백운동 이전에는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祠堂) 역할에 그쳤다. 백운동서원은 고려 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그의 유배지에 세워졌다.마을이름을 따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다가,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명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향의 공간이면서 선비의 자제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공간을 겸해 '최초'라는 이름을 얻었다.소수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墓)'의 구조다. 앞에 학당이 있고 뒤에 사당이 자리한다. 향교에 가면 앞에 명륜당, 뒤에 대성전이 있는 것과 같다.지세와 풍향에 따라 전묘후학이나 좌학우묘의 다른 배치도 있지만 대체로 전학후묘 구조다. 요즘으로 치면 향교는 국립이고 서원은 사립대학이다. 15세기 후반 평민이 군역을 피해 향교로 몰려들었다. 사족들은 이를 꺼려했고, 이 때문에 관학은 후퇴하기 시작했다.조정은 사액서원에 땅과 노비를 하사했고, 면세 면역의 특혜까지 베풀며 장려했다. 오늘날 공교육을 보완하는 많은 사립학교들이 국비지원금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서원은 우후죽순 늘어났다. 관직에서 은퇴한 유학자, 사화를 피해 낙향한 선비, 재야의 양반계급들이 향촌에 서원을 세웠으며 그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다. 선학배향과 후학양성의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에 군역과 조세의 도피처로 악용되는 폐해도 컸다.186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에 따라 서원은 철퇴를 맞는다. 대원군은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했다. 이듬해 만동묘 폐쇄를 시작으로 전국의 서원 사우 1천여 곳이 헐리고 남은 것은 47개소뿐이었다.너브실 돌담길현재 전국에 향교는 234개소, 서원은 약 700여 개소가 있다. 그동안 문중들이 재건하거나, 정부와 지자체 등의 지원으로 복원·복설을 거쳐 많은 서원 향교들이 새로운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서원의 경우 강학기능은 쇠퇴하고 제향기능만 강화된 채 쇠락하여 여전히 박제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드웨어는 복원하였으되 그것을 받쳐줄 소프트웨어는 빈약하니 대중은 찾지 않고 문중, 그들만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고봉 기대승(1527~1572), 광주 출신으로 16세기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다. 자는 명언, 호는 고봉, 관향은 행주다. 고봉은 학행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600여 수의 시를 남긴 감성 짙은 문학가이자 '사칠논변'에서 보여주듯 조선 성리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철학자이며, 중앙정계에 나아가 절의와 도의에 적합한 직론·직강을 펼쳤던 곧은 정치가였다.1578년 향촌의 사림들이 고봉의 학덕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낙암에 '망천사'를 건립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소실돼 산월동 동천 위로 이건했고, 1654년 효종의 사액을 받아 '월봉서원'이 건립된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1938년 빙월당 중건에 이어 고봉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덕사와 내삼문, 장판각을 증설했다. 1991년 동재와 서재, 외삼문을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지금 월봉서원은 문화유산의 활용 측면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다. 광산구는 2017년 전담팀을 구성하고, 퇴계의 도산서원에 필적할 수 있는 고봉의 월봉서원을 만들기 위해 많은 예산과 노력을 쏟아부었다.'선비의 하루, 꼬마철학자 상상학교, 살롱 드 월봉, 월봉로맨스, 조선 브로맨스…' 월봉서원 프로그램은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시민들, 즉 수요자의 요구와 눈높이에 맞춰 구성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많은 시민들의 발길을 서원으로 향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마을주민과 함께하는 '월봉유랑' 축제, 중장년층 대상의 '기세등등 여유', '서원아카데미' 등이 대표적인 월봉서원의 브랜드들이다.그 결과 문화재청의 평가에서 '명예의 전당상'을 수상했고,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비밀의 서원, 월봉'으로 지역문화브랜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문화재와 마을, 문화재와 학교, 문화재와 문화재를 연계해 월봉에서 무양으로, 월봉에서 필암으로, 월봉에서 도산으로 서원을 연결하고, 외국 서원과의 교류도 추진하고 있다. 또 영역을 넓혀 용아생가, 김봉호가옥, 장덕동 근대한옥, 풍영정, 호가정 등 광산구의 옛 다락집과 누정을 접목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문화유산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월봉서원 전경이 '월봉서원 르네상스' 사업은 지난해 고봉 기대승 서세(逝世) 450주년을 계기로 그의 생애와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영역까지 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대중강연과 심포지엄 등이 열리면서 핵심으로 다뤄진 내용은 조선 철학사상사의 백미를 장식한 '퇴고논쟁(退高論爭)'.조선 중기 사상계의 큰 별 이황과 26살 연하인 기대승의 장장 8년에 걸친 철학토론, '세기의 편지'라 불리는 퇴고논쟁이다.먼저 퇴계의 주장. '사단의 발은 순정한 이(純理)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이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기이원론이다.이어지는 고봉의 반론. '대체로 이는 기의 주재(主宰)이고 기는 이의 재료입니다.이 둘은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로 존재할 때는 진실로 혼합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단과 칠정은 애초부터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일원론이다. 두 논쟁은 '이기(理氣)는 섞일 수 없다(퇴계)'와 '이기(理氣)는 분리할 수 없다(고봉)'로 요약된다.논리를 비약하면, 퇴고논쟁은 이 세상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한 사람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퇴계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은 다른 것이라 선인과 악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고, 고봉의 사유 속에서는 선악이 다르지 않으므로 선인과 악인을 나눌 수 없게 된다. 고봉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면 미워할 악인이 없게 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의 뿌리 같다. 더 나가면 사형제도의 찬반 같은 의제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이념의 논쟁에 닿을 듯하다.우리는 고봉의 사유 속에서 비로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똘레랑스와 연대(連帶)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길의 시작이 공동체 정신이고, 그 길의 목적지는 '함께 사는 세상'일 것이다.다시 비약하자면, 고봉의 사유 속에서 '동아시아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저 어등산을 무대로 일어났던 16세기 의병들, 갑오년의 동학, 구한말의 창의군들,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80년 5월까지 도도하게 흐르는 전라도, 광주정신의 단초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늦가을 월봉서원의 학당에서 500년의 시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있다. 21세기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바둑의 다음 수를, 논문의 구성을, 선악의 문제를 AI가 가르쳐주는 이러한 시대에, 저 이끼 낀 늙은 서원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16세기 고봉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것은 그저 어느 강학소의 풍경 같지만, 서원에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이어지고, 우리의 문화유산이 빗장을 열고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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