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승만기념관 건립 움직임이 있다. 왕년의 인기배우 신영균이 이승만기념관을 지으라고 서울 강동구 땅 4천평을 내놓자 배우 이영애가 5천만원을, 윤석열 대통령이 5백만원을 기부했다. 2023년 10월말 현재 목표액 550억원의 1/10인 55억원이 모금됐다. 배우 신영균이 전재산 기부를 실천해온 것은 훌륭하지만 이번 기부는 정말 말리고 싶다. 이승만기념관을 건립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잘못된 독립운동. 이승만은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하거나 미국 위임통치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미국은 1905년 일본과 '가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필리핀을 미국이, 조선을 일본이 차지하기로 약속했으니 미국에 의지한 독립운동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외교주의자 이승만은 1932년 윤봉길, 이봉창의 의거 소식을 듣고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방해가 된다고 개탄했다. 강도 일제에 맞서 무력항쟁을 주장하는 의열단 창단 선언문을 썼던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의 외교노선을 격렬 성토했다.
2) 미국 교민사회 분열. 하와이 교민 박용만과는 젊을 때 단짝 동지였으나 노선 차이로 갈라져 원수가 되었다. 이승만은 박용만 등 우리 교민을 미국 법정에 세 번 고소했으나 매번 패소했다. 원래 하와이 교민 사회는 상부상조하는 화목한 기운이 감돌았으나 이승만이 온 이후 분열, 대립이 심해졌다. 이승만은 도산 안창호와도 불화, 서재필 박사와도 불화했다.
3) 오만과 자기존대. 이승만은 왕손이라는 의식을 갖고 오만방자했다. 6.25 전쟁 중에는 하도 말을 안 듣고 북진통일 운운 망동을 해서 미국이 쿠데타로 이승만 축출 계획까지 세웠다가 포기했다. 해방후 지극히 보수적인 미군 사령관 핫지중장과도 사이가 틀어져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으니 이런 억지가 있나.
4) 자금 유용. 세계 각국 교민들과 국내 유지들이 어렵게 낸 독립운동 지원금을 상해 임시정부가 미국에 보내면 이승만은 호텔 생활을 하며 호의호식했다. 그 반면,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거지 행색에 밥 굶기가 다반사였다. 상해에서 이승만에게 자금 사용 회계보고를 거듭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완전 무시했다. 이것이 대통령 탄핵을 당한 여러 이유 중 하나다. 탄핵 뒤에도 이승만은 여전히 대통령 명함을 갖고 다녔다.
5) 해방 후 친일 청산 방해. 독립한 새 나라에 민족정기를 세울 반민특위를 해산시켰고, 친일파를 요직마다 중용해 친일파의 나라를 건설했다.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이 수많은 애국시민들을 고문, 살해하는 것을 방치, 조장했다. 독립운동한 사람은 3대가 망하고 친일파는 대대로 떵떵거리는 사회를 만든 책임자는 이승만이다.
6) 남북 분단 조장. 국민 모두가 3.8선은 임시 조처이고 곧 통일한다고 믿었는데 이승만은 일찌감치 1946년 6월 '정읍발언'으로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고 결국 반쪽 정권을 장악했다. 미국조차도 생각하지 않던 남한 단정으로 몰고 감으로써 6.25 전쟁과 남북분단, 대립을 가져오는 단초를 제공했다.
7) 보도연맹, 국민방위군 사건, 제주 4.3 사건, 거창 양민 학살, 대구 가창골 학살 등 6.25 전쟁 전후로 50만 내지 100만명 양민 학살의 최고 책임자가 이승만이다. 전국이 피바다가 됐고, 애국자들이 무수히 희생됐다. 전국 방방곡곡에 애국자들과 억울한 희생자들의 원혼이 떠돈다.
8) 정적 암살과 사법살인.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암살에 이승만은 직간접으로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정권 차원에서 암살을 기획했으므로 범인들은 곧 풀려나 승승장구했다. 이승만은 정적 최능진과 조봉암을 사법살인했다. 민족주의자 최능진은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일했는데 당시 경찰 고위층 대부분이 친일파였다. 그는 친일 경찰의 비호자 조병옥 경무부장과 싸우다 해임됐다. 그는 1948년 초대 총선에서 이승만과 대결하겠다고 서울 동대문 갑구에 도전장을 냈다. 당시 동대문구 여론조사에서 최능진의 인기가 이승만을 능가했다. 그러나 괴한에게 후보등록 서류를 탈취당했고 입후보가 무효가 됐다. 6.25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무고한 최능진을 1951년 대구 가창골에서 총살했다. 법원은 몇 년 전 재심에서 최능진의 무죄와 유족 배상금 지급을 판결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을 날조하여 무고한 조봉암을 사형시킨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9) 독재와 종신집권 기도.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국민이 종신 대통령이 돼달라고 요구했지만 스스로 물러나 미국 민주주의의 전통을 세웠다. 그에 반해 한국의 초대 대통령은 종신 집권을 위해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헌법을 누더기로 만들면서 반칙을 거듭했다. 1956년 대선에서도 막걸리표, 고무신표, 5인조 투표, 100표 다발 바꿔치기(가운데 98장은 조봉암 표, 양쪽 끝 두 장만 이승만 표를 다발로 묶어 몽땅 이승만 표로 처리) 등 온갖 부정을 자행했다. 엄청난 부정투개표에도 불구하고 최종 득표가 이승만 504만, 조봉암 216만, 무효(신익희 추모표) 185만이었으니 실질적으로 야당이 승리한 선거였다.
10) 부패, 비리, 무능한 정부.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는 대단히 무능했고, 1950년대 3백산업 비리를 비롯해 부정부패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인사도 엉망이어서 아첨꾼과 독재 하수인들을 중용했다. 일본 앞잡이로 독립운동가 때려잡던 김창룡을 방첩대장에 기용해 애지중지했고, 최능진 후보등록서류 탈취 사건의 주범인 백성욱, 문봉제를 장관으로 기용했다. 이승만이 방귀를 뀌자 이익흥 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라고 아첨한 것은 유명한 사건이다.
독립운동 방해, 남북 분단, 양민 학살, 민주주의 파괴, 독재의 주범을 숭배하는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다. 이승만기념관은 자라나는 세대의 정신을 혼란시키고 국민의 시비곡직, 분별력을 마비시키고 우리 사회의 도덕, 양심을 파괴할 것이다. 이러고야 세상에 옳고 그른 게 어디 있으며, 앞으로 누가 독립운동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하겠는가. 이정우(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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