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易地思之'] 늑장재판의 고통에 둔감한 사법부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입력 2025.02.11. 09:41
강준만(전북대 명예교수)

"사법부 신뢰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이고, 대법원이 검찰과 함께 경찰보다 낮은 신뢰도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사법개혁은 없다."(세명대 교수 이봉수, 경향신문 2021년 2월 9일) "(영국의 레가툼 번영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사법체계와 법원에 대한 신뢰도는 전체 167개국 가운데 155위로 거의 바닥을 찍었다.... 이런 불신에도 한국은 법조인들이 점령하는 국가가 돼 가고 있다."(서울대 교수 한숭희, 경향신문 2023년 5월 11일)

이렇듯 사법부 신뢰도가 바닥을 기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늑장 재판이다. 헌법 27조 3항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현행법은 민사소송은 1심, 항소심 각각 5개월 이내에, 형사소송은 1심 6개월, 항소심 4개월 이내에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직선거법 270조는 "선거범 재판의 선고는 1심은 공소제기 후 6개월, 2심 및 3심은 전심 선고 후 각 3개월 (합계 1년) 이내에 반드시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다 말이 그렇다는 것일 뿐 믿을 게 못 된다.

재판 지연은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2017년 9월~2023년 9월)에 악화됐다. 그의 대법원장 취임 이후 1심에서 1년 넘게 처리되지 못한 재판이 급증했으며, 민사는 65%, 형사는 68% 늘어났다. 2022년 대한변호사협회의 설문조사에 응답한 변호사의 약 90%가 최근 5년간 재판 지연을 경험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김명수가 사법 민주화라면서 도입한 법원장 후보 추천제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 폐지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법원장 후보 추천제는 각 법원마다 소속 판사들이 투표를 통해 법원장 후보를 복수로 선출하면 대법원장이 한 명을 법원장으로 임명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법원장이 자신을 뽑아준 후배들 눈치를 보느라 사건을 빠르게 처리하라고 지시하는 게 어려워졌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는 판사들이 업무에 매달리는 대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명수는 퇴임 직전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재판 지체'가 심각해진 것은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취임사에 밝혔던 것처럼 신속과 효율도 중요하지만 충실한 심리를 통해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재판을 하려고 했다"며 "(변호사 출신 등) 경력 법관들이 늘면서 예전처럼 사명감과 열정만 갖고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고 법관 수도 부족하다. 코로나로 재판이 정지되는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재판이 지연됐다"고 했다.

하지만 '워라밸'의 영향은 인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법원행정처와 법원공무원노조는 '워라밸' 촉진을 위해 '오후 6시 이후 재판 자제' 정책추진서에 합의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에선 평판사들이 부장판사들에게 '한 달에 합의부 사건은 2~3건만 선고' '배석판사가 쓴 판결문 수정은 한 번만 할 것' '배석판사와의 합의(논의)는 일주일에 두 번만 할 것'이라는 요구 사항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 부장판사는 "의욕적으로 하려는 판사는 모난 돌로 찍혀 정 맞는 분위기"라고 했다.(조선일보, 2021년 5월 21일)

'워라밸'은 판사를 비롯한 법원 노동자들의 복지·인권 향상에 기여한 것이니, 김명수가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 업적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우리 사회는 2-3년마다 이사해야 하는 판사들의 고충에 너무 둔감하다. 그들의 처우 개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워라밸'로 인해 심해진 재판 지연의 해소를 위해 어떤 다른 대책을 강구했으며, 그걸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느냐는 점이다.

소송이 길어지면 당사자들은 큰 고통을 겪는다.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는 건 물론이고 생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판사들이 법정에 들어가서 가장 자주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제발 빨리 좀 끝내 주세요"다. 피가 마를 지경이라며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법부와 국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법정책연구원의 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법관 1인당 민·형사 본안 사건 수는 독일의 약 5.17배, 일본의 약 3.05배, 프랑스의 약 2.36배다. 재판 진행 속도를 높일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판사 증원'이지만, 다른 공무원과 달리 판사와 검사의 증원은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3,214명)과 '검사정원법'(2,292명)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법을 개정해 늘리면 되지만, 여야의 정략 대결에 발목이 잡혀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래서 법관 정원은 2014년부터 10년째 3,214명으로 묶이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국회만 나쁜가? 사법부에겐 문제가 없는가? 혹 독자들 중엔 국민의 고통을 외면한 국회의 한심한 직무유기 작태에 판사들이 집단적으로 분노를 표했다거나 비판을 퍼부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게다. 좋게 말하자면 사법부는 너무 점잖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재판이 지연돼도 오후 6시에 칼퇴근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새 대법원장 조희대는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지는데도 법원이 지키지 못해 국민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2023년 12월 11일 취임사)고 했다. 그가 재판 지연이 국민적 사법 불신의 원인이 될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걸 깨달은 건 박수를 칠 만한 일이지만, 진행 속도가 느리다는 점에서 아쉽다. 2024년 12월 10일 판사 정원을 현행 3,214명에서 3,584명으로 총 370명을 2025년부터 2029년까지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증원하는 내용의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 일부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건 반길 일이지만, 증원 숫자가 적다는 점에서 아쉽다.

사법부는 어느 언론인이 던진 다음 질문을 뼈 아프게 받아 들이면서 부디 많은 시민들이 겪고 있을 늑장재판의 고통에 대한 둔감함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공직선거법 재판에서 신속한 판결을 위한 소위 '6·3·3 원칙'을 안 지킨 판사에게 그에 해당하는 12개월(6+3+3) 동안 전액 감봉 처분을 하는 법 개정안을 내놓으면 여론이 어떻게 움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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