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30년 전, 1994년의 설날도 올해와 같은 2월 10일이었다. 사흘 연휴 동안 무려 2천6백만 명이 귀성귀경길에 나서는 등 설 전후의 풍경 또한 올해와 닮은 데가 많았다.
서민의 삶은 그때도 팍팍했다. 1월 장바구니 물가가 평균 30%나 올랐고 대중교통 등 공공요금 인상이 줄을 이었다. 도심에선 취임 1년도 안 된 대통령의 국정 무능을 비판하며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여야 정쟁도 끝없이 이어져 정치는 살얼음판 위에 선 꼴이었다. 북한의 NPT 탈퇴 후 남북관계 역시 최악 국면으로 치달아 결국엔 북의 '서울 불바다'론이 나오려던 시점이었다. 열차 전복, 항공기 추락, 페리 침몰 등 대형 사건 사고마저 잊을만하면 터져 나와 사회불안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다.
물론 다른 점도 많았다. 무엇보다 손꼽을 건 30년 전 당시엔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국민에 대한 사과가 적잖았고 또 진솔했다는 점이다. 국민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정부 스스로 드러내며 사과와 치유를 약속하기도 했다. 설 직후 국회에서 국정보고 연설을 한 이회창 총리가 쇠락해가는 고향 피폐한 농촌 눈물짓는 농어민의 심경을 박두진의 시 ('벗에게')에 빗댄 것도 그 한 예다.
"여기, 마을마다, 옹기종기, 떠들썩하고 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하나도 없이 다 어디로 가버리고, … 그 볼이 귀여운 소녀 하나, 벙글대는 아가 하나 만나 볼 수 없고, 서로 따뜻이 만나면 잡고 흔들 손길 하나 없어, 너무도 혼자라 서러워질 수조차 없는, 그런 날이 찾아온다면, 그대는 어쩌겠는가."
그 전해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된 후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했다. 전 국무위원이 배석한 가운데 TV로 생중계한 담화에서 대통령은 "직을 걸고라도 쌀시장 개방만은 막겠다고 한 약속(대선공약)"을 못 지킨 데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 '사과' '죄책감' 표현을 여섯 차례 반복했지만 성난 민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UR 대책을 위해 대통령 직속 기구로 새로 만든 농어촌발전위원들이 청와대 임명장을 받자마자 데모 현장으로 달려가 차량 방화 등 격렬 시위에 동참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런 판에 총리가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여자도 신생아도 없어' 서럽고 쓸쓸한 농촌 풍경을 농민들보다 더 아프고 섬세하게 그리며 나름의 대책을 내놓은 거였다. 국민을 위하는 섬세한 마음가짐에 야당도 더는 추궁할 말이 없었다.
사실 문민정부는 그때 '사과 공화국' '사과 연속극'이란 비아냥을 듣고 있었다. "자고 나면 머리맡에 사과 한 개"라는 웃지 못할 농담도 돌았다. 그런데도 대통령 총리는 물론 장관들이 직접 사과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물가 불안, 재산공개 부작용, 인사 실패에 작은 발언 실수까지도 적극적으로 나서 사과했다. "잘못이 있으면 즉시 사과하고 고치는 게 군인 정권과 문민정부의 차이"라고 대통령이 강조한 뒤 경향은 관습으로 굳어졌다. 4년 후 IMF 외환위기로 역대 최악 실패 정부로 전락했지만 김 대통령의 '진솔한 사과' 기조는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아들 김현철이 비리 의혹을 받을 때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며 바르게 처신하도록 가르치지 못한 제 불찰"이라고 사과했다. 검찰총장이 그 아들을 구속할 사유를 찾기 어렵다고 하자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당장 구속하라고 여러 차례 주문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대통령이 별건 수사 등 압력을 직접적으로 검찰에 넣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윤석열 정부가 요즘 몇몇 사과를 둘러싼 문제로 큰 곤경에 처한 모습이다. 2022년 취임 후부터 불거진 갖가지 의혹과 비리 무례 실패 실수들이 어설프게 묻혀 있다 갑자기 한꺼번에 솟구쳐 오르는 양상을 보인다. 일이 터졌을 때 바로 사실을 밝혀 사과할 건 사과하고 책임질 건 책임지며 넘기면 됐을 일을 깔고 뭉개다 암 덩어리처럼 키우고 말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위정자의 잘못이나 실수란 여론이 우세한데도 사과는커녕 피해자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언행으로 본질 못지않게 곁가지를 키웠다는 지적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런 오만의 독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쉽사리 곤경을 벗지 못할 것이란 경고음이 심상치 않다.
지금 윤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문제는 당장 두 가지로 압축된다.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대통령 부인의 처신 문제와 이태원 참사를 둘러싼 대통령과 참모들의 정치적 행보가 그것이다. 물론 이 두 사안이 다른 본질에서 파생되었거나 상당히 변질된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 사안은 이미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정국에 미치는 파괴력이 엄청나게 커졌다. 그리고 여론은 이 사안들을 대통령이 솔직담백한 사과로 돌파하고 정치의 새 국면을 열어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당장 이것을 풀지 않고는 국정의 어느 한구석도 제대로 굴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백번을 양보해 두 사안에 윤 대통령이 아무 잘못 책임이 없다고 해도 그걸 밝히는데 나랏힘을 허비할 정도로 우리가 한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황 고물가 쓰나미가 서민을 덮치고 북한은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지 않는가. 대통령 부인이 몰래카메라에 찍히면서까지 받은 명품 백을 국가기록물로 지정해 대대손손 쳐다보며 얘깃거리로 삼을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대명천지 서울 한복판에서 국민 159명이 압사하는 원시적 사고의 진실이 '정쟁거리' 한마디로 배척돼야 할 일인가.
대통령은 일찍이 "국민은 언제나 옳다"는 대명제를 국민 앞에 밝힌 바 있다. 거기다 그동안 여러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70%가량이 두 사안을 대통령의 사과로 풀어야 한다는 응답을 내놓곤 했다. 이런 가운데 소통 전문가들은 "사과를 하게 되면 그때부터 모든 책임이 사과하는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사과를 기피하게 만든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마디 사과가 백 마디 설득을 이긴다'라는 책의 저자 존 케이도는 "한때 사과는 약함과 패배를 시인하는 것으로 여겨져 기피의 대상이 되었으나 오늘날 사과는 강인함, 자신감, 인품, 투명성과 청렴함의 표현으로 인식"된다며 "제대로 된 사과는 자신감 넘치는 리더십의 표상이며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시금석, 개인적 성장을 위한 통로"가 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7일 방송 대담을 통해 최근 여러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으로 전해졌다. 용기 있게 솔직한, 그러면서도 섬세한 리더십이 확인되기를 기대해본다. 민병욱 전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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