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시대정신] 프라이버시의 예능화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입력 2024.10.29. 10:50
이진우 전 포스텍 명예교수

사생활이 없다. 모든 사생활이 오락의 대상으로 예능화됨으로써 '사적인 것'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요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를 막는 차원에서 말하자면, 나는 결코 오락이나 예능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락'은 여가에 여러 방법으로 기분을 즐겁게 하는 일을 의미하고 '예능'은 본래 대중 앞에서 공연하는 연예와 관련된 능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돌아가는 세상사가 가뜩이나 복잡하고 심란한데 소소한 오락과 즐거움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TV 프로그램이 온통 예능으로 가득한 것은 어쩌면 우리의 삶과 사회가 그만큼 어렵다는 징표인지도 모른다.

예능이 범람하여 오락화되지 않은 영역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의 예능화'는 연예와 예능 프로그램이 단순히 많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교육도 예능화되고, 스포츠도 예능화된다. 트로트를 부활시켜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게 한 것도 경연 프로그램 자체를 재미있게 예능화했기 때문이다. 음식도 예능화되고, 스포츠도 예능화된다. 육아, 교육, 상담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공적인 삶과 관련된 정치도 이미 오래전에 예능에 장악되었다. 국민의 관심을 받고 표를 얻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정치토론은 더욱더 예능화된다.

예능은 오늘날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의 관심을 상품화하는 예능이 우리의 삶과 사회의 곳곳에 스며들면, 우리가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중 하나가 사생활의 예능화로 인한 프라이버시의 침식이다. 우리는 이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적인 것'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새로운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의 지저분한 이혼 과정이 적나라하게 대중에게 노출되고, 공론을 다루는 주요 일간지도 앞다투어 이를 보도한다. 대중의 관심 때문에 보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생활이 투명하게 노출된다는 점에서 정론지와 타블로이드 신문의 차이는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대중적인 오락성과 흥미 위주의 기사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통되고, 대중은 아무런 저항 없이 이를 소비한다.

사생활을 오락으로 전환한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리얼리티 텔레비전이다. '이혼숙려캠프', '환승연애', '돌싱글즈', '이제 혼자다', '금쪽 상담소'와 같은 프로그램을 보라. 과거 같으면 입에 올리기 힘들고 가능한 한 숨기고 싶은 사생활들이 아무렇지 않게 공개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금기시된 사회적 문제를 공론화한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과도한 예능화는 해당 문제를 오락화하고 희화화함으로써 오히려 진지한 논의를 방해한다.

미국의 경우 '카다시안 자매 따라잡기', '빅 브라더'와 같은 쇼는 개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하여 시청자가 가장 친밀한 순간을 오락으로 소비하도록 한다. 카다시안 가족의 경우 공적 삶과 사적 삶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가족의 개인적 관계, 갈등, 심지어 출산까지도 수백만 명의 시청자에게 방송되어 한때 사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대중이 소비하는 콘텐츠로 바뀌고 있다.

리얼리티 텔레비전은 모든 사적인 것을 투명하게 만드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이곳에서 평범하거나 유명한 사람들은 그들의 실제 삶을 각본화하고 조작하고 편집하여 엔터테인먼트 가치를 극대화하는 내러티브의 캐릭터가 된다. 실제의 삶이 연출되어 우리에게 보여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실제의 삶과 연기된 삶을 구별할 수 없다. 이 과정은 종종 개인적 갈등이 과장되거나 극적인 효과를 위해 연출되면서 현실을 왜곡한다. 시청자는 리얼리티 텔레비전이 전적으로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참여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매우 '진짜'이다. 이러한 리얼리티 쇼의 스타들에게 개인적인 삶은 상품으로 바뀌어 이익을 위해 청중에게 판매된다.

물론 끊임없는 노출은 심리적 스트레스, 사생활 부족, 어떤 경우에는 대중의 조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노출이 정상화되면서 시청자에게는 사생활과 공적 삶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리얼리티 TV가 일부 사람들의 삶을 방송한다면, 소셜 미디어는 이러한 현상을 '민주화하여'거의 모든 사람이 개인적인 삶을 엔터테인먼트로 바꿀 수 있게 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개인은 일상에서 자신의 사적인 삶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다.

'좋아요', 공유, 팔로워에 대한 욕구는 사용자가 자신의 사적인 삶에 대한 세부 사항을 더 많이 공개하도록 장려한다. 그 결과 가족 모임이나 개인적인 갈등과 같이 한때 사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활동이 이제는 많은 청중과 공유된다.

유튜브의 블로거는 팔로워를 위해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노출하여 수익을 창출한다. 그것은 먹방일 수도 있고, 연애와 출산 과정일 수도 있고, 연애과정일 수도 있다.

인플루언서는 종종 현실과 욕망의 경계가 모호한 자신의 삶에 대한 큐레이션된 버전을 만들어 개인적인 순간을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바꾼다. 특히 눈에 띄는 예 중 하나는 가족 블로깅이다. 부모가 자녀가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삶을 기록하여 동의 없이 자녀를 대중 인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라면서, 자신이 포기하는 프라이버시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친밀한 영역마저 예능화되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첫째, 개인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사적인 삶을 공개해야 한다고 느끼는 과도한 공유 문화를 조장한다. 둘째,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이 제시하는 교묘하게 연출된 버전과 비교하면서 자기 노출의 경쟁의식이 생긴다. 이는 불안감, 부적절함, 왜곡된 현실 감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끝으로, 삶의 더 많은 측면이 온라인에 노출되면서 공공 공간과 사적 공간의 경계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프라이버시 개념 자체가 의미를 잃기 시작한다. 진정한 인간관계보다 오락을 우선시하는 이러한 변화는 디지털 시대의 프라이버시의 가치에 대해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숨길 게 없을 정도로 사생활이 투명해지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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