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잔치
그 많던 꽃들이 자취를 감추고, 새잎들의 그늘이 무성해진다. 신록의 계절이 열리는 것이다. 너무나 화려했지만, 한편 너무 짧았던 지난 꽃 시절을 아쉬워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지난주 총선 날 오후, 각자 선거를 한 다음, 전국의 문인들 수십 명이 영천의 보현산 자락에 모였다. 나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산돌배나무가 거의 만개한 때여서 그 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꽃나무 하나를 보려고 서울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그리고 대전과 전북에서까지 문인들이 찾아오다니, 봄 호사의 극치가 이런 게 아닌가 여길 만도 하다. 하지만 참으로 진정이 넘치는 소박한 꽃 잔치였다. 오래된 고목이 한껏 가지를 뻗친 채 꽃 핀 장엄한 나무에의 예찬이 잇달아 나왔다. 누군가는 '어르신'이라며 나무에 경배하기도 했다. 이들은 꽃나무 그늘에서 흔쾌한 술자리를 가진 후 이내 뿔뿔이 헤어졌다.
그때가 꽃 시절의 절정기였던 듯하다. 영천시에서 보현산 자락을 찾아가는 길가는 물론 영천 댐 주변의 길은 온통 벚꽃들이 터널을 이루었고, 산록과 들에는 복사꽃이 만개했다. 사과꽃과 자두꽃들 등 봄꽃들이 다투어 피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안 되어 꽃들이 지고, 신록이 세상을 덮기 시작한 것이다. 새삼, 꿈을 꾼 듯이 한 계절의 변화를 바라본다.
이런 글이 눈에 띈다.
"아침이면 새 소리 구르고 언덕은 다시 부풀어 올랐다. 그러므로 어제의 밤이 결코 괴롭고 긴 것만은 아니었다."
문학과지성사의 시인선 600번째 기념으로 나온 앤솔로지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에 실린 이시영 시인의 글이다. 이 책은 시인선 501번에서 599번째에 걸쳐 나온 시집들의, 시인들이 직접 쓴 뒷표지글을 모은 이색적인 앤솔로지다. 이 시인은 시집 '나비가 찾아왔다'의 뒷표지글로 이 짧은 글을 붙였다. 아침에 듣고 보는 자연의 놀라운 변화 앞에서 험난했던 지난밤을 되돌아보는 눈길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그것을 나는 혹독했던 겨울을 지나 그 보상처럼 맞이하는 놀라운 꽃 잔치의 풍성함에 이어 새롭게 다독이는 신록에의 기대로 받아들인다.
#시단의 경사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시단의 경사를 짚고 가야겠다. 이번에 우리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선으로 꼽히는 문학과지성의 시인선집과 창작과비평의 시선이 각각 600권째와 500권째를 내놓아 우리 문학의 눈부신 성과를 펼쳐보이고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첫 출간은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1974년)나 창비시선(1975년)보다 늦었지만 활발히 시집을 펴내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선으로 거듭났다. 1호는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로 1978년 출간 이후 46년이 됐다. 창작과비평도 꾸준히 시선을 펴내어 500권이라는 기념비적인 부피를 쌓았다. 창비시선 1호는 신경림의 '농무'다. 이들 시인선들은 우리 문단의 꽃을 활짝 피워 다른 시인선들의 출간을 견인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에 따라 한국 시단은 더욱 다채로워졌다. 민음사는 '오늘의 시인총서' 외에도 1986년 시작한 '민음의 시' 시인선으로 최근 320호를 펴냈다. 문학동네도 2011년부터 '문학동네시인선'을 출간하며 최근 208호까지 이르렀다.
이들 시인선들의 꾸준한 출간은 우리 문학에의 신뢰와 수준에 대한 자신감이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옅어지는 상황에서도 우리 문단에서 시집들이 꾸준히 발간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꽃의 시절을 거쳐 신록의 푸르름으로 거듭나, 새로운 도약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영의 말처럼 우리 문학은 어렵던 시절을 견뎌내어 이제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소통의 꿈
그래, 다시 말하지만, '아침의 새소리와 부풀어 오른 언덕'은 풍성했던 꽃 시절을 거쳐 맞는 신록의 푸르른 세계로 볼 수도 있다. 그런 아침의 새 기운으로 간밤의 '괴롭고 긴'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 말을 나는 또 우리가 맞이한 새로운 시간으로 바꾸어 말해보고 싶어진다. 선거가 끝난 것이다. 이번 선거는 엄청난 말의 성찬이었다. 온갖 말들이 강렬한 기세로 피어나 봄꽃처럼 화려하게 전국을 덮었다. 그리고 야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특히 불통이라는 현 정부를 겨냥한 야권의 집요한 정권 심판론의 공격이 주효한 듯하다. 이러한 판세 때문에 여러 가지 정국의 전망이 나오지만, 어쨌든 여든 야든 국민의 선택을 받아들여 새롭게 관계를 설정하고 타협하며, 소통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정치도 꽃 시절을 지나 신록의 차분하고도 푸른 시기에 접어든 것이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득 학창 시절에 읽은 이양하의 수필 '신록 예찬'이 생각난다. 자연의 혜택을 고맙게 여기면서 그 가운데서 "봄과 여름이 혜택이 많고 그 가운데서도 봄, 봄 가운데에서도 만산(萬山)에 녹음이 싹트는 이때"를 제일 혜택이 많은 것으로 꼽는다. 그러면서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생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신록에 빗대어 관조한다.
서로가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마구 꽃 피어대던 시절을 지나 한층 차분해진 녹음의 시기를 맞으면서 서로는 서로를 돌아본다. 그렇게 새롭게 우거지면서 강렬한 여름의 세계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 선거 기간 중의 온갖 막말과 상대에 대한 증오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서로는 얼굴을 풀고 소통해야 함을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은 요구하고 있다. 지난주 산돌배나무 아래서 원로 문인이 강조했던 "우리는 꽃도 좋아하지만 사람이 먼저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모였다"는 말처럼 서로 대립했던 마음을 풀어서 어우러지고 상응하는 게 인간의 미덕인 것이다.
꽃 지고 푸르러지는 신록의 계절을 맞아 갖는 바람의 마음이다.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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